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 자만은 무너지고 깨지기 마련이다. (32/92)


36. 자만은 무너지고 깨지기 마련이다.
2022.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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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늘 어렵다.

안타깝지만 그래서 미련이라는 감정이 자라고 결국 미로처럼 헤매게 되는 것이겠지.

헤어짐과 함께 다시 오지 않았던 연락에 안심했었다.

워낙에 칼 같은 사람이었으니 저를 향한 미련에서 빠르게 벗어난 것이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나 보다.

그런 지훈을 보아야 하는 해인의 마음도 아렸다.

그렇다고 함께 과거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해인은 미련 없어 보이길 바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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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 말은 못 들은 거로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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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 텐데…….”

지훈은 일어나지도, 그렇다고 고개를 들어 해인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고개를 드는 대신 몸을 소파 뒤로 기대고는 다리를 외로 꼬았다.

아주 느긋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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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수시로 일깨워 줄 거야. 우리가 서로 사랑했다는 것을.”

느긋했지만 진심을 무겁게 담은 말이 해인의 가슴을 헤집었다. 사랑했던 기억들은 이미 침범당하며 일깨워지고 있었다. 감추고 지워야 했던, 또한 버려야 했던 사랑을 해인은 끝내 버리지 못한 것이다.

해인은 또다시 마주한 사랑이 고통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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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만나서 당황스러울 거 알아. 사실 보자마자 안고 싶었지만, 그래서 참는 거야. 내가 얼마나 참아낼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어. 어쩌면 내일부터는 대놓고 유혹할지도 몰라. 사실 그러고 싶고.”

유혹, 이라는 한마디에 해인은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런 도발적인 말을 신중하고 친절하게 내뱉는 지훈은 여전히 평온해 보였다.

차라리 대놓고 유혹이라도 한다면 오히려 더 쉽게 거부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차분하고 담담한 그의 모습을 보니 그가 어떤 각오로 여기 왔는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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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이미 끝난 사이고, 난 지난 일을 돌이키고 싶진 않아요. 지훈 씨가 말의 의도를 알아듣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네요.”

지훈이 그랬듯 해인도 담담히 말하며 밖으로 나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장실을 벗어났지만, 그때부터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일하다 말고 1층으로 내려가 커피를 사서 건물 뒤편에 있는 화단으로 향했다. 청명하게 맑은 가을 하늘을 보고 있노라니 괜히 울컥했다.

하늘은 저렇게나 맑은데 저는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마음을 잡고 일이나 해야겠다 싶어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문밖에서 기다리는 우영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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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괜찮아?”

물어보는 목소리에 걱정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지훈이 부사장으로 왔다는 소문을 들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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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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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만난 거야?”

대답 대신 머리만 끄덕였다. 우영은 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해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알기에 남 일 같지가 않았다. 해인이 임신을 했고 유산을 했다는 것은 가까운 지인들 외에는 모르는 일이었다.

해인은 해인대로 우영은 우영대로 머리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살얼음판이라도 될 것 같았던 며칠이 의외로 조용히 지나갔다.

지훈은 예상과 달리 있는 듯 없는 듯 일만 했고 혹여 우연히 해인을 보더라도 모른 척 그냥 지나쳤다.

소문들은 다시 잠잠해졌고 해인은 평이한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이것도 작전인가.

심지어 해인은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언제든 유혹을 할 것처럼 말했던 사람이 너무 느긋해 보여 오히려 다른 꿍꿍이라도 있는 듯 여겨졌다.

지훈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해인은 이미 매 순간 지훈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 * *

지훈은 매일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기분이었다.

언제든 볼 수 있는 해인이 한 건물에 있음에도 마음대로 볼 수도 없다. 혹시나 해인이 회사에서 불편하지 않을까 염려한 까닭이었다.

이제 막 회사 생활에 적응하고 있을 텐데 혼란을 줘서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계속 지켜보기만 할 것도 아니었다. 인내심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이제는 점점 그 한계치가 목전에 왔음을 지훈은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지훈은 어느새 마케팅팀의 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보았다. 한숨을 푹 내쉬는 그 순간 열린 문 너머로 말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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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인 씨, 어디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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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실적 부진한 매장 둘러본다고 나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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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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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우영 씨는 회의에 갔고 저도 바빠서요. 그나저나 해인 씨 차도 없는데 진짜 고생이에요. 나중에 우영 씨랑 같이 가도 되는데 오늘 꼭 가서 이유가 뭔지 확인하고 오겠다네요. 아까 보니까 유독 몸도 피곤한 것 같던데…….”

