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유일한 사랑.2022.03.31.
감정이 흐려졌다 한들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흐려졌다는 것도 어쩌면 자기방어를 위한 암시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해인은 자기방어 본능을 극대로 끌어올리며 담담히 되물었다.
“어떻게 있는 건데요?”
“취직했어. 이 회사에.”
“혹시 이번에 새로 온…….”
“그래. 부사장.”
지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엘리베이터는 9층에서 멈췄다. 올라가고 있었구나. 해인은 그제야 자신이 엘리베이터를 잘못 탔음을 깨달았다. 지훈은 굳이 더 머물지 않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다음에 또 보자.”
그의 쿨한 인사와 함께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지훈이 가지 않고 문 앞에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해인은 문이 닫힐 때까지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홀로 남은 해인이 5층 버튼을 누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체 어쩌자고 여기를 온 것일까. 설마……. 자신을 잊지 못해서라는 생각을 하다 해인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냉철하고 타인에 대해선 무심하고 심지어 무감하기까지 할 만큼 일만을 사랑했던 남자가 굳이 헤어진 전 부인을 찾아서 여기까지 왔다고? 아니, 윤지훈은 절대 그런 남자가 아니다. 무엇보다 이별을 말한 그 순간부터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가 자신을 잊지 못해 여기 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디자인실로 향하던 해인은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좌측에 있는 휴게실에서 들려오는 소리 때문이었다.
“그거 들었어? 새로 오신 부사장님이 사장님 딸 전남편이라던데?”
“나도 들었어. 좀 웃기지 않아?”
“그러니까. 이혼했다던데 집안끼리는 사이가 좋은가 봐?”
“그게 아니라 부사장이 우리 회사를 꿀꺽하러 왔단 소리도 있어.”
“그게 말이 돼? 그럼 사장님이 처음부터 불러오지를 않았겠지.”
“사장님 입장에선 애물단지인 회사 팔아 버리고 노후 대비하시는 것일 수도 있잖아.
“쉿. 저기.”
해인은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대화를 듣고 있었다. 자기들끼리 눈치를 보는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부러 휴게실을 바라보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저런 말을 하는 것을 그들만의 탓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주 딸의 전남편이 부사장으로 왔으니 당연히 이유가 궁금할 것이고 회사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될 것이다. 그때부터 해인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희뿌연 안개가 낀 것 마냥 무슨 말을 들어도 무슨 생각을 해도 그저 멍할 뿐이었다. 디자인실을 다녀온 후 마케팅팀은 곧바로 회의에 들어갔다. 내년에는 어떤 모델이 적합할지 매출 목표와 예산은 어느 선에서 정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심은진 대리는 숙녀복의 전면에 차라리 지오를 세우자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물 들어왔을 때 노를 저어야 한다니까요? 어떻게든 지오를 이용해 우리 브랜드를 광고해야 합니다.”
“지오는 남자입니다. 숙녀복 모델이라니요.”
우영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죠. 남자에게 여성복을 어필하게 하라, 나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여자 모델이 입고 있는 옷을 바라보는 지오의 표정, 그 황홀경을 카메라에 잘 담아 넣기만 하면 충분히 구매력을 높일 수 있을 겁니다. 잘나가는 남자는 여자친구의 옷으로 엘브를 선택한다, 저는 좋은 것 같은데요?”
“예산 문제는 어떻게 하고. 지오의 단가를 우리가 맞출 수 있을까? 그리고 지난번 그 일은 일회성 이벤트였을 수도 있어. 우리가 원한다고 지오가 오는 것은 아니라고.”
승윤이 현실적인 문제를 제시했다.
“맞아요. 예산은 불가능할 겁니다. 지금도 기획팀에서 저 난린데. 그냥 올해 하고 있었던 여배우로 주욱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처음부터 지오를 반대했던 우영이 승윤의 편을 들고 나섰다. 결국, 예산이란 말에 심 대리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해인 씨는 어떻게 생각해?”
“아, 저는…….”
사실 해인은 회의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깊이 생각한 것이 없었기에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 줄 수는 없었다. 공평하게 가자.
“좋은 것 같기는 한데, 아무래도 예산이 걸림돌이 될 것 같기는 해요.”
“그렇죠? 해인 씨도 좋기는 한 거죠? 거봐요. 지오가 답이라니까요.”
