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 나도 모르는 일이야. (37/92)


41. 나도 모르는 일이야.
2022.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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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했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지루했던 식사가 끝나갈 즈음 해인이 옆 의자에 놓았던 가방을 집어 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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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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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형준이 말을 길게 빼며 해인을 불러세웠다.

뭔가 할 말이 더 있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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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더 할 말 있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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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은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

해인이 잠시 뜸을 들인 후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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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야 생각해 봐야 알겠죠.”

사실 생신 잔치에 참석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된다면 초대에 응할 용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형준의 솔직한 마음인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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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가 생신 즈음으로 연락할게.”

해인은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형준은 이전처럼 질척거리지는 않았지만 택시를 타고 가는 해인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택시를 타고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 해인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음성파일을 확인하고는 잘 저장해 두었다.

굳이 이 파일을 사용할 일이 없으면 더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 * *

오전 업무를 끝낸 해인이 팀원들과 함께 사내식당으로 향했다.

심 대리는 외근을 나가서 승윤, 우영과 함께 식당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콩나물 북엇국과 감자조림을 바라보는 해인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혼자 먹을 때면 간단히 시리얼을 먹거나 빵으로 대충 해결했는데 그래도 사내식당에서 이런 음식들을 맛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맛을 음미하며 별말 없이 먹는 것에만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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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 씨. 오늘은 밥이 맛있나 봐? 요즘 살 빠지는 것 같던데. 뭐, 고민되는 일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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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데요?”

국을 한 모금 넘기던 해인이 아니란 듯 고개를 저었다. 요즘 들어 입맛도 좋고 살이 빠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옆에 앉아 있던 우영마저 기다렸다는 듯 한마디를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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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긴. 너 요즘 완전 이상해. 혼자 멍 때리고 앉아 있지를 않나, 쓸데없이 들락날락하지를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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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언제? 웃겨 진짜. 너는 일 안 하고 나만 쳐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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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래. 그러니까 쓸데없이 멍 때리고 있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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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나 쳐다보지 말고 일이나 똑바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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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말 안 해도 일 잘하고 있어.”

퉁명스럽게 말한 우영이 후루룩, 후루룩 소리를 내며 북엇국을 넘겼다.

딱히 혼자 멍 때린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물론 지훈이 다시 오고 나서 머리가 복잡해 간혹 멍하니 앉아 있기는 했었다.

근데 그게 그렇게 티가 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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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어려서부터 친구라더니 진짜 친해 보이네.”

아웅다웅하는 모습이 친근해 보였는지 승윤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두 사람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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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친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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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해인이랑 안 친합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차 부인하고 나섰다. 승윤이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확신을 담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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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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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이가 어렸을 때 나만 졸졸 쫓아다녔거든요.”

이번엔 우영이 선수를 치며 나섰고 해인이 곧바로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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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쫓아다녔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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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항상 진실을 외면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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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하겠냐.”

다시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는 승윤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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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이러다 정분나는 거 아니야?”

별 희한한 오해를 받는다 싶어 해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을 본 우영이 따라 웃는 그 순간 식탁 앞으로 큰 그림자 하나가 생겼다.

해인이 고개를 들어보니 식판을 든 지훈이 지나가다 말고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일행으로 보이는 임원이 같이 서 있었다.

몸은 정면으로 향한 채 고개만 돌린 지훈과 눈이 마주친 해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냥 웃었을 뿐이야.

그러니까 그냥 지나가.

해인은 마음속으로 빌었다.

여긴 식당이고 보는 눈도 많은데 이목이 쏠리는 건 정말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지훈은 그런 해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표정을 딱딱히 굳히고 째려보듯 우영을 보았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승윤은 자동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혹시나 정분나는 거 아니냐는 말을 들었을까. 사회생활 잘하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이렇게 꼬이나 싶어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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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장님! 식사하러 오셨습니까.”

팀장이 일어서서 인사를 하니 해인과 우영도 무작정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따라 일어선 두 사람이 차례로 묵례를 했다.

