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줄리아의 초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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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줄리아의 초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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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줄리아의 초대장.
2022.04.17.
잠시간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우리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정신 차려, 윤지훈.’
해인이 입술을 달싹이며 그 말을 뱉으려던 찰나 지훈이 먼저 말했다.
“밥 먹었어?”
“네?”
“밥 먹었냐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해인이 먹지 않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지훈이 픽 웃으며 뒤로 물러나 책상 쪽으로 향했다. 그는 책상 옆에 걸어져 있던 슈트를 챙겨 입고는 다시 돌아왔다.
“가자. 밥 먹으러.”
아니, 그럴 거면 문은 왜 닫았어? 온갖 분위기는 다잡아놓고 기껏 하는 말이 밥이라니 해인은 살짝 어이가 없었다.
지금 밥이 중요한가.
아! 생각해 보니 중요하긴 했다. 이미 밥 먹을 시간이 훌쩍 지나지 않았는가.
“여태 밥도 안 먹었어요?”
“응. 안 먹었어. 이따 퇴근하면서 먹으면 너무 늦을 것 같고.”
“퇴근이요?”
해인이 놀라서 묻자 지훈이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왜?”
“하 비서님이 아까 캐리어 들고 오시면서 여기 소파에서 잔다고 하시던데요?”
“캐리어는 내일 제주도 출장 때문이고, 바쁘면 소파에서 잔다고 하기는 했는데, 그건 농담이었지. 하 비서가 농담을 못 알아들었을 리는 없고.”
순간 뭔가를 깨달은 지훈이 소리 내 웃었다.
“하하. 설마 그래서 온 거야? 하 비서가 한 말 때문에 걱정돼서?”
“아니거든요? 나는 쇼퍼가 한 말 때문에 올라왔을 뿐이네요.”
“그건 전화로 해도 될 말이었잖아.”
“그건…….”
그러네.
할 말이 없어진 해인은 지훈의 시선을 외면하며 책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책상 위엔 이런저런 서류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얼른 가자. 일이 많아서 빨리 밥 먹고 다시 올라와야 해. 네가 같이 안 먹으면 뭐, 나도 안 먹으면 그만이고.”
“아니, 왜 밥을 안 먹는 게 나 때문이라고…….”
자기가 안 먹으면서 굳이 책임 전가를 하는 모양새에 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해인은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약해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일단 밥은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멀리 가지 못하고 회사 인근의 식당으로 향했다. 혹시나 회사 식구들이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식당 내부는 한산했다.
좋아하는 갈비찜을 시켜놓고도 해인은 대충 먹는 시늉만 했다. 회의를 하며 샌드위치를 먹어서인지 입맛이 별로 없었다.
“오랜만이다. 같이 밥 먹는 거.”
“자꾸 옛날 이야기 하지 말아요. 그냥 부사장과 직원 딱 거기까지만 생각하라고 했잖아요.”
“그래. 알았어.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지.”
“이 남자가 진짜…….”
“먹어. 얼른 먹고 살이나 더 쪄.”
지훈이 해인의 앞으로 갈비를 밀어주었다. 제대로 먹지도 않고 깨작거리는 것이 마음에 걸린 탓이다.
해인은 지훈이 밀어 준 갈비를 본체만체하고는 소주 한 병을 시켰다. 거침없이 잔에 술을 따르고 반주를 곁들이는 그 모습이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술꾼이 된 것 같은 전 부인의 모습이 새삼 흥미로워 지훈은 느긋하게 그녀를 탐색했다.
“여전히 호텔에서 지내요?”
“응. 내가 집이 없어.”
“그런 핑계는 좀 궁색하지 않나요?”
“사실이야.”
“본가도 있잖아요.”
“어머니가 말씀이 많잖아. 귀찮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매일 호텔에서 지내기도 불편할 텐데.
차라리 집을 따로 구하면 될 것을.
해인의 생각으로는 그가 부러 불쌍함을 조장하는 것 같았다.
“사실은 할 말이 있어서 만나려고 했어.”
“할, 말이요?”
“응. 줄리아에게 초대장이 왔거든.”
“초대장이라뇨?”
“뉴욕 맨해튼에서 줄리아가 협업했던 지인과 패션쇼를 하나 봐. 해인이랑 같이 오라고 두 장을 보내줬어. 꼭 같이 와 달라고 해서 가기는 가야 할 것 같은데, 어때?”
