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그리워했다는 것을.2022.03.27.
비서도 없다고? 일정까지 혼자 관리하려면 힘들 텐데……. 누구일까. 해인은 귀를 쫑긋 세우고 민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출근은 내일부터 하시는데 부사장 취임식도 하지 않으시고 각 부서별 면담부터 한다네요. 사원들 일하는 것 하나하나 일일이 챙기시는 분이신가 봐요.”
우영이 손에 쥐고 있던 볼펜을 팽그르르 돌렸다. 그러든지 말든지. 우영은 금세 흥미를 잃고 대충 머리만 끄덕였다. 민서는 그런 우영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더니 점심시간 끝났다며 인사를 하고 나갔다. 잠시 눈이 마주친 해인과도 손 인사를 잊지 않았다. 하루가 바쁘게 지나가고 퇴근 후 부서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혼자 있는 것이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아직은 허전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집을 팔고 이사를 할까 생각도 했으나 그럴수록 집에 대한 애착만 커져 갔다. 그 애착의 정체에 대해서 해인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지훈과 연관되는 모든 것들을 기억에서 지우려는 듯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버텨갔다. 지훈에게도 별다른 연락은 없었다. 그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를 하는 듯했다. 이별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지만 지훈 역시나 이젠 그것이 현실임을 알았을 것이라 해인은 속단했다. 아마도 잘 지내고 있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긴 했지만 냉철한 사람이니 길게 아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해인은 자괴감인지 위로인지 모를 생각을 하며 잠자리에 누웠다. 그와 함께 누웠던 시간은 아주 짧았음에도 여전히 제 몸은 그의 따스했던 체온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아픈 밤이었다. * * *
“당신 정말 해인이한테 회사 물려줄 생각이에요?”
“일단 지켜보는 거잖아.”
밤늦게 들어온 주 사장을 붙잡고 난영은 그동안 참고 있었던 감정을 폭발시켰다. 갑질이 언론에 터지며 이사직에서도 물러나고 회사에도 가지 못한 지가 벌써 한참이었다. 잠잠해지면 돌아오라 할 줄 알았더니 남편은 오히려 해인을 회사에 불러 눌러 앉혔다. 이러다 정말 해인에게 회사를 물려주기라도 하면 세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자신이 아무리 세나를 밀어준다 한들 갖고 있는 주식으로는 턱도 없었다. 친정의 도움으로 회사가 이만큼 성장했는데 이제 와서 닭 쫓던 개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말도 안 돼요. 이 회사는 당연히 세나 거예요. 회사 일으킬 때 우리 집안 돈이 얼마나 들어갔는데, 당신이 나한테 이러면 안 되죠.”
“알아. 안다고. 세나가 그릇이 되면 당연히 세나에게 주겠지.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지금은 몸을 사리고 조심해야 할 때잖아. 세나가 아직 어리니까 기회는 있어. 그러니까 기다려 봐.”
“맡겨 주면 잘할 거예요. 내가 도울 것이고. 그러니까 세나한테 회사 물려줘요.”
“거참. 세나 아직 학교 졸업도 안 했어. 그리고 세나도 내 딸이야. 나도 다 생각이 있다고.”
“언제까지 생각만 하고 있을 거냐고요.”
난영은 막무가내였다. 석현은 아내가 이럴 때마다 온몸의 기가 다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결국, 귀찮다는 듯 입을 다물어 버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난영의 히스테리를 더할 뿐이었다.
“이럴 거면 친정아버지 살아 계실 때 지분 확보 좀 더 해놓을 걸 그랬어요. 정말 당신이 이럴 줄은 몰랐어요.”
“그만하지 못해? 내가 다 생각이 있다잖아!”
