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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두 번째 이별. (29/92)

33. 두 번째 이별.2022.03.24.

불길한 예감은 한기처럼 뼈를 파고들었다. 지훈은 처음엔 해인이 바쁜 일이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는 횟수가 잦아졌다. 너무 자주 전화하니 귀찮아서 받지 않는 건가, 그렇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졌다.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을 텐데도 돌아오는 전화가 없을 땐 더욱 그랬다. 메시지를 보내면 한참 후에 답문이 왔다. 바빠서 못 봤다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하지만 그 문자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지훈의 초조함이 극에 달해 결국 우영의 집으로 찾아가기로 결심했던 그 날, 해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돌아온다는 소식이기를 기대하며 전화를 받았지만, 기대와는 달랐다. * * * 우영의 집 앞 카페에서 해인을 만난 지훈은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껴야 했다. 금방이라도 달려가 안고 싶었는데 제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훈이 애써 마음을 추스르며 별일 아닌 듯 물었다.

1654962091736.jpg“몸은 좀 어때?”

16549620917367.jpg“많이 좋아졌어요. 워낙 잘해 주셔서.”

1654962091736.jpg“감사한 일이네.”

진심이었다. 해인을 따듯하게 위로해 준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은 슬펐지만 엄마와도 같은 사람이 그녀의 곁에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1654962091736.jpg“근데 얼굴이 많이 야위었다. 잘 못 먹었나 봐.”

16549620917367.jpg“…….”

아이를 잃었는데 밥이 제대로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 좋은 음식들을 앞에 두고도 해인은 겨우 몇 수저 뜨는 것이 전부였었다.

16549620917367.jpg“내일 집으로 돌아가요.”

1654962091736.jpg“그래. 기다리고 있었어.”

16549620917367.jpg“아니요. 내가 갔을 때 지훈 씨는 없었으면 해요.”

해인은 담담히 말했다. 지훈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지만, 겉으로는 덤덤했다. 파르르 입술까지 떨려왔지만 어쩌면 예상했던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제 연락을 피하는 느낌이 들었을 때부터. 그리고 이 카페에 들어섰을 때 제 눈을 피하는 그녀를 보았을 때도. 씁쓸한 웃음이 흘러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1654962091736.jpg“그게 무슨 말이야?”

16549620917367.jpg“우리 헤어져요.”

1654962091736.jpg“내 연락을 피한 이유가 그거였어?”

16549620917367.jpg“미안……해요.”

지훈은 탄식하듯 웃었다. 차라리 그녀가 제 멱살이라도 잡고 그때 왜 그렇게 떠났냐며 원망을 퍼부어 주었으면 싶었다. 이혼을 말할 때도, 또다시 헤어짐을 말할 때도 그녀는 한 마리 고고한 학처럼 우아할 뿐이다.

1654962091736.jpg“헤어져야 하는 이유는?”

16549620917367.jpg“전에도 말했듯이 유학 가고 싶어요. 영국에서 공부 더 하고 싶어요.”

1654962091736.jpg“공부해. 얼마든지 기다릴게.”

16549620917367.jpg“아니요. 기다리지 말아요. 우린 끝났어요.”

1654962091736.jpg“지금 힘든 건 알겠는데…….”

16549620917367.jpg“힘들어서 이러는 거 아니에요. 사실 처음부터 이래야 했기도 했고.”

1654962091736.jpg“…….”

16549620917367.jpg“나는 이미 마음 정리했으니까 지훈 씨도 정리해 줘요.”

이별을 말하는 해인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적어도 지훈이 보기엔 그랬다. 해인이 저러는 이유를 아예 모르지는 않았다. 아이도 없는 상황에서 한강 그룹을 원하는 집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지금 우리는 서로 좋아하고 있다. 그건 우리가 절대 헤어지지 말아야 할 이유로 충분했다.

1654962091736.jpg“아니, 절대 못 해.”

