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왜 이렇게 떨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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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왜 이렇게 떨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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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왜 이렇게 떨리는 걸까.
2022.04.07.
설마, 여기서 졸고 있는 거야?
그 순간 지훈은 해인이 많이 피곤해 보였다는 승윤의 말이 떠올랐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여기서 이러고 있을까. 지훈이 애틋한 눈으로 해인을 바라보았다.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조심스럽게 옆으로 다가가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어깨를 들이밀어 주었다. 제 어깨와 해인의 머리가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졌다.
지훈은 작게 숨을 들이켜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떨리는 걸까.
해인이 바로 옆에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두근두근.
해인의 머리가 제 어깨에 닿으면 조금 더 편할 것으로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때였다.
해인이 눈을 뜨며 이마 앞에서 멈춘 그 손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게슴츠레한 눈을 끔벅이던 해인이 이내 고개를 돌려 지훈을 바라보았다.
당황한 지훈이 허공에 뜬 손을 멈춘 채 눈만 끔뻑였다.
“깬……, 거야?”
멍하니 지훈을 보던 해인이 고개를 돌려 제 이마 앞에 있는 지훈의 손을 바라보았다. 잠깐 앉아서 쉰다는 것이 그만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왜 여기에 있고, 저 손은 뭘 하려고 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이혼을 요구했던 밤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번엔, 진짜 칠 건가요?”
지훈은 또다시 칠 거냐고 묻는 해인으로 인해 괜스레 멋쩍어졌다. 서둘러 손을 거둬들이며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머리가 불편해 보여서 기대게 해 주려고 했어.”
“어떻게 된 거예요? 부사장님이 왜 여기 있어요?”
“그냥, 뭐 좀 점검하러 왔다가 우연히…….”
해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해인은 우연히, 라는 지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어제 일만 해도 그랬다. 지훈은 분명 외부 미팅 끝나고 가는 길이라 했지만, 은진에게 듣기로는 그것이 아니었다. 부사장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그를 보았고 거기서 매장에 간 제 이야기를 해 주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디 매장인지 위치까지 알려주었고.
오늘은 누구에게 듣고 내려왔을까. 여기로 온 것을 팀장이 알고 있으니 아마도 그에게 듣고 내려왔을 것이다.
회사 내에서 이런 식으로 자꾸 같이 있는 걸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분명 뒷말이 나올 텐데…….
“많이 피곤했나 봐. 여기서 잠들 정도면.”
“잠깐 쉰다는 것이 그만…….”
“그럼 조금만 더 쉬어. 많이 피곤해 보이네.”
지훈의 말대로 해인은 많이 피곤한 상태였다. 쪼그리고 앉아 선잠을 잔 것이 오히려 몸을 더 무겁게 하는 것 같았다.
해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뒤로 기댔다.
지금 피곤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지훈이 저를 따라 다니지 않고 온전히 일에 집중할 수 있을까. 말이 통하면 좋으련만 이미 작정을 하고 나선 남자를 돌이키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근데 아니란 거 알면서 왜 꼭 칠 거냐고 물어봐?”
“진짜 칠 거 같아서 그러는데요?”
아이의 투정 같은 질문에 고민을 이어가던 해인이 가볍게 되받아쳤다.
“내가 왜 진짜 칠 거라고 생각해?”
“이혼도 당하고, 버림도 받고, 뭐 이래저래 미울 것 같아서, 감정이 쌓이면 한 대 칠 수 있겠다 싶어서…….”
농담인 줄 알면서도 되물었던 지훈은 갑자기 울컥해졌다.
대화가 끊어지는 것보다는 이렇게 가벼운 대화라도 나누며 해인과 더 오래 있고 싶어서 그냥 해 본 질문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기함할 일이긴 했다.
이혼당하고 다시 만난 후 다시 버림받고.
두 번째 이별 후, 견디기 힘든 감정적 고통이 무수히 저를 괴롭혔었다.
“감정이 쌓이긴 했지. 괴롭고 힘든 감정들이. 그 감정들이 쌓이다 못해 곪아 터져서 핏물이 흐르는 것 같기도 했어. 이혼할 땐 몰랐는데 홀로 남겨졌다는 것이 이래저래 참 많이 힘들기는 하더라.”
지훈이 그런 자신을 봐 달라는 듯 간절히 해인을 바라보았다.
그 뜨거운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해인은 내리 바닥만 보고 있었다.
몇 달 전만 해도 언제나 마주할 수 있었던 눈동자.