급기야 주 사장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움찔한 난영이 남편을 향해 눈을 흘겼지만 입은 꾸욱 다물었다. 주 사장은 짜증스럽게 헛기침을 하고는 이내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난영은 그가 들어간 안방 문을 신경질적으로 바라보고는 손톱으로 소파를 긁기 시작했다. 해인을 결혼시킬 때만 해도 나름 안심을 했었다. 해인이 좋은 곳으로 시집을 가서 시샘이 나긴 했지만, 세나의 앞길엔 그게 더 좋을 것 같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해인이 이혼을 하고 나서는 남편의 생각도 바뀐 듯했다. 이렇게 가만 앉아서 해인에게 모든 것을 다 빼앗길 수는 없었다. 세나의 이미지가 안 좋다고? 그럼 해인이 이미지도 한번 시궁창으로 만들어 볼까? 비릿하게 웃은 난영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추켜올려졌다. 자신이 그랬듯 사람 이미지야 한순간에도 추락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안형준이란 놈은 그 좋은 먹잇감을 물어다 줬는데 여태 뭘 하고 있는 걸까. 전화라도 해 볼까 싶어 핸드폰을 들던 그녀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이내 다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전적으로 아군인 것도 아닌데 이렇게 한 배를 타도 되나 싶었지만, 지금은 형준을 이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 * * 아침부터 일거리가 쏟아졌다. 해인은 브랜드 이미지 관련 자료들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다른 부서에 다녀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사무실로 향하는데 큰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싸우는 소리 같은데……. 서둘러 사무실로 들어가 보니 상기된 모습의 승윤과 낯익은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설마 한 차장인가?
“내가 아니라 우리 부장님께서 방향을 그렇게 잡았다고 나는 전달만 해준 것뿐인데 왜 화를 내시는 거예요?”
“한 차장 입김이라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사사건건 우리 마케팅팀 하는 일에 시비 걸고 안 좋은 소리 하는 거 다 알고 있거든.”
“어머. 내가 무슨 소리를 했다고 그러세요? 증거 있어요?”
해인의 생각대로 등을 보이고 승윤과 언성을 높이고 있는 여자는 한 차장이었다. 기획부에서 회의가 있었고 그 와중에 아직 결정도 되지 않은 일을 넌지시 와서 일러주는데 그것이 승윤을 열 받게 한 것이었다.
“증인은 차고 넘치지.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기획팀에서 일괄적으로 마케팅부의 예산을 조정한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아직 디자인실에서 월별 브랜드 론칭 계획이나 원가 책정도 제대로 안 했는데 왜 벌써부터 기획팀에서 이래라저래라하는 거냐고.”
“마케팅팀이 제대로 일도 못 하고 돈이나 축내는 부서가 되었으니 하는 말이겠죠. 마케터들이 일이나 제대로 하냐고요.”
한 차장도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수위를 높인 발언에 한쪽 구석에서 듣고 있던 우영과 심 대리의 표정도 급격히 굳어졌다. 아무리 그렇다고 돈이나 축내는 부서라는 말을 하다니……. 차장이고 뭐고 확 엎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없었기에 심 대리는 승윤만 쳐다보았다.
“돈이나 축내는 부서라니, 한승미 차장, 말 그렇게 함부로 할 거야?”
승윤은 웬만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는 것은 엄청 화가 났다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 차장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험상궂게 변해갔다. 그 매서운 모습에 기세등등하던 한 차장도 잠시 얼어붙었다.
“온·오프라인 매장별 실적표는 똑바로 보고 말하는 거냐고. 예산을 얼마나 가져갈지 어떤 브랜드를 더 확장할지는 우리가 정할 거니까 기획팀에서는 그렇게 알아. 우리 일해야 하니까 그만 나가 주지. 한 차장.”
“가지 말라고 해도 갈 거예요.”
팩 토라진 한 차장이 바람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 돌아선 그녀와 문 앞에 어색하게 서 있는 해인이 서로 마주했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이 분란을 만든 이유가 어쩌면 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해인은 생각했다. 부장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저렇게 자기 할 말을 다 할 수 있다니 확실히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녀의 비뚜름한 시선이 냉랭한 해인의 눈동자에 꽂혀왔다. 해인이 피하지 않고 바라보자 한 차장이 먼저 시선을 피하며 문 쪽으로 걸었다.