지훈은 단호히 해인의 말을 거절했다. 말투는 견고하고 단단했으나 해인을 바라보는 지훈의 눈동자는 떨리고 있었다. 해인은 말없이 제 앞에 놓인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을 넘겼다. 처음부터 쉬울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헤어짐의 이유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굳이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훈의 마음이었다.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이 망설임의 원인이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다시 힘겨운 재결합의 길을 가기는 싫었다. 어쩌면 그에겐 정말 한강 그룹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시어머니의 말처럼 우린 인연이 아닌 것이다. 아이 때문에 포기했다는 한강 그룹. 지금은 그 아이가 없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해인은 최대한 냉정해지려 했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제 욕심만 차릴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생각해 보면 부친의 회사를 지훈이 책임지는 지금의 상황도 이혼 전에는 그렇게나 피하고 싶었던 일 중 하나였었다. 자유롭고도 싶었지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이혼을 선택했었는데 어느새 아이 아빠라는 핑계로 제 욕심을 채우고 있었다. 아이를 잃고 혼자 남아 생각해 보니 다시 처음처럼 부담스러운 상황만 남아 있었다. 이런 마음으로 지훈과 행복할 것 같지가 않았고 그것은 지훈에게도 미안한 일이었다. 이번엔 실수 없이 헤어져야 했다.

16549620917367.jpg“아이 때문이었어요. 지훈 씨와 재결합하려고 했던 건. 그런데 지금은 아이가 없어요. 우리가 이혼할 때와 같은 상황이라고요. 그러니까 그냥 헤어져요. 그때처럼.”

해인은 아무런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말했다. 하지만 지훈은 믿을 수 없었다. 우리가 다시 만나서 함께 애틋했던 그 시간을 단순히 아이 때문이라고는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1654962091736.jpg“아니, 너도 날 좋아했어.”

지훈이 확신을 담아 말했다. 해인은 그 모든 것이 덧없다는 듯 웃었다.

16549620917367.jpg“그래요. 생각은 자유니까. 그러고 보니 집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네요. 여기 있다가 바로 절차 밟아서 유학 가면 되니까. 좀 미안하긴 해도 여기 있으면 마음이 편해요. 이모나, 이모 가족들 모두 한 가족처럼 잘해 줘서.”

지훈의 가슴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이건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는 아득한 결말이 머리를 스쳐 갔다. 만일 그렇다면 그녀를 다시 보기는 정말 힘들어질 것 같았다.

1654962091736.jpg“오늘 짐 정리해서 나갈게. 바로 나갈 거니까 일단 집으로 돌아와. 나가. 내가 나간다고.”

애원에 가까운 말을 내뱉으며 지훈은 비로소 이별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알 것 같았다. 어떤 식으로든 오늘은 해인을 이길 수 없다는 것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이를 잃은 아픔도 힘들었었다. 이렇게 해인까지 잃을 수는 없는 일이다.

16549620917367.jpg“그래요.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볼일 끝났다는 듯 해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16549620917367.jpg“잘 가요. 다시 보는 일 없었으면 해요.”

해인은 그것이 지훈과 지훈의 부모님에게 자신이 해야 할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지훈을 좋아하고 있지만 제 욕심만 채우는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1654962091736.jpg“지금 많이 힘든 거 알아. 기다릴게. 언제든 돌아와.”

16549620917367.jpg“그러지 말아요. 당신은 당신 인생 살아요. 나도 내 인생 살 거니까.”

1654962091736.jpg“아니, 내 삶에서 네가 없는 인생은 더 이상 없을 거야.”

