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너하고도 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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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너하고도 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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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너하고도 끝이야.
2022.04.10.
버튼을 누르는 손끝이 잔뜩 긴장하며 떨려 들었다.
숨을 멈추니 모든 감각이 손끝으로만 향했다.
띠띠띠띠.
지훈의 귓가로 경쾌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지훈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비번이 그대로라는 감격도 잠시, 곧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해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테라스로 향하는 거실 창문이 열려 있었는데 거기에 사람의 형체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해인이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해인아! 주해인. 괜찮아?”
해인을 안아 일으킨 지훈이 다급히 외쳤다. 그 순간 해인이 게슴츠레 눈을 뜨며 지훈을 올려다보았다.
“어디 다친 거야?”
“어? 유운지훈이다!”
이름이 뭉개지고 힘이 없긴 했지만, 목소리는 낭랑했다. 지훈은 머리와 다리를 대충 눈으로 훑으며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
외관상으로는 괜찮아 보였다. 술에 취해 넘어져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잠이 든 듯했다.
“술을 마셨으면 조심해야지. 크게 다쳤으면 어쩔뻔했어.”
“갠차나. 그냥 좀 잔 거야. 근데 윤지훈은 왜 내가 잠만 자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냐. 진짜 웃기인데……, 아! 졸려어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해인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대체 얼마나 술을 마셨으면 이렇게 몸을 가누지도 못할까.
안아서 침대에 눕혀주자는 생각을 하면서도 지훈은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꼭 감은 눈과 미처 다물지 못한 입술과 쌔근거리는 숨결.
이렇게 가까이 그녀가 있는데 차마 온전히 안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이렇게 안을 수 있다는 것도 술에 취해서라는 것이 못내 서글펐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제 품에 안겨 잠들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지훈의 떨리는 손이 해인의 얼굴로 향했다.
유리를 다루듯 섬세히 쓸어내리고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해인이 간지러운 듯 낮게 신음하며 몸을 비틀었다.
그 작은 몸짓에도 욕망이 꿈틀거리며 지훈의 몸을 뜨겁게 했다.
지훈은 낮게 탄식하며 해인을 안아 올렸다.
감정을 억누르고 욕망을 잠재우며 오늘 할 일은 여기까지라는 듯 스스로를 다그쳤다. 당장이라도 저 붉은 입술을 머금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이를 악물며 참아냈다.
해인을 침대에 눕힌 지훈은 가까스로 안방을 벗어났다.
머지않아 다시 그녀를 안을 수 있는 날을 기대하며 낮게 읊조렸다.
“미안한데 다른 여자는 절대 못 만날 것 같아. 나한테는 오직 너뿐이야. 주해인.”
.
.
.
침대 위에 앉아 문자를 보는 해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연차 처리했으니까 오늘은 푹 쉬어. 몸 잘 챙기고.]
지훈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술을 마시며 전화를 받았고 그러다 테라스에서 넘어진 기억이 났다.
지훈이 저를 안고 있는 기억도 있었지만 그건 꿈처럼 희미했다.
어쩌자고 그렇게 술을 마셨을까.
전화만 받지 않았어도 지훈이 그렇게 달려오는 일은 없었을 텐데…….
일어났을 때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보면 지훈이 안아서 눕혀 준 모양이었다.
생각만으로도 아찔해 해인은 눈을 찔끔 감아버렸다.
잠든 제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감정을 절제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게 돌아가야 했던 마음은 또 어땠을까.
지훈이 참고 인내하는 것만큼이나 해인도 괴로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늘이 금요일이라 며칠 동안은 지훈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지훈과 불편하지 않게 지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주말을 보냈다.
월요일 출근이 몹시도 부담스러웠지만, 다행스럽게도 오전에는 지훈을 만날 일이 없었다.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난영에게 사장실로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부친이 간 틈을 타서 난영이 회사로 찾아온 것이었다.
대면하고 싶지 않았지만 오지 않으면 직접 사무실로 간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사장실로 향했다.
해인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난영은 소파의 상석에 앉아 있었고 세나는 그 앞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필시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난영은 해인이 자리에 앉자마자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여기에 사인하거라.”
“이게 뭔데요?”
“너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돼.”
해인은 묵묵히 난영이 건넨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각서, 라고 쓰여 있기에 일단 종이를 들어서 자세히 보았다. 대충 읽어 보니 회사의 직원으로만 있을 뿐 대표의 자리에 오르지 않겠다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나 주해인은 엘브의 어떤 권리도 갖지 않을 것을 서약한다.]