지오가 답이라는 말은 안 했는데……. 해인은 머쓱했지만 혼자 고군분투하는 심 대리를 외롭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그날 이후 지오는 어디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최고의 아이돌 스타답게 철저히 자신을 감추었다. 일부 팬들 사이에서는 사진에 함께 찍혔던 마네킹이 있는 공간까지 화제가 되었다. 지오의 집 어느 방일 거라는 의견부터 친척 집일 수도 있고 심지어 호텔일 수도 있겠다는 것까지 추측이 다양했다. 지오는 화두만 던져놓고 그렇게 사라졌다. 물론 해인에게도 사적인 연락이 온 적은 없었기에 그날의 일은 그냥 해프닝으로 남겨 두었다. 회의가 끝나고 해인은 계단을 이용해 곧장 사장실로 올라갔다. 딸이 들어오는 것을 본 주 사장은 하던 일도 멈추고 기다렸다는 듯 소파의 상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앉아라.”
자리에 앉은 해인이 다짜고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뭐가?”
“지훈 씨가 어떻게 부사장으로 온 거냐고요.”
주 사장이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히 대꾸했다.
“내가 와 달라고 했어. 능력 있잖아. 네 남편.”
“제 남편이라뇨?”
“윤 서방은 너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 같더구나. 아이 잃었다고 대뜸 그렇게 돌아서니까 상처도 받은 것 같고. 그래서 이래저래 불렀어.”
“저하고 미리 상의라도 했어야죠.”
“윤 서방이 말하지 말라고 했어. 네가 싫어할 거라고.”
해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부친이 원한 일인지, 아니면 지훈이 먼저 계획한 일인지는 모를 일이다. 지훈이 굳이 신온을 두고 여기에서 일할 이유가 없다. 상처는 받았겠지만,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이곳으로 온다니. 해인으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요. 사원들이 받을 충격은 생각 안 하세요?”
“충격은 무슨. 윤 서방이 와서 잘되면 회사도 좋은 거지. 지금껏 윤 서방이 투자 안 했으면 우리 회사 진즉에 끝장났어. 그러니까 너도 그만 윤 서방과 다시 잘 지낼 생각을 해.”
그때였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주 사장의 들어오라는 말과 함께 문이 열리자 비서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검은 슈트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지훈이었다.
“사장님. 부사장님 오셨습니다.”
비서는 지훈을 안내하고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그를 다시 보는 해인의 눈동자에 만감이 교차했다. 잠시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던 지훈이 주 사장을 향해 말했다.
“업무 전반에 관해 상의드려야 할 것이 있어서…….”
“그건 내가 박 비서 통해서 정리하라고 할 거니까 일단 여기 앉게. 오늘은 예 앉아서 푹 쉬고 준비나 해. 나는 지금 일정이 있어서 나가 봐야 하니까. 우리 해인이가 여러모로 궁금한 것이 많은 것 같은데 자네가 이야기 좀 해 줘.”
그 말과 함께 주 사장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옷걸이에 걸어둔 슈트를 챙겨 입고 서둘러 밖으로 나가 버렸다. 주 사장이 나가고 지훈은 잠시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그로서도 이 상황은 예측지 못했다는 듯. 어정쩡하니 서 있던 지훈이 일단은 해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너지고 상처받았던 마음들이 조각조각 자리 잡은 가슴은 서럽다 못해 시렸다. 해인을 봤음에도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이 슬프고 마주 웃을 수 없다는 것이 괴로울 뿐이었다.
“아까는 많이 놀랐지?”
“네. 많이 놀랐네요.”
“미안.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는 여자. 생략된 말이 있었지만, 지훈은 굳이 되묻지 않았다. 물으면 지금이라도 떠나라고, 돌아가라고 대뜸 말할 것 같아서. 해인이 다가오지 못하면 자신이 다가가면 되는 것이다. 돌아가라 하면 돌아오라 맞서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여기까지 온 이유니까. 그래서 지훈은 단호한 거부를 택했다.
“그럴 생각 없는데?”
“그러지 말아요. 지훈 씨. 이혼한 부부가 같은 회사에 있다는 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아요. 보는 눈도 많은데.”
“난 누가 어떻게 보든 신경 안 써.”
“지훈 씨야 그렇겠죠. 하지만 난 아니에요.”
해인은 지훈과 자신은 처한 상황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금수저로 태어나 굳이 다른 사람의 눈치라는 것을 볼 이유가 없었던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이미 출발점부터 다르지 않은가. 물론 그것이 지훈의 장점이라면 장점일 것이고 제게는 심각한 약점이었다.
“내가 작은 결심으로 여기 왔을 것 같아?”