“괜히 길을 막고 난리야.”
분명 해인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길을 막은 게 아니라 놀라서 서 있었을 뿐이었다. 부러 시비를 거니 곱게 보내 주기 싫었다.
“길 막은 적 없습니다.”
해인도 할 말을 했다. 그 말이 예상 밖이었는지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잠시 멈추었다.
“어머. 자기가 뭐나 되는 줄 아나 봐.”
“그런 적 없고요.”
해인이 끝까지 말을 받아치자 한 차장은 더 이상 군소리 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또각또각. 한 차장의 구둣발 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사무실엔 적막감이 흘렀다. 해인은 이 모든 일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아 괜히 팀원들에게 미안했다.
“기가 막혀서. 저 여자 진짜 똥오줌도 못 가리는 거 아녜요? 왜 저렇게 막 나가?”
심 대리가 손부채질을 하며 언성을 높였다. 아무리 곱게 봐주고 싶어도 남의 부서까지 와서 저런 말을 하는 건 상당히 무례한 처사였다.
“자기들이 예산 책정해 주는 대로 쓰라는 게 말이 되냐고. 내년에야말로 마케팅에 사활을 걸어야 할 때인데…….”
승윤이 분을 삭이며 두 손으로 책상을 짚었다.
“말이 그렇지, 우리가 알아서 제시하면 어쩔 수 없을 거예요.”
심 대리가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승윤을 달랬으나 그는 여전히 울분이 가시지 않는 표정이었다. 가을이면 다음 해에 있을 예산 기획을 하기 시작한다. 이제 겨우 시작이고 아직 구체적으로 완료되지도 않은 시점인데 이래라저래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의견 차이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회사를 위해 하는 일이니 피차 협력해서 결정할 일이었다.
“해인 씨. 디자인실 가서 품평회 끝났는지 보고 올래요? 선별한 상품 샘플 있는지도 알아보고 와요.”
“알겠습니다. 팀장님.”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해인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디자인실이 5층이니 계단으로 내려갈까 하다 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왔으니 일단 타고 보자 싶어 서둘러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해인은 눈앞의 남자를 보고 그 자리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사이 멈춰 있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해인은 감전이라도 된 사람 마냥 멍하니 닫히는 문 너머의 남자를 응시했다. 윤지훈. 차마 그 사람 일리가 없다고 부인해 보았지만, 그는 분명 윤지훈이었다. 그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닫히던 문은 닫힘과 동시에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고 버튼을 누르고 있는 지훈의 모습이 보였다.
“타려던 거 아니었어?”
늘 만났던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물어오는 말. 그 짧은 순간 해인은 머리가 하얗게 되는 것만 같았다. 그가 왜 여기 있을까, 라는 단순한 의문만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정작 엘리베이터는 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지훈이 버튼을 누르지 않은 다른 손으로 해인의 팔을 잡아 엘리베이터 안으로 이끌었다. 이어 문이 닫혔고 엘리베이터라는 좁은 공간에 지훈과 해인 둘만 있게 되었다. 지훈은 해인을 잡은 팔을 느슨하게 하면서도 놓지는 않았다. 그리움이 짙어 잠시간 그녀의 체온으로나마 위안을 삼았다. 놓으라고 하면 놓을 텐데 해인은 여기서 자신을 만난 것에 놀란 것인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엘리베이터에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
“왜 여기 있냐고 안 물어봐?”
또다시 들려오는 다정한 물음. 해인은 무심히 정면만 보았다. 고개를 돌리면 그와 눈동자가 마주할 것이다. 이 남자 앞에 있으면 늘 가슴이 떨렸었다. 이젠 그 설렘마저도 낯설어졌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미처 묻어 버리지 못했던 그리움 역시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눈을 마주한다면, 그래서 이 남자의 깊고 검은 눈동자를 바라본다면 아마 감추지 못할지도 모른다. 내가 이 남자를 그리워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