몸이 피곤하다고?

지훈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이야기를 나누던 승윤과 은진은 갑자기 나타난 지훈으로 인해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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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부사장님. 오셨습니까.”

승윤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간단히 목례로 답한 지훈이 해인의 행선지를 알고 있는 은진을 향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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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가 어디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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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 대리에게 점포의 위치를 들은 지훈이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차를 한 대 사 줘야 하나. 면허도 있으면서 그 많은 돈으로 여태 차도 안 사고 뭐 했을까.

신호대기를 하고 선 지훈은 초조하게 운전대를 어루만졌다. 시선은 한 점포와 신호등을 번갈아 향하고 있다. 설마 벌써 끝나고 가진 않았겠지 생각하는 그 순간 점포의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밖으로 나왔다.

해인이었다.

때마침 신호등도 초록 불로 바뀌었다.

지훈은 잽싸게 액셀을 밟아 순식간에 점포 앞에 차를 정차시켰다. 택시를 잡으려고 도로 쪽으로 나오던 해인이 깜짝 놀라 멈춰 서는 것이 보였다. 지훈이 창문을 내려 해인을 향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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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저 남자가 왜 여기 있을까.

멍해진 해인은 차를 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애먼 눈동자만 굴렸다.

다급해진 지훈이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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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타! 여기 주정차 금지구역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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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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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가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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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지나가세요. 나는 택시 타면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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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가는 길이니까 같이 타고 가. 다른 뜻은 없어.”

다른 뜻이 없을 리가 없다.

보고 싶고, 혹시나 피곤한 해인이 힘들지는 않을까 염려되고, 편안하게 해 주고 싶고, 오는 길만이라도 한숨 잠자게 해 주고 싶고.

그렇다 한들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니 그저 묻어둘 뿐이다.

해인은 여러모로 당황스러웠다.

지훈의 차를 타자니 그와 단둘이라는 것이 부담이 되었다. 그렇다고 차가 다니는 도로 옆에서 계속 이러고 있을 수도 없고.

결국, 해인은 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지훈은 마치 큰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뿌듯한 마음으로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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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어떻게 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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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미팅 끝나고 가는 길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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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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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거짓말을 들키기라도 할까, 지훈은 정면만 보고 말했다. 어차피 심 대리를 만나면 알게 될 일이겠지만 제 입으로 말하기는 싫었다.

해인이 미심쩍어하는 분위기를 느꼈기에 지훈은 부러 다른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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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 다녀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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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유독 판매실적이 부진해서 와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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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럼, 여기서 업무 보고 한번 해 보세요. 주해인 씨.”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해인의 고개가 지훈에게로 향했다. 별일 아닌 듯 운전을 하는 그의 얼굴에 미소 같은 건 없었다.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부담스러웠지만 업무를 말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숨소리만 이어지는 것도 지금의 상황에선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다.

단둘이 차 안에 있으니 자꾸만 예전에 함께 했던 순간들이 그리움처럼 스쳐 갔다.

이럴 바엔 차라리 업무 이야기가 나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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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의 디스플레이가 엉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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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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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 내부는 다른 곳보다 작은데 행거는 고객들의 동선을 불편하게 할 만큼 많이 있었어요. 리오더 되는 상품들 중심으로 디스플레이를 했고 실적이 저조한 상품들은 과감히 창고행 시키라고 조언 드리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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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했어요. 주해인 씨.”

지훈의 칭찬을 들은 해인은 기분이 묘했다.

어린아이가 받아쓰기 백 점 맞았을 때 듣는 그런 칭찬으로 들리기도 했다.

실상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는 더 두고 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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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다음 달 판매량을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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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 씨 충고대로 한다면 분명히 좋아질 겁니다.”

지훈이 확신에 차 말했다. 공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까부터 자꾸 사심을 가득 담은 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남자는 유혹을 이런 식으로 하나.