지훈은 그 오래지 않은 과거를 그리워하며 낮게 탄식했다.
저 눈동자 하나에 모든 것이 빛날 때가 있었다.
저 시선을 담고 마냥 좋아 웃음이 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럴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가볍게 시작한 이야기인데 문득 깊어지는 감정으로 인해 금세 서글퍼졌다.
지난날을 생각하던 지훈의 입에서 솔직한 고백이 흘러나왔다.
“우리 보물이를 잃었잖아. 아빠로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아이를 보냈는데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겠어. 그것도 부족해 또 너를 잃었지. 나는.”
우리 보물이.
그 한마디에 격동이라도 하듯 해인의 가슴에 서글픔이 차올랐다.
묻어 두고 묻어 두었던 슬픔.
말만으로도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은 애틋한 우리의 아이.
하필이면 왜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지훈의 손 위치에서 시작된 가벼운 투덕거림에 복잡한 감정이 얽히더니 결국 떠난 아이까지 이어졌다.
갑작스레 감정을 토해내는 지훈으로 인해 해인은 가슴이 꽉 조여드는 것만 같았다.
당연히 그도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이 슬픔에 빠져 허우적댈 수는 없었다.
해인은 이를 악물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다시 지훈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 보물이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니 어쩔 수 없었지만, 해인이는 다르잖아. 힘든 너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보낼 수밖에 없었던 내 심정이 어땠을까. 어찌나 자신이 바보 같은지 분신이라도 있으면 마음껏 두들겨 패고 싶을 만큼 괴로웠어. 누군가 맞아야 한다면 그건 나지, 네가 아니야.”
억누르고 있던 진심을 전한 듯 지훈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죄인이라도 된 듯 고개마저 힘없이 처지는 그 모습이 안쓰러웠다.
이 바보 같은 남자를 어쩌나 싶으면서도 가슴은 시렸다.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해요. 지훈 씨 잘하고 좋아하는 일 하면 금방 잊힐 거예요. 우리 괜히 지난날에 얽매이지 말아요.”
“그게 그렇게 쉬웠으면 내가 여기까지 왜 왔을까. 해인이는 정말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은 거야?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을 만큼?”
“더 이상 이런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럼 듣기만 해.”
“…….”
“나는 해인이가 많이 보고 싶었어. 사실 처음부터 헤어질 생각 같은 거 없었으니까. 그래서 난 다시 차근차근 새로운 시작을 준비했고, 결국 이렇게 우린 다시 만났어.”
말을 멈춘 지훈이 해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를 떠나려 했던 이유를 나름 짐작은 해 보았는데, 혹시나 사업적으로 얽힌 이해관계나 어머니…….”
“아니에요. 그런 거.”
해인이 선을 긋듯 말했다.
마치 잘못한 일이라도 들킨 듯 가슴이 쿵쾅댔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극복하지 못하고 내가 돌아선 거니까 모든 건 다 내 탓이에요.”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나도 모든 게 내 탓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이혼하잔다고 이혼해 주는 머저리 같은 놈, 헤어지자고 하니까 보내 주는 바보 같은 놈, 그러면서 후회하고 겨우 이렇게 매달리고 있는 형편 없는 놈.”
“꼭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지훈 씨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아니, 지금 내 상황이 그래. 살면서 이렇게까지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적은 없었어. 해인이 널 보내야 했던 모든 순간이 나는 후회스럽거든.”
지훈의 목소리가 힘없이 가라앉았다.
지금까지 시종일관 덤덤하기만 했던 그의 말투는 여전했다. 절절한 감정은 담고 있지 않았지만, 그 내용만으로도 해인의 가슴은 먹먹해졌다.
이미 지난 일이고 지훈에게도 다 끝난 일인 줄 알았었다.
그가 돌아와 다시 시작하자는 의미로 다가왔을 때도 이 정도로 깊은 마음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해인은 비로소 지훈이 자신을 얼마나 깊이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짧은 기간이었기에 그 마음이 몇 년간 그를 짝사랑했던 저보다는 얕을 것으로 생각했다.
차마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긴 시간도 아니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이 남자는 정말 자신을 잊지 않았고 잊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가 많이 아팠을 것이라 생각하니 못내 미안해지고 가슴이 저렸다.
휘몰아치는 거센 감정을 해인은 온 힘을 다해 내리눌렀다.
“더 이상 이런 이야기는 그만 했으면 좋겠어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에둘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가 볼게요.”
“그래. 조심해서 올라가.”