해인이 놀란 눈으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줄리아의 초대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정말 줄리아가 초대장을 보내줬어요? 나를 기억해서?”
“그래. 해인이에 대한 인상이 좋았나 봐. 그러니까 초대장도 보내 주지. 성의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가야 하지 않을까?”
“그렇긴 한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해인이 당황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둘이 가기엔 보는 눈들이 너무 많았다.
줄리아는 지금의 이런 상황을 모르니 당연히 두 장을 보냈을 것이다.
“난 어차피 루가디의 대표 만나서 라이센스 수수료 협상을 다시 해야 해서 미국 가야 하거든. 저번에도 내가 했던 일이라 이번에도 내가 해야 해서. 나도 사실 미국 출장 일정이 아니었다면 시간 빼기가 쉽지 않았을 거야.”
루가디는 미국의 대표적인 신사복 브랜드였다. 신온은 그 브랜드를 들여와 재생산하고 판매하며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 출장 간 김에 패션쇼도 보고 오면 좋지. 가서 요즘 유행하는 트랜드를 미리 파악해 둘 필요도 있으니까. 그게 또 해인이가 할 일이고.”
해인은 쉽게 답을 할 수 없었다. 사실 줄리아의 초청이니 몹시도 가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지훈과 단둘이 가는 출장이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국내도 아니고 미국이라는 아주 먼 곳이지 않은가.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사람들 시선은 신경 쓰지 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신경 안 쓰고 싶어도 말이 나오면 신경을 쓰게 되는 게 사람 일인데.”
“그런 거 일일이 다 신경 쓰고 살면 본인만 피곤해.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 줄리아 좋아했고, 줄리아가 직접 보내 준 초대장이야. 그것만 생각해.”
“정말 그것만 생각해도 될까요?”
“당연하지.”
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주었다.
자신이 계획한 일은 아니지만, 함께 미국에 갈 수 있다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지훈과 달리 해인은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가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만약 그렇게 되면 지훈과 내내 같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온전히 부사장과 직원으로만 지내기 위해 최대한 만남을 줄이려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지 않은가.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나 다시 일하러 가야 해.”
“적당히 쉬면서 해요.”
“나 걱정해 주는 거야?”
한껏 웃으며 바라보는 지훈을 향해 해인이 짧은 일격을 날렸다.
“인사치레로 그냥 한 말입니다. 부사장님.”
.
.
.
미국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 고민이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형준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해인도 목적한 바가 있었기에 굳이 피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볼펜 모양의 소형 녹음기를 가방에 넣은 후 약속 장소로 향했다.
클래식 음악이 잔잔히 흐르는 레스토랑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해인은 표정 없는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긴장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손끝이 달달 떨리는 것 같았다.
코스 요리로 주문을 마친 형준이 웃으며 해인을 바라보았다.
“꽤 오랜만이네. 그렇지?”
“그러네요.”
“나와 줘서 고마워.”
해인은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물을 넘겼다. 긴장을 풀기 위해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형준의 말투에서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지만 기분 탓이려니 했다.
“세나를 때린 건 무모했어.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알고.”
그런데 형준이 다짜고짜 세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더니 벌써 그 일이 형준에게까지 전해진 모양이었다.
세나는 왜 집안 문제를 굳이 제삼자에게 말했을까. 그리고 저 남자는 자신이 뭐라고 남의 가정사에 이래라저래라하는 걸까.
여러모로 기가 막혔지만 해인은 평정을 잃지 않고 말했다.
“세나랑 연락하지 말아요.”
“너랑도 하는데 세나가 뭐가 문제야. 그보다 윤지훈은 왜 아직도 네 곁에 머물지?”
“나는 윤지훈 씨가 내 곁에 머무는 것보다 안형준 씨가 나한테 이러는 게 더 웃겨요.”
“고등학교 땐 분명히 네가 나한테 좋은 사람이라고, 멋진 사람이라고 했잖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 음성파일로 날 협박하기 전에는.”
“협박 아니야.”
부인하는 형준의 음성은 부드러웠다.
해인은 과거의 그가 나쁜 사람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형준은 저 부드러움 속에 비수를 감추고 있었다.
자신의 경계를 늦출 수는 없지만, 그의 경계는 허물어 볼 필요가 있었다.
“그 파일 공개 안 할 거죠?”
“왜 그렇게 생각해?”
