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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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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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2022.04.24.
“난 지훈 씨가 다 알아서 하는 줄 알았죠.”
“그렇긴 한데 줄리아가 이럴 줄은 나도…….”
애매하게 말끝을 흐린 지훈이 머리를 긁적였다.
난처하면서도 왜 자꾸 입꼬리가 휘는지 표정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해인은 그런 지훈을 보며 한숨만 푹 내쉴 뿐이었다.
누구를 탓하랴.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우리 해인이는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지.
“지금이라도 빈 객실 있나 알아봐야겠어요.”
“내가 이미 알아봤는데 빈 객실이 없다고…….”
“와! 철두철미하시네요.”
해인은 그가 고의로 이런 짓을 벌였다고 생각지 않으면서도 부러 죄책감을 자극했다.
“오해야. 이건 정말 오해라고. 나는 정말 몰랐어.”
지훈은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찔리는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줄리아가 자신이 초대했으니 호텔을 예약해 주겠다며 선의를 비쳐왔을 때 지훈은 굳이 해인과의 변한 관계를 설명하지 않았다.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해당할 수 있는 죄이긴 했다.
“침대가 세 사람이 자도 넉넉할 정도로 크던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해인이 지훈을 노려보았다.
흠칫한 지훈이 금세 꼬리를 내렸다.
“내가 소파에서 잘게.”
“다른 스위트 룸은 침실도 여러 개던데.”
“대신 여긴 테라스에 전용 수영장이 있잖아.”
“나는 물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일단 쉬어. 여기 레스토랑도 예약되어 있더라고. 같이 저녁 먹자.”
해인은 더는 이 문제로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다. 2박 3일의 빠듯한 일정이니 사실 호텔에 있을 시간도 많지 않았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줄리아라는 이름만 들어도 반응하는 자신일 것이다.
호텔 레스토랑은 야경이 너무나 근사한 곳이었다.
날이 적당히 따듯한 탓에 두 사람은 야외 테라스에서 손도끼 모양의 스테이크와 줄리아가 특별히 주문해 준 와인을 함께 마셨다.
“근사한 저녁이야.”
“그러네요.”
“해인이랑 함께 있어서 더 그래.”
“입 다물고 먹기나 하세요.”
“그래.”
“…….”
“아, 근데 입은 열고 먹어야지.”
“요즘 들어 재잘재잘 말이 많아졌어요. 부사장님.”
“미안.”
뭔지 모르게 지훈은 기분이 좋고, 해인은 묘하게 언짢은 그런 상황이었다.
멀리 해가 지는 풍경에 창문 주위가 붉게 물들었다.
미국의 태양이라고 다를 리 없건만 해인은 괜스레 가슴이 뛰고 이제껏 옭아매던 뭔가로부터 자유로워진 기분이 들었다.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지훈과 같이 있음에도 이전보다는 편안했다.
“일은 어때?”
“재밌어요. 근데 솔직히 디자인 공부 더해서 디자이너가 되고 싶긴 해요. 회사는 전문경영인이 경영해도 되니까.”
“장인어른은 생각이 다르던데?”
지훈은 부러 주 사장을 장인어른이라 불렀다. 앞으로도 그 호칭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패션 회사니까 디자이너가 오너가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은데…….”
“그렇더라도 회사가 안정되면 난 디자인에만 집중하고 싶어요.”
“욕심이 너무 없는 거 아니야?”
“욕심이 없다기보다는 관심 분야가 다른 것이겠죠. 줄리아처럼 이름 자체가 브랜드가 되고 패션이 되어서 뉴욕에서 패션쇼까지 하면 원이 없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내년 신상품 낼 때는 블라인드 품평회에 한 번 참여해 보고 싶기도 해요.”
“그거 좋겠네. 순수하게 실력으로 인정받는.”
식사는 아주 천천히 이루어졌다.