힘주어 말한 지훈은 떠나는 해인을 보지 않았다. 잔인하게 버려졌지만, 지훈은 그것이 해인이 냉정해서라고 생각지 않았다. 너의 담담함 속에 감추어진 슬픔. 그 슬픔의 깊이를 헤아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리다. 너는 어디서 울고 있을까. 어디서 홀로 헤매고 있을까. 마지막 인사마저도 평온하게 내뱉었지만, 지훈은 알았다. 아이를 잃은 해인이 아주 많이 아프다는 것을. 여름으로 들어선 계절은 모든 것을 태울 듯이 타올랐다. 그 뜨거운 햇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정처 없이 걸었다. 두 번째 이별은 첫 번째 이별보다도 짧았다. 하나의 계절보다 짧았던 사랑이 이제 끝나려 함에도 지훈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별은 짧고 인생은 길 것이며 우리의 사랑은 더 길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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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도 야속한 시간은 흘렀다. 해인과 헤어진 지 일주일. 지훈은 일단 해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 어떤 연락도 취하지 않았다. 계획은 차근차근 진행 중이지만 그녀가 눈치챌 만한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참아내며 대신 상진을 붙잡고 외로움을 달래는 중이었다.

16549621000956.jpg“천천히 좀 마시세요. 오늘따라 왜 이러십니까.”

1654962091736.jpg“너도 마셔. 뭘 보고만 있냐.”

16549621000956.jpg“형님이 너무 급하게 마시니까.”

1654962091736.jpg“마셔도 취하질 않아서.”

16549621000956.jpg“그렇게 보고 싶으시면…….”

상진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형수님과 다시 헤어지신 후 눈동자가 초점을 잃어 버렸다. 겉모습만 멀쩡하지 속은 거의 폐인 급으로 무너졌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지금 추진하는 일을 보면 분명 다시 만나시려고 계획 중인 듯했다.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 중이니 아무리 보고 싶으셔도 지금은 참는 것이 분명했다. 하여간 치밀하고 절제력이 대단한 사람이다.

16549621000956.jpg“안주도 드세요. 여기.”

상진이 시뻘건 닭발 하나를 접시에 올려 주었다. 이 실내포차의 대표메뉴라 할 수 있었다. 지훈이 술을 마시자 제안했을 때 상진은 부러 이 포차를 추천했다. 오랜만에 아주 매운 것을 먹고 싶기도 했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상사와도 공유하고 싶었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 한순간이나마 행복해질 수도 있으니까.

1654962091736.jpg“뭐 이렇게 맵냐.”

16549621000956.jpg“맛있으시죠?”

1654962091736.jpg“맛은 있는데 너무 맵다.”

16549621000956.jpg“그 맛으로 먹는 겁니다.”

1654962091736.jpg“그래?”

1654962091736.jpg“나중에 우리 해인이도…….”

같이 먹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해인이 매운 것을 잘 먹는지도 모른다. 매운 것을 잘 못 먹어서 얼굴을 찡그리면 그것도 귀여울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 매 순간 너를 생각하고 있는데 너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달려가는 것이야 일도 아니지만, 우리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참고 있는 것을 너는 알기나 할까.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네가 그립다. 간절히 네가 보고 싶다. 언젠가 그날이 오면 그땐 절대 참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며 지훈은 젓가락으로 접시에 올려져 있는 큼지막한 닭발 하나를 집어 들었다.

16549621000956.jpg“형님. 천천히 드세요. 입에 있는 거는 삼키시고요.”

1654962091736.jpg“내가 먹으니까 아깝냐.”

16549621000956.jpg“아깝긴요. 꼭꼭 씹어 드세요.”

1654962091736.jpg“그런 건 애들한테나 하는 말이지.”

16549621000956.jpg“제 말이요. 오늘은 꼭 애 같아서 말입니다.”

상진은 유리잔에 물을 채워 슬그머니 지훈의 옆으로 밀어 주었다. 지훈이 기다렸다는 듯 단숨에 물을 들이켰다. 매운 것은 잘 못 먹네. 상진이 내린 결론이었다. * * * 두 달 후. 해인은 유학을 가지 않고 마케팅부의 정식 직원이 되었다. 디자인 공부를 더 하고 싶어 했지만 주 사장은 해인에게 경영을 맡길 생각이었다. 지훈이 M&A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는 말을 들은 해인은 회사를 일으켜 보라는 부친의 의사를 받아들였다. 경영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일단은 회사 일을 돕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에서 유학을 뒤로 미룬 것이다.