쏟아 낸 푸념이 많았던 지훈은 의외로 해인을 잡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해서인지 어느 정도는 마음이 후련해 보였다.
해인은 또 그게 눈에 밟혀 쉽게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여기 계속 있을 거예요?”
“아니야. 잠시만 생각 좀 정리하고 올라갈 거니까 먼저 가. 난 괜찮아.”
지훈이 차분히 대답했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해인이 돌아서 걸었지만, 등 뒤가 자꾸만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홀로 돌아서지 말라는 무언의 외침.
제발 돌아오라는 절규.
뭔가 소중한 것을 버려 두는 느낌.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해인은 쓸쓸히 걸었다.
차라리 대놓고 하는 유혹이었다면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해인은 흔들리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가슴은 그를 그리워하고 있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미 그를 버렸으면서 무슨 염치로 다시 돌아간단 말인가.
그 순간 시어머니인 애란의 얼굴도 함께 떠올랐다. 역시나 그의 세계는 돌아갈 곳이 아니었다.
해인은 부러 마음을 냉랭히 했다.
.
.
.
그러나 여전히 아프고 괴로웠다.
집에 돌아왔을 때 해인은 집 안 곳곳에서 윤지훈이라는 남자를 떠올려야 했다.
지하 창고에서부터 따라온 감정들은 그와 나란히 누웠던 침대에서 격랑을 일으키며 해인을 뒤흔들었다.
결국, 해인은 와인을 마시며 괴로운 마음을 달랬다.
아이를 잃고 힘들었다는 그 말이 자꾸만 가슴을 헤집었다. 이혼에도, 두 번째 이별에도 지훈의 의사는 없었다.
그저 자신이 하자는 대로 따라 주었을 뿐, 그는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이었다.
제가 겪었던 아픔을 그도 겪었을 것 같아서 한없이 그가 가여웠다.
해인은 빈 잔에 와인을 채워 연거푸 들이켰다.
평소 술을 즐겨 마시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왠지 취하고 싶었다.
무작정 지훈을 밀어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슬퍼서 괜스레 눈물이 흘렀다.
무슨 자격으로 우는 걸까.
사랑하는 남자를 그렇게 힘들고 해놓고 대체 무슨 자격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고는 다시 와인을 들이켰다.
술에 취할수록 감정은 북받쳐 올랐다.
취할 대로 취한 해인이 밤바람이라도 쐬고 싶어서 일어서는데 소파 테이블에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을 보니 ‘윤지훈’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아직 삭제도 못 한 이름이 보이자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났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다짜고짜 이름부터 불렀다.
“야! 윤지훈.”
핸드폰 너머로 당황한 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지금이 시간이 몇 시인데 전화질이야.”
-그게, 집에 잘 들어갔나 해서. 아까 많이 피곤해 보였잖아. 괜찮은 거야?
“잘 들어왔고 괜찮으니까 신경 꺼.”
어느새 테라스로 나가 난간에 기대고 선 해인이 퉁명스레 말했다.
-혹시 술 마시는 중이야?
“어. 마시는 중이다. 아주 많이. 내가 술을 마시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말고, 너는 너랑 어울리는 여자 만나서 결혼해.”
-뭐?
“꼭 너랑 어울리는 여자 만나서, 어어? 으아악!”
쿵!
치맛자락을 잘못 밟은 해인이 데크 위로 넘어져 버렸다.
-해인아! 주해인! 무슨 일이야?!
핸드폰 너머로 놀란 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해인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 * *
지훈의 차가 쏜살같이 도로를 질주했다.
회사에서 나오던 중 해인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피곤해 보였던 해인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당장 내일이라도 연차 내고 쉬는 게 좋겠다고 권할 셈이었다.
핸드폰 너머로 터프한 해인의 목소리가 들릴 때만 해도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이어 꼬인 발음에 해인이 술을 마시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혹시나 큰일이 난 건 아닌지 지훈의 가슴이 거칠게 뛰었다. 아무리 다시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사실 지하에서의 일이 내내 마음에 걸렸었다.
푸념을 쏟아 낸 자신이 너무 나약해 보이지는 않았는지, 너무 남자답지 못한 건 아니었는지 걱정도 되었다.
어쩌면 연차 내고 쉬라는 것은 핑계고 혹시나 해인이 제게 실망하지는 않았을까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컸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운전하는 내내 지훈은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혹시라도 비번이 바뀌었으면 어떡하나. 어떻게든 집에 들어가야 하는데…….
현관 앞에 선 지훈이 떨리는 마음으로 도어락에 손을 갖다 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