지훈의 입에서 어느 때 보다 단단하고 우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마인드 컨트롤, 포커페이스. 그 모든 것에 자신이 있었다. 너로 인해 무너지기 전까지는. 지금 당장이라도 안고 싶은 마음을 내리누르며 버티고 있는 이 순간이 얼마나 힘든지 조금이라도 안다면 저런 말은 못 하겠지. 그래. 그녀는 모르는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떤 결심으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체 여기서 뭘 하려는 건데요?”
“일해야지. 회사 잘 살려 보려고. 잘 일으켜서 해인이 너 주려고.”
순간 해인은 멍해졌다. 인수합병도 아니고 준다고? 지훈이 왜? 무슨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말을 참 쉽게 하네요.”
“내 말의 무엇이 그렇게 쉬울까.”
“…….”
“쉬운 건 너였지. 이혼도 이별도, 참 쉬웠어. 근데 말이야. 나는 왜 그게 쉬운 척하는 것으로 보였을까.”
지훈의 눈빛이 어느새 깊어졌다. 그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는 해인은 정곡을 찔린 듯 당황스러웠지만 애써 외면했다.
“지난 일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데…….”
“아니, 난 해야겠어. 우리의 지난 일이 내가 여기 있는 이유와 하나도 무관하지 않으니까. 네가 정말 이혼도, 이별도 쉽게 하는 여자라고 생각했다면…….”
“…….”
“아마 난 지금 여기 없겠지.”
해인은 왠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한없이 담담한 음성인데 자신을 보는 그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만 같다. 저 눈은 왜 저렇게 슬퍼 보일까. 이유를 아는 것이 두려워질 만큼. 흔들리지 말고 최대한 냉정해야 했다. 힘겹게 그를 떠나보낸 건 그가 마음껏 능력을 펼치며 승승장구하기를 바랐던 마음이 컸었다. 고작 이런 곳으로 와서 자기 커리어를 망치는 것은 지훈에게도 독이 되는 일일 것이다. 돌이켜 보면 지훈과 함께했던 시간들은 무척이나 행복하고 달콤했었다. 그래서 두 번째 이별은 이혼보다 훨씬 더 힘들었었다. 다시 그 괴로운 시간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일하러 왔다고 했죠. 그럼 그런 것으로 알게요.”
“일하러 왔어. 일도 하고, 주해인 이라는 여자도 다시 찾을 거야.”
“찾는다니요?”
“너랑 못 헤어진다고.”
묵직하게 내뱉었지만, 말끝은 위태롭게 흔들렸다. 가슴 한구석에 묻어두었던 일을 기어이 헤집어버리는 남자. 처음도 힘들었고 두 번째도 힘들었던 그 일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 연락도 없었던 그 시간을 견디며 괜찮아지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러나 재회한 지 몇 시간도 안 되어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는 제 모습이 한스러웠다. 해인은 가까스로 마음을 추슬렀다.
“그때 끝난 이야기로 아는데요?”
“끝나긴. 기억 안 나? 내가 무슨 말 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수가 없다.
‘내 삶에서 네가 없는 인생은 더 이상 없을 거야.’
하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순 없었다. 아니, 헤어져야 할 이유가 분명했기에 그저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고 싶었다.
“내가 무슨 말 했는지는 기억나세요?”
“기억나. 아주 선명하게.”
“그런데 지금 이러시는 이유는요?”
냉정히 돌아온 질문에 지훈은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엘브에 입사하기 전에 각오했던 반응이었다. 그녀는 당연히 냉정할 것이고 얼마나 될지 모르는 긴 시간을 홀로 외로울 것이라 예상했지만 역시나 현실은 잔혹했다.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 줄게. 이별만 빼고.”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 경험은 두 번으로 족했다. 아프고 고통스럽고 또 외로워서 스스로를 지켜내기도 버거웠던 그 시간들. 물론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만 이렇게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는 것 같은 상처들. 마음 곳곳이 아프다 아우성쳤지만, 그립고 애타는 마음이 그녀를 이토록 반기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너와 함께 했던 시간들만 생각났어. 네가 없던 인생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오직 너만 남아 있어. 내 기억엔.”
“…….”
“그래서 그냥 가 보려고. 내가 선택한 유일한 사랑이니까.”
이혼 요구조차도 무감하게 받아들였던 전 남편은 두 번째 이별을 겪고 난 뒤 낯선 남자가 되어 나타났다. 그 낯섦에도 가슴은 이미 그를 알고 있다는 듯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