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애틋한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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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애틋한 눈빛.
2022.04.14.
우와! 진짜 살벌해서 같이 못 있겠네.
지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해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가요? 그럼 상종 못 할 인간은 이만 가 볼게요.”
“뭐?”
놀란 지훈이 뚜벅뚜벅 걸어가는 해인을 일단 잡고 보았다.
생각은 그다음이었다.
상종 못 할 인간의 범주에 해인이 들어갈 리 없는데…….
뭐야. 맞은 게 아니라 때린 거야?
설마 싶어 멍 때리며 해인을 보는데 얼굴이 평화롭다. 요즘엔 때린 놈이 발 뻗고 잔다고는 했는데…….
“상종 못 할 인간은 사회와 격리를 시켜야 한다면서요.”
“…….”
뭔가 잘못됐다. 아니 잘된 건가?
지훈은 여전히 멍하니 해인을 보았고 해인은 저 남자는 먹여 줘야 하는구나 싶어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때렸는데.”
“지, 진짜야?”
황당해하는 지훈을 향해 해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진실을 말해 주었다.
“네. 내가 세나 뺨을 두 대나 때렸어요. 그럼 상종 못 할 인간은 이만 가…….”
“벌금 나올 거야. 뺨 한 대에 백만 원씩 두 대에 이백만 원. 지금 내가 가진 게 돈밖에 없다. 내가 내 줄게.”
서너 템포나 늦게 상황을 파악한 지훈이 다급히 말했다.
화단 주위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누구라도 들었다면 전남편이 호구가 되어 돌아왔다고 했을 것이다.
“진짜요?”
“그럼. 당연하지.”
지훈이 입을 헤벌쭉 벌리며 활짝 웃는 얼굴로 해인을 바라보았다. 물끄러미 그 바보 같은 얼굴을 보고 서 있던 해인이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었다.
“좋아요.”
“…….”
“부사장님과 직원, 그러니까 직원의 잘못을 몸소 끌어안으시는 부사장님 그쯤으로 할까요? 우리 관계도 딱 거기까지였으면 좋겠는데. 나도 그런 거면 괜찮아요.”
주말 내내 해인은 많은 고민을 했다.
어차피 계속 만나야 할 사람인데 만날 때마다 어색해지는 분위기가 싫었다.
차라리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으로서 대한다면 오히려 더 편할 것 같았다.
지훈은 말없이 해인이 내미는 손을 바라보았다.
다시 재회한 후로 이런 긍정적인 반응은 처음이었다. 매번 물러나거나 거부하기만 하던 해인이 먼저 손을 내밀어주었다.
지금 저 손을 잡는다고 해서 해인이 원하는 대로 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해인은 이렇게 해서 마음이라도 편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떤 모습이건 해인의 마음이 불편한 건 제게도 힘든 일이긴 했다.
잠시 생각하던 지훈이 천천히 해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부드럽고 따듯한 감촉을 느끼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가볍게 악수나 하려 했던 해인이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지훈을 올려다보았다.
날렵한 콧날 아래 우아하게 다물린 입술 그리고 뭔가를 갈구하는 듯한 끈적한 눈동자.
괜스레 가슴이 떨린 해인은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서둘러 시선을 내렸다.
“다른 걸 기대하진 말아요. 난 지금 이대로가 편하니까.”
“나 아무 말 안 했는데.”
아무 말 안 했지만 눈빛이 이상하잖아.
해인은 차라리 그가 아무 말이나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돌아오는 답이 없고 눈동자는 심상치 않으니 오히려 불안했다.
“다른 여자 만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회사에서는, 그러니까 다른 직원들이 보고 있을 때는 해인이를 불편하게 하지 않을게.”
술에 취해 했던 말을 떠올린 해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술기운을 빌려서 한 말이긴 했지만 진심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회사에서는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는 말이 희망적으로 들렸다.
다른 직원들이 보고 있을 때라는 전제를 다는 것이 살짝 애매했지만.
“먼저 가 볼게요. 같이 가면 이상하니까 부사장님은 좀 더 나중에 와요.”
해인이 손을 놓고 돌아서 걸었다.
지훈은 멀어지는 해인의 뒷모습을 아련히 바라보았다.
해인의 말대로 부사장과 직원으로 머무를 것이었으면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작정 들이대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또 새엄마 모녀가 나타나 우리 해인이를 괴롭히고 있지 않은가. 얼마나 어이없는 일을 당했으면 저 고운 손으로 뺨을 때렸단 말인가.