이렇게 자연스럽게 접근해서 공적인 이야기를 하듯 대화를 이끌어내 사심을 채우거나 전달하는 뭐 그런 작전인가.

아님, 혼자 너무 멀리 갔나.

보통은 이런 상황이면 안전벨트를 채워 주며 은근슬쩍 스킨쉽을 시도하기 마련이다.

해인이 아는 유혹은 그런 종류였다.

그런데 이 남자는 꽤나 신사적이었다. 해인은 긴장했던 게 무색해 괜스레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 이후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운전만 했다.

뻔한 수작을 걸지 않으니 오히려 뭔가 이상했다. 정말 무슨 치밀한 작전이라도 세우고 저러는 것인지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다행스럽게도 멀리 회사 건물이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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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까지 가지 마시고 저 앞에서 내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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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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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저기 즈음이면 괜찮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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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지훈은 순순히 해인의 말을 들었다.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심 대리의 말대로 해인이 피곤해하는 것 같아 말도 많이 시키지 않았다.

마음이야 사랑에 미친 놈처럼 들이대고 싶지만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목전에 와 있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지훈은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을 것이라 자만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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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만은 무너지고 깨지기 마련이다.

차 안에서 해인과 함께했던 기억이 밤새 지훈을 괴롭힌 탓에 오히려 더한 갈증에 시달려야 했다.

다음 날, 출근을 해서 책상 위에 앉았지만, 도무지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손이라도 한번 잡아 볼 것을 그랬나. 아니, 보고 싶었던 얼굴이라도 뚫어져라 쳐다보기라도 할 것을 그랬다. 그도 아니면 은근슬쩍 안전벨트라도 채워 줄 것을 그랬다.

이런 바보 같은 놈을 봤나. 그게 제일 쉬운, 티 안 나는 유혹이었을 텐데…….

후회가 클수록 해인에 대한 갈증이 더 밀려들었다. 하루의 일정이 모두 마무리될 무렵, 지훈은 괜스레 이승윤 팀장을 불러올렸다.

영문도 모르고 부사장실로 온 승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꾸벅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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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셨습니까. 부사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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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요. 들어 보니 예산 문제로 기획팀과 마찰이 있었다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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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게…….”

승윤은 원군이라도 만난 듯 지훈에게 예산에 대한 문제를 토로했다.

지훈에게 그 일은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보다는 해인이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더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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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팀장님 말대로 어느 때 보다 마케팅이 중요한 시기이니 예산은 문제없이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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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부사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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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인 씨는 업무에 잘 적응하고 있는지요.”

혹시나 승윤에게서 또 다른 말이 나올까 지훈은 단도직입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어차피 밀어붙일 사랑이니 직원들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는 없었다.

사실, 승윤을 아군으로 만드는 것도 중요한 일 중의 하나였다.

갑자기 해인에 대한 질문을 들은 승윤은 곧바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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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도로 묻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눈치로 짐작하기엔 긍정적인 신호였다.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한 탓인지 덧붙여야 할 말도 곧장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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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잘하긴 하는데, 너무 몸을 사리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분명 피곤해서 곧 쓰러질 것 같은데 야근한다고 남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거의 퇴근 시간이 됐는데 재고 물량 제대로 확인한다고 지하에 있는 재고창고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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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고 물량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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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정리된 자료에는 분명히 재고 없음으로 뜨는데 자기는 분명 창고에서 그 옷을 본 것 같다고, 그런 것이 한두 개가 아니라고 하면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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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지금 재고창고에 있다는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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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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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이만 내려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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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선 승윤이 부사장실을 나섰다.

그는 오늘 이 자리가 결코 예산 때문이 아님을 알았으나 입가엔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 * *

승윤이 나가자마자 지하창고로 내려온 지훈은 즉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불은 켜져 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지훈이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갔다. 여러 개의 진열장이 빼곡히 들이차 있고 그 안에는 빈 곳이 없을 만큼 박스가 들어 있었다.

박스 마다 내용물이 적혀 있긴 했으나 무슨 암호처럼 되어 있어 지훈은 봐도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진열장의 사이사이를 둘러보았지만, 해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맨 뒤쪽까지 갔을 때였다.

해인이 박스를 쌓아놓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세히 보니 고개가 살짝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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