더불어 어떤 지분도 갖지 않고 임원도 되지 않겠다는 등등의 개소리가 적혀 있었다.
“하아.”
실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무 유치해서 뭐라 해 줄 말도 없었다.
“뭐 하니? 싸인 안 하고?”
해인은 소리가 날 만큼 종이를 펄럭이고는 세나를 바라봤다.
“세나, 너도 같은 생각이니?”
“그럼. 당연하지. 이 회사 대표는 나 외에는 아무도 없어.”
당당하기도 하지.
해인은 입을 다물고는 그러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난영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그 순간 찌이익 하며 종이가 찢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인이 종이를 찢은 것이었다.
“너, 지금 이게 무슨…….”
놀란 난영이 눈을 부라리며 해인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해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럼, 전 바빠서 이만.”
“뭐가 어째? 거기 못 서?”
난영이 소파를 벗어나려는 해인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휘청이며 돌아선 해인이 피하지 않고 난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가 그렇게 쳐다보면 어쩔건데?”
“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내가 뭘. 이 회사는 어차피 우리 친정이 일으킨 회사나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네 지분은 하나도 없어. 그래서 각서 쓰라는 건데 감히 종이를 찢어?”
“이 회사는 직원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회사예요. 회사의 대표가 누가 될지는 사원들과 주주들이 결정하게 될 겁니다.”
“뭐가 어째?”
난영의 얼굴에 노기가 치밀어 올랐다.
어릴 적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더니 이렇게 회사로 입성하게 되니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다.
이래저래 제 아빠가 뒷배가 되어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화가 난 난영이 그대로 손을 들어 올려 해인의 뺨을 향해 휘둘렀다.
하지만 그 손은 해인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난영의 노기를 짐작한 순간부터 그녀의 손이 날아올 것을 예상한 덕분이었다.
깡마른 난영의 손목을 잡은 해인이 매섭게 그녀를 쏘아보았다.
“손버릇 여전하시네요. 저 어렸을 때도 그러시더니.”
“이 손 못 놔?”
난영이 빠져나가려 움찔거렸으나 해인은 그 손목을 잡고 버텼다.
몸매로 따지면 둘 다 비슷했으나 난영은 키가 작고 해인은 상대적으로 키가 컸다.
힘의 우위를 선점한 해인이 보란 듯이 웃어 주었다.
“내가 아직도 새엄마 히스테리 때문에 공포에 떨던 그 어린아인 줄 아세요?”
“뭐가 어째?”
“사람이, 사람대접을 해 주면 적당히 할 줄도 알아야지.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그동안 참았던 분노를 폭발시키듯 해인은 거침이 없었다.
그 거침없는 기세에 엄마만 믿고 있던 세나가 날뛰기 시작했다.
“언니, 너 미쳤어? 빨리 그 팔 안 놔?”
“너, 너 어디서 이런 돼먹지 못한 것이…….”
모녀가 차례로 해인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다.
“돼먹지 못해? 내가 그런 아이였으면 진즉에 새엄마 멱살 한번은 잡았을 거예요.”
멱살만 잡았을까.
고작 서너 대였지만 어린 시절 맞았던 뺨은 너무나 아팠고 그로 인해 가슴은 뭉개질 대로 뭉개졌었다.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던 눈동자로 인해 늘 몸은 얼어붙었고 히스테리를 부릴 때마다 다 자라지도 못한 심장은 두려움에 몸부림치기 일쑤였다.
그런 세월을 살게 했으면서 뭐가 어째?
정말 돼먹지 못한 저였다면 받은 만큼 돌려줬을 것이다.
참는다고 능사는 아니겠지. 더는 이 가증스러운 행태들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꿈 깨세요. 이 회사는 정말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에요. 그런 일터를 갑질이나 하는 새엄마나 세나한테 맡기지는 않을 거니까.”
“그래. 네가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네. 그러니 똑똑히 들으세요. 이 회사는 내가 가집니다.”
굳은 결의를 하듯 해인은 목소리에 힘을 단단히 실어 말했다.
그 순간 지켜보던 세나가 테이블을 넘어와 해인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진짜 미쳤구나. 네가 뭔데 이 회사를 가져?”
카랑카랑한 세나의 목소리가 귓가를 찢듯 들려왔다.
머리는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뜯겨 나가는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
해인은 난영을 잡고 있던 손을 풀고 단번에 세나의 뺨을 후려쳤다.
촤악!