하여간 못된 모녀였다. 또다시 해인이 홀로 힘든 일을 감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지훈은 해인과 잡았던 제 손을 들어 볼에 가져다 대었다.
해인의 온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건만 지훈은 여전히 그녀의 온기가 남은 듯한 착각에 빠졌다.
* * *
난영과 세나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분노에 어쩔 줄을 몰랐다.
맘 같아선 그대로 쫓아가 해인의 뺨을 날려야 했지만, 회사에서 한 번만 더 문제를 만들었다가는 가만 안 둔다는 남편의 엄포 때문에 그 이상은 어쩌지 못했다.
“엄마 어떡해? 나 여기 입술 터졌지.”
세나의 볼은 여전히 붉었고 살짝 터진 입술엔 핏기도 남아 있었다.
감히 제 딸의 얼굴에 손찌검을 하다니 아주 무서운 게 없는 모양이다.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일단 약이나 잘 발라.”
전치 2주의 진단서를 손에 든 난영이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해인은 이미 철천지원수나 다름이 없었다.
“근데 언니 그게 그런 욕심이 있었어?”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이제야 본색이 드러난 거지.”
“언니가 나보다 똑똑한데 그럼 내가 상대가 안 되는 거 아니야?”
“네가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머리는 더 좋으니까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 그리고 경영을 뭐, 머리로 한다니?”
“아, 씨. 몰라. 진짜. 언니 그거 완전 웃겨. 나중에 나도 뺨 때려 줄 거야.”
세나는 얼얼한 제 볼을 붙들고 울분을 쏟아내었다.
한편으로는 가슴이 서늘하기도 했다.
‘이젠 너랑도 끝이야.’
언제는 뭐 끝이 아니었었나.
아쉬울 것도 없고 끝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세나는 해인이 뱉은 그 말에 몹시도 기분이 언짢았다.
동생의 뺨까지 후려쳤으면서 뭘 잘했다고 큰 소린지 생각만으로도 울화가 치밀었다.
* * *
그로부터 며칠은 별 소란 없이 지나갔다.
난영은 의외로 조용했고 덕분에 해인도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잠깐 밖에 나갔다 온 해인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제 옆으로 다가왔다.
“형수님?”
의외의 인물의 등장에 해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 비서님?”
놀라기도 했지만 반가움이 컸다.
해인이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이혼 서류를 마지막으로 확인하던 자리에서였다. 만날 때마다 늘 웃어 주었던 그는 그날만큼은 웃지 않았었다.
“아! 뒷모습이 비슷하다 싶었는데 역시 형수님이셨군요. 진짜 보고 싶었습니다.”
“오랜만이에요. 여긴 어쩐 일이세요?”
인사를 건네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두 사람은 사이좋게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해인이 8층 버튼을 누르는 것을 기다린 상진이 차분히 대답했다.
“제가 철없는 상무님 때문에 고생이 많습니다.”
해인을 보고 웃음 일색이던 표정이 금세 피곤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상진은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흔들어 보이며, 한 손으로 끌고 있는 캐리어도 움직여 보였다.
생각해 보니 회사에 오는 사람치고는 짐이 좀 많았다.
“캐리어엔 상무님, 아니 이제 부사장님 트레이닝 셔츠와 속옷이 들어 있고요. 이 가방 안엔 검토해야 할 서류들이 잔뜩입니다.”
“속옷이라뇨?”
“아! 모르셨어요? 부사장님, 일하시다가 늦으면 그냥 소파에서 주무신다고 하시던데…….”
“아무리 그렇다고 왜 소파에서…….”
“그러게 말입니다. 하여간 무슨 지지리 궁상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여러모로 제가 고생이 많게 되었고요.”
“그럼 하 비서님이 이제부터 여기서 비서를 다시 하시는 건가요?”
해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엘리베이터가 8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상진은 자신의 층수가 아님에도 해인보다 먼저 내렸다.
“하 비서님은 한 층 더 올라가야 하는데요?”
“알고 있습니다. 일단 형수님 내리시니까, 내려서 이야기 더 하고 싶어서요.”
“아!”
해인이 멋쩍게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이제는 호칭이 바뀔 때도 되었건만 여전히 형수님이라 하니 부담스러웠다.
“저는 여기 머무르지는 않고, 상무님 여기 계실 때 잠깐씩 다녀가기만 할 것 같습니다. 상무님, 휴직 처리되어서 일단 제가 상무 대행으로 일을 하고 있거든요. 상무님, 그러니까 부사장님 대신 단순한 일들은 직접 처리하고 필요할 때는 이렇게 왔다 갔다 하게 생겼습니다.”