뭔가 기분이 상한 듯 무뚝뚝하게 보던 지훈이 단조롭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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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하시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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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부사장님도 맛있게 드십시오.”

승윤이 고개까지 숙이며 깍듯이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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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식사 잘하세요.”

지훈은 힐끔 해인을 한 번 더 쳐다보고는 일행의 뒤를 따라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하필 그 자리가 대각선에 위치해 있어 해인은 식사하는 내내 바늘방석이었다.

저 멀리 대각선으로부터 뜨거운 레이저가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어쩌다 한 번 쳐다봤는데 언제부터였는지 그가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다음부터는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알 수가 없다. 대충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얼른 식당을 빠져나왔다.

손이라도 씻을 겸 잠시 화장실로 향했다.

하지만 안에서 들려오는 여직원들의 말소리 때문에 그대로 멈칫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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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장님, 진짜 멋있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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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슈트가 너무 잘 어울려. 키가 한 187은 되는 것 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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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 같아요. 꼭 무슨 영화배우 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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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목소리마저 중저음이라 영화 대사인 줄 알았어. 식사 맛있게 하세요, 가 저렇게 섹시한 말이었어요?”

어색하게 귀밑머리를 매만지던 해인은 발걸음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커피도 마시지 않고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그저 멍하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이러니 멍 때리고 앉아 있다고 하는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이러는 건 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던 윤지훈 때문이라며 책임 전가를 하고 있던 그때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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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인 사원님. 잠깐 부사장실로 와 주세요.]

지훈에게서 온 문자였다.

주해인 사원님? 이름만 이렇게 쓰면 무조건 공적인 것이 되나?

해인이 재빨리 답신을 적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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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용무입니까.]

다음 메시지는 약간의 텀을 두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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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용무입니다.]

중요해? 나는 없는데?

부사장과 자신이 따로 중요한 용무가 있을 리가 없다.

입을 삐죽인 해인이 재빨리 메시지를 적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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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말해주세요.]

또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다음 메시지는 거의 협박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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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려가면 일이 복잡해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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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렇지.

누가 윤지훈 아니랄까 봐 금세 반말이네.

굳이 올라가 보지 않아도 중요한 용무가 아닐 것은 불을 보듯이 뻔했다.

아까 식당에서의 일 때문일 것이다.

근데 팀원들하고 밥 먹는 게 죄는 아니잖아. 설마 정분난다던 팀장의 말을 들은 걸까?

들어도 뭐, 어쩌라고.

그냥 웃자고 하는 말일뿐더러 지훈과는 이제 상관없는 말이었다.

굳이 피할 이유도 없다 생각하며 사무실을 나와 계단을 타고 부사장실로 향했다.

비서가 없으니까 누가 볼까 걱정되는 일이 없어 좋긴 했다.

부러 어깨도 펴고 허리도 곧게 한 채 당당히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지훈은 벌써 소파 상석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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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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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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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친구 보면서 활짝 웃던데, 즐거워 보이더라?”

하! 역시 아까 식당에서의 일 때문에 저러는 것 같은데 진짜 누가 볼까 무서웠다.

그럼 팀장의 말은 못 듣고 웃는 것만 가지고 저러는 건가?

해인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 냉랭히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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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일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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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나는 이게 중요한 일이야. 내가 말이야. 나름 해인이를 불편하지 않게 최대한 배려하고 있는데 해인이가 그런 식으로 행동해서는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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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뭘 어쨌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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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몰라. 진짜 모르겠어. 내가 뭘 잘못했는데? 해인이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훈을 바라보았다.

근데 저 남자 표정이 왜 저래. 갑자기 눈썹이 꿈틀거리며 얼굴도 붉어지고 심지어 콧김도 뿜어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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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질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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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 설마 내가 질투하길 바라고 그렇게 다른 남자를 보며 웃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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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그럴 리가 없잖아요.”

해인이 어이없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딴엔 남자가 아니라 친구이자 회사 동료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분별력이 없어진 지훈이 알아먹을 것 같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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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우리 해인이가 그럴 리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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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회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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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우리 주해인 사원이 그랬을 리가 없지.”