1654962102807.jpg“가자. 점심 먹으러.”

해인의 책상 파티션 너머로 고개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우영이었다. 해인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싶어 핸드폰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16549620917367.jpg“팀장님이랑 대리님은?”

1654962102807.jpg“업체 관계자들이랑 식사하고 들어오신다고 연락 왔어.”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내식당으로 내려갔다. 해인을 알아본 몇몇 직원들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대부분의 직원은 호의적으로 해인을 대했다. 난영과 세나가 얼마나 갑질을 했는지 사주의 딸답지 않게 겸손하고 조용한 해인에게는 오히려 득이 된 것이다. 식판에 음식을 받아들고 구석진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식사를 했다.

1654962102807.jpg“일은 어때? 할 만해?”

16549620917367.jpg“브랜드 관련한 PR 자료들을 더 봐야 할 것 같아. 시즌 이벤트 들어가려면 재고 파악도 해 봐야 할 것 같고.”

1654962102807.jpg“급하다. 급해. 아무리 경력자라도 너는 여기서는 신입이니까 천천히 배우면서 해.”

우영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해인에게 은근 일 중독적인 면이 있었다. 툭하면 야근에 벌써 물류창고에도 몇 번을 다녀왔는지 모른다.

1654962102807.jpg“나 커피 마실 거니까 카페에서 커피나 사서 올라와라. 어젠 내가 샀으니까 오늘 네가 산다고 했잖아.”

16549620917367.jpg“알았어. 먼저 올라가 있어.”

해인은 곧장 1층 카페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앞을 지나가다 닫히고 있는 문을 우연히 바라보았다. 검은 슈트를 입고 비스듬히 서 있는 남자를 얼핏 보았는데 체형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구두 쪽을 보다 고개를 들려는 순간 어느새 문이 닫혀버렸다. 별생각 없이 엘리베이터 앞을 지나갔다. 카페로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카푸치노를 주문해 사무실로 올라왔다. 커피를 마신 후 잠깐 화장실에 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는데 마침 공사 중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9층으로 올라갔다. 부사장실과 회의실이 있는 곳인데 현재는 부사장실이 공석이라 이용하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화장실을 사용하고 나오는데 검은 슈트를 입은 남자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올라올 사람이 없는데 누굴까. 아까 그 남자 같기도 하고. 다리만 살짝 보여서 누군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회의실을 다른 부서에서 쓰고 있나? 그러려니 생각하고 계단을 이용해 사무실로 돌아왔다. 손을 머리 위로 쭉 뻗어서 기지개도 켜보고 몸을 좌우로 흔들며 스트레칭도 했다. 그리고 카푸치노를 머금고 다시 일에 집중할 때였다.

16549621056539.jpg“우영 씨. 그 소식 들었어요?”

우영의 책상 앞으로 기획팀의 정민서라는 여직원이 가까이 와 있었다. 며칠 지켜보았는데 저 여직원은 우영과 격 없이 지내는 사이 같았다. 성격도 좋아 보이고.

1654962102807.jpg“무슨 소식이요?”

16549621056539.jpg“새로 부사장님이 오시는데 아주 젊은 분이라네요.”

1654962102807.jpg“젊어요?”

16549621056539.jpg“네. 아주 젊고 유능한 분이래요.”

젊고 유능해? 해인은 귀를 쫑긋 세우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어제 부친과 일에 관련한 통화를 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말 없었는데…….

1654962102807.jpg“어디서 들었어요?”

16549621056539.jpg“사장님이 우리 부장님께만 살짝 귀띔해 주셨는데 거의 뭐, 회사에서 날밤 새워 가며 일하는 스타일이래요. 그리고 비서도 필요 없다고 했다네요. 자기가 다 알아서 한다고.”

1654962102807.jpg“아랫사람들은 피곤해지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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