말만 들어도 그가 얼마나 피곤할지 짐작이 되었다.
지은 죄도 없는데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어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하 비서님이 정말 고생이 많겠어요.”
“역시 형수님은 뭔가를 아시는 분입니다.”
“혹시 오늘도 사무실에서 잔다고 하시던가요?”
“검토해야 할 서류들이 많다고만 하셨어요. 저러다 탈 나지 않으실지 걱정입니다. 어쨌든 일이 두 배로 불어났으니 바쁘시긴 할 겁니다. 아, 그리고 형수님 만나면 자기는 가끔 소파에서 잔다고 꼭 말해 주라 하던데요?”
“왜요?”
“뭐, 불쌍하게 보이고 싶으신가 보죠. 아니면 한 번쯤 방문해 달라 뭐 그런 뜻 아니겠습니까?”
“그걸 왜 하 비서님께 말해 달라 부탁하죠?”
“자기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 않을까요? 벼룩도 낯짝이 있는데…….”
“아! 벼룩.”
평소 상사와 격 없이 지내는 줄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해인이 피식 웃었다.
“그럼 올라가 보세요.”
“네. 그럼 저도 이만 바빠서.”
가라고 하지 않으면 한도 끝도 없이 지훈의 흉을 볼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앞이라 다른 직원들도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었다.
상진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않고 비상구 쪽으로 향했다. 캐리어 때문에 불편할까 싶어 걱정도 되었지만, 얼른 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나저나 이 남자는 왜 소파에서 잔다는 걸까. 소파에서 자면 잔 것 같지도 않을 텐데…….
그러다 몸이라도 상하려면 어쩌려고.
그렇게 파고든 걱정에 해인은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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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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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회의가 길어져 퇴근이 늦어졌다. 해인이 시계를 봤을 때는 이미 여덟 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집에 가려고 가방 정리를 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라서 받지 않으려다 일단 받았는데 역시나 모르는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신온 백화점 전담 쇼퍼인데요. 부사장님께서 사모님의 스타일링을 받아서 옷을 가져오라 하셨거든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그러니까 윤지훈 부사장님께서 내일 제주도 호텔 행사에서 입으실 옷을 준비해 오라 하셨습니다.
“그걸 왜 내가 해야 하죠? 그리고 나 사모님 아니거든요.”
-그럼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그냥 주해인 씨라고 하세요.”
-아, 네. 아무튼, 저는 지시받은 대로 하는 거라서요. 주해인 씨가 직접 부사장님께 말씀드려 주셔야 할 것 같아요. 아니면 제가 난처하게 됩니다.
핸드폰 너머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여자의 목소리에 해인은 더는 그녀를 탓할 수 없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따로 있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한 해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도 회사에서 잔다고 했으니 지금도 일하고 있을까? 저러는 모습이 일반 직원들에게 좋게 비칠 리가 없을 텐데…….
아무래도 잘 설득해서 회사에서 내보내는 것이 급선무일 것 같았다.
해인이 계단을 타고 9층으로 올라갔다.
부사장실 밖으로 어렴풋이 불빛이 흘러나왔다. 마음을 가다듬고 노크를 했다.
“들어와요.”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일어 한 번 더 마음을 가다듬어야 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그가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이 들어올 줄은 몰랐던 것인지 처음엔 놀란 눈이더니 이내 입꼬리가 곡선을 그리며 웃는다.
“어서 와.”
해인이 짐짓 표정을 굳히고 태연히 말했다.
“퇴근 안 하세요?”
“일이 좀 남아서. 걱정되는 거야? 아까 하 비서 만났다며.”
“그게 아니라 신온 백화점 쇼퍼한테 전화가 왔어요. 내가 거절하니까 자기 난처하다고 직접 이야기하라 해서 올라와 봤어요.”
“그래. 내가 전화하라고 했어. 개인적으로 주해인 씨 스타일링을 받고 싶어서.”
“그걸 왜 해야 하죠? 내가 할 일도 아니고 할 이유도 없어요.”
이혼 전에도 해 준 적 없는 일이었다.
간혹 일반적인 옷 정리를 해 주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전담 쇼퍼가 맡아서 했었다. 평소에는 알아서 잘 입는 스타일이었고.
해인의 단호한 거절에 지훈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별로 서운해하거나 놀라는 모습도 아니었다.
큰 보폭으로 해인에게 다가온 지훈이 여전히 열려 있는 문을 닫고는 손을 문에 짚은 채로 해인의 허리를 감싸며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무척이나 애틋해 해인은 덜컥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