그거나 그거나. 우리, 를 빼야 하는 거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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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올려다보는 거 싫어하니까 좀 앉지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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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있습니다. 바로 내려가야 하니까 용건만 말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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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용건만 말할게. 앞으로 회사에선 아까 같은 그 웃음 좀 삼갔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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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제대로 웃지도 못하나요?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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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직원들이 일을 제대로 못 할 것 같아서. 주해인 씨 웃을 때 남자들이 밥 먹다 말고 다 우리 주해인 씨만 쳐다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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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누가 일을 못 하고, 누가 쳐다봤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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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봤어. 주해인 씨는 웃느라 몰랐겠지만. 그리고 난 지금 이 회사 부사장으로 하는 말이야.”

아닌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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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앞으로 주의해 줬으면 좋겠어.”

뭐라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해도 먹힐 것 같지도 않았다.

지훈의 지금 상태는 지독한 왜곡이 고착화되어 그 어떤 대화도 가능하지 않은 상태로 보였다.

어디 가서 적당히 비위 맞춰 주는 성격은 아니지만 빠져나가려면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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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만 내려가 봐도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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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은 하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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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뭐. 그러도록 하죠.”

원래부터가 실실 웃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서 크게 어려울 것도 없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웃을 때 지훈이 나타날 상황도 확률적으로 높지 않고.

해인이 몸을 돌려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아니, 근데 나는 너 때문에 화장실도 못 가고 다른 층에 있는 화장실 다녀왔는데 너는 뭐가 그렇게 당당해?

생각해 보니 억울했다.

해인이 다시 돌아섰다.

그 순간 성벽처럼 견고한 남자의 가슴과 마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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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깜짝이야.”

아니, 이 남자는 대체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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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예요? 내가 전에도 말했잖아요. 사람이면 발소리는 내고 다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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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나는 문 열 줄 몰라서 서 있나 해서, 문 열어 주려고 왔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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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열 줄 알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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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왜 서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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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깔고 말하지 마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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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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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쫘악 깔지 마시라고요. 듣기 거북하니까. 부사장님도 조심하라고, 그 말 하려고 했어요.”

듣기 거북해?

지훈은 자신이 방금 대화하며 너무 목소리를 깔았나 싶었다.

딱히 거북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뭐, 해인이 싫다면 어쩔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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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잘될지 모르겠지만 노력은 해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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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그럼.”

해인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등 뒤로 잘 가, 라는 지훈의 인사가 들려왔지만, 대꾸도 하지 않고 내려왔다.

차마 영화배우 같아서라는 솔직한 말을 하진 않았지만, 그의 중저음은 정말 너무나 매력적이다. 얼굴과의 시너지 효과가 장난 아닌 까닭에 그 역시나 여직원들을 위해 절제할 필요는 있었다.

여직원들 마음 싱숭생숭하게 해서 일을 못 하게 되면 회사에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니 이것 또한 회사를 위한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 봐도 이 미묘한 기분 나쁨이 질투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해인은 착잡했다.

이런 마음이 든다 해도 감추어야 하는 상황에서 지훈과 똑같이 대응하고 말았다.

참았어야 했다.

지훈의 도발에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무너지는 것도 한순간이라는 생각에 해인은 애써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 맸다.

* * *

그 후 며칠 지훈의 눈치가 보이기는 했다.

어쩌다 웃고 나서는 주위를 둘러보는 습관도 생겼다. 딱히 지훈과 마주칠 일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긴 했다.

그렇게 미국으로의 일정이 잡혔다.

출장이라고 하지만 전남편과 가는 것이라 해인은 여러모로 민망했으나 지훈은 너무나도 쿨해 보였다.

물론 그 쿨함도 줄리아가 미리 예약한 호텔의 스위트 룸을 확인한 순간 사라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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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나도 모르는 일이야.”

수영장이 딸린 스위트 룸은 침실이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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