“공개할 거였으면 진즉 공개했겠죠. 나한테 밥 먹자는 것 말고는 특별히 요구하는 것도 없고.”
해인은 무심히 샐러드 한 조각을 입에 넣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형준은 격의 없이 웃었다.
“내가 결혼하자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난 이제 결혼 안 해요.”
“왜? 윤지훈한테 제대로 데였나? 잠깐 다시 같이 산 것으로 아는데. 아무래도 윤지훈이 성에 차지 않았나 봐?”
“윤지훈은 신사답고 멋진 완벽한 남자예요. 인연이 아니었을 뿐.”
“제 눈에 안경인가?”
“지훈 씨에게 열등감 느끼나 봐요?”
해인이 히죽 웃으며 되물었다. 보아하니 지훈에 대한 제 마음을 떠보려는 수작인 듯 보였다.
굳이 지훈에 대한 제 호의적인 감정을 속일 이유는 없었다. 그의 미련한 집착을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솔직해지는 것이 더 나았다.
“재벌 3세들이 뒤에서 뭔 짓을 하는지 모르지? 내가 아는 애들이 어떻게 노는지 이야기해 줄까?”
자존심이 상할 법한 말에도 형준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런 쓰레기들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지훈 씨와는 상관없는 일이고.”
해인은 끝까지 냉소적으로 쏘아붙였다.
그런 해인을 물끄러미 보던 형준이 제 풀에 꼬리를 내렸다.
“그래. 그건 뭐, 그렇다 치고. 얼마 후면 우리 아버지 생신이야. 생신 잔치에 널 초대하고 싶은데 와 줄 수 있어? 네가 초대에 응해 주면 그날 그 음성파일 너한테 넘겨줄게.”
해인이 놀란 눈으로 형준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순순히 넘겨준다고?
물론 그것을 갖고 있다 해서 딱히 쓸모가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가기만 하면 되나요?”
“그래.”
그럴 리가. 음성파일이 몇 개나 되는 줄 알고.
백업이야 누워서 식은 죽 먹기인데.
해인은 그를 믿지 않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믿는 척하는 것이 더 나을 듯했다.
“정말 가기만 하면 그 파일, 영원히 공개 안 할 거예요?”
“약속은 지켜.”
일단 약속은 받았지만 아직 부족했다.
그의 입에서 더 많은 말들이 나와야 했다.
“난 솔직히 기왕 이렇게 된 거 잘못을 솔직히 공개하고 다시 일어서는 쪽으로 생각도 해봤어요. 기업 윤리상 그게 옳은 일인 것 같기도 하고. 타격은 있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야 진정으로 정직한 기업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상황으론 불가능할걸?”
“우리를 걱정해 주는 건 아니죠? 솔직히 그걸 공개하면 아빠도 가만있진 않을 거예요. 들어보니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던데 그 대화의 상대가 누구라는 걸 밝히고 그 상대 역시 공감했던 부분이라고 하면…….”
해인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형준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말은 진심이었다. 잘못이 있다면 솔직히 인정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이 옳았다. 다시 일으키는 것은 그다음 문제였다.
“안성 모직도 타격이 있겠죠? 게다가 그걸로 협박까지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좋을 게 없을 거예요.”
“비약하지 마. 그럴 일은 없어. 내가 바보도 아니고.”
형준이 짜증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해인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예상 못 한 모양이었다.
안성 모직이라며 직접적으로 이름을 거론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됐다 싶은 해인이 그를 향해 히죽 웃어 주었다.
“좋아요. 그럼 나도 생각해 볼게요.”
“확답은 안 하네?”
“시간이 필요해요.”
거절할 시간.
이젠 끌려다닐 이유가 없었다.
지훈이 자신의 인생을 엿같이 생각하게 만든 놈을 찾으면 반쯤 죽여 준다고 했는데…….
부디 형준이 지훈에게 걸릴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여기서 끝이라면 무사하기는 할 텐데…….
사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해인은 고민을 많이 했었다.
우영에게 친구의 친구 이야기인 척 법적 자문을 구해 보니 고작 협박이라서 벌금 정도 내는 게 전부라고 했다.
파일이 공개되었을 시 제 쪽이 입는 타격에 비해 너무나 약소하지 않나.
나름의 대비가 필요했고 그래서 같은 방법을 쓴 것이었다.
이제 가방을 들고 무사히 이곳을 나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