“못된 것. 나쁜 기집애. 다섯 살이나 어린 게 어디서 까불어. 가족처럼 느껴진 적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널 동생이라고 생각했어. 어쨌든 너하고는 피가 섞였으니까.”
“……뭐?”
세나는 얼얼해진 뺨을 어루만지며 잠시 충격에 빠졌다.
자신이 맞았다는 것도, 늘 참기만 했던 해인이 저를 때렸다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젠 너하고도, 정말 끝이야.”
단호하게 내뱉은 해인이 있는 힘을 다해 세나의 뺨을 한 대 더 후려쳤다.
이미 넋이 나간 세나의 고개가 왼쪽으로 완전히 꺾였다.
“이건 네 엄마 몫이야.”
판사의 선고와도 같은 한마디를 내뱉은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지훈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모녀가 해인을 둘러싸고 있고 볼륨이 있는 해인의 긴 머리는 잡아 뜯기기라도 한 듯 심각하게 헝클어져 있다.
“지금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지훈은 다짜고짜 큰소리로 외쳤다.
딱 거기 있으라는 듯,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듯 거침없이 다가갔다.
그 순간 해인이 세나를 밀치고는 소파 안쪽으로 걸어서 문을 향해 내달렸다.
지훈이 손을 내밀어 잡으려 했지만, 거리가 닿지 않았다. 그 사이 해인은 이미 문을 빠져나갔다.
아무래도 저대로 보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번엔 정말 가만 안 둡니다. 폭행죄로 싹 다 집어넣을 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듯 두 모녀를 향해 외친 지훈이 서둘러 해인을 따라나섰다.
지훈이 나왔을 땐 이미 비상구 문으로 나가는 해인의 뒷모습만 보였다.
서둘러 그녀를 따라 달렸다. 계단은 위험한데 저러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그나마 바지에 로퍼를 신어서 다행이었다. 너무 급하지 않게 그렇다고 그녀가 안 보이지도 않게 달리며 외쳤다.
“해인아. 달리지 마. 그러다 넘어져.”
“따라오지 말아요. 따라오면 가만 안 둬요.”
달리면서 목청도 크다. 계단 전체가 울려 퍼질 만큼.
“하아.”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한참이나 울렸다. 그렇게 따라가다 보니 벌써 1층이었다.
이미 문밖으로 나가 버린 해인이 사라져 버렸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눈에 보이는 곳에 있었다.
건물 뒤편으로 이어지는 작은 화단 앞, 그녀가 있었다.
화단을 이루는 큰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숨을 고르고 있다. 조금 숨이 차는 것으로 보였지만 의외로 멀쩡한 몰골이었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바로 옆에 있는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따라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무슨 사람이 그렇게 잘 달리냐? 원숭이야? 계단을 줄 타고 내려오는 줄 알았네.”
픽. 지훈의 귓가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웃은 거지?
다행히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혹시 맞은 거야? 괜찮아?”
맞았냐고?
해인은 고개를 숙인 채 땅만 바라보았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때려놓고 나니 걱정이 되었다. 머리채 먼저 잡혔으니까 쌍방 같기는 한데…….
“약 바를까? 얼굴 좀…….”
“뺨 두 대 때리면 형사 처벌받나요?”
“어디 봐. 진짜 맞았어?”
놀란 지훈이 두 손으로 해인의 얼굴을 감싸 안으며 제 쪽으로 돌렸다.
오밀조밀 모여 있는 이목구비가 안쪽으로 모여들었건만 예쁜 건 여전했다.
지훈은 뚫어져라 해인의 얼굴을 살폈다. 얼굴은 작고 제 손은 커서 제대로 보려면 결국 손을 놔야 했다.
물론 해인이 뭐 하는 짓이냐며 뒤로 빠지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놓였지만.
근데 아무리 봐도 얼굴이 괜찮다.
입술도 안 터졌고. 두 대 맞은 것 치곤 아주 빨갛지도 않고.
그렇다고 우리 해인이를 때린 모녀를 가만둘 수는 없었다.
“형사 처벌 당연하지. 내가 감옥에서 평생 썩게 해 줄게.”
“평생이라뇨?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심하긴. 감옥에 가둬 놓고 밥도 안 줄 거야.”
“너무해요.”
“너무할 것 없어. 자고로 손버릇 나쁜 인간말종들은 사회와 격리를 시켜야지. 상종 못 할 인간들 같으니라고.”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손대면 톡 하고 터질지도 모르는 저 곱고 어여쁜 볼을 때렸다니.
“아니, 그럴 필요 없이 손모가지를 작두로 잘라 버려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