지훈과 함께 개방된 자리에서 식사를 하면서도 부담스럽지 않다는 것이 해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태평양을 건너오니 그가 마치 보호자나 되는 것처럼 든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지훈이 유난을 떨며 자신이 없을 땐 혼자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해서 더욱 그렇기도 했다.
“이제 쉴게요. 지훈 씨도 쉬어요.”
식사를 마치고 룸으로 돌아온 해인이 다시 선을 그었다.
못내 아쉬워하는 지훈의 표정을 보면서도 해인은 그대로 침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샤워를 하고 나서 잠깐 침대에 누운다는 것이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시차 때문인지 머리가 멍하고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밖에서 첨벙첨벙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일어나 보니 벌써 밤이 깊어 있었다.
옷걸이에 걸린 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와보았다.
거실을 지나 테라스로 나오자 반바지만 입고 수영을 하는 지훈의 모습이 보였다.
‘우와. 무슨 황금이야. 빛이 나네. 빛이.’
벗은 그의 몸이 조명을 따라 빛나는 모습이 영락없이 황금이었다.
물방울이 맺혀 반질거리는 모습조차도 예술이었다.
쭉쭉 뻗어 나가는 팔 또한 어찌나 힘찬지 수영 선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짜 잘 빠졌다.’
굴곡진 라인을 자랑하는 내실 있는 근육들이 물질을 할 때마다 탄력 있게 움직였다.
해인은 감탄하듯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남자가 제 남자였었는데 이제 좀 아깝게 되었다 생각하며 아쉬워하던 찰나였다.
그가 물 한가운데서 일어서더니 자신을 향해 정면으로 서는 것이 아닌가.
해인은 당황하지 않고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돈 주고도 못 볼 좋은 구경 했다는 듯.
지훈은 두 손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고는 해인을 똑바로 응시했다.
푸른 조명 아래 잘생긴 남자가 거의 헐벗은 채로 젖어 있는 풍경은 신비로웠다.
그가 활짝 웃으며 해인을 바라보았다.
“들어올래?”
“아니요.”
저렇게 멋있는 남자를 본 것으로 만족한 해인이 돌아서서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서너 걸음도 가지 못해 지훈에게 붙잡혀 버리고 말았다.
지훈은 순식간에 해인을 안아 수영장 한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졸지에 물에 빠진 해인이 중심을 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수온이 적당해서 춥지는 않았지만, 갑작스레 젖으니 기분이 묘해졌다. 사람을 다짜고짜 이렇게 물속에 던지면 대체 어쩌라는 건지…….
“아으. 윤지훈 진짜.”
“윤지훈? 오빠한테 어디서!”
“오빠 같은 소리 한다. 넌 이제 죽었어.”
해인이 잔뜩 미간을 구기며 지훈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치마처럼 부풀어 올라 무거워진 가운부터 벗어 던졌다.
가운을 벗자 딸기 파자마 잠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딸기를 여기까지 가져왔어?”
“이만한 잠옷을 못 봐서.”
“야할 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건 좀 웃기잖아.”
뭐가 어째? 야할 거라는 기대를 네가 왜 하는데…….
해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뭔 헛소리야!”
“그냥 그렇다고.”
“지금 그런 것이나 따지고 있을 여유가 없을 텐데…….”
픽 웃은 해인이 그를 향해 물 따귀를 날렸다.
얼떨결에 물 따귀를 맞은 지훈이 얼얼한 표정으로 해인을 바라보았다.
해인은 사정 두지 않고 다시 한번 그에게 물 따귀를 날렸다.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 아주 격렬하게.
지훈은 큰 소리로 웃으며 잠자코 그 물을 다 맞아 주었다.
“하하하. 즈해이, 뒤감……당으 어……뜨케 하려고 그르냐.”
손으로 얼굴을 막은 건 아니지만 고개는 비스듬히 돌아가고 안면이 잔뜩 찡그려져 발음이 자꾸 샜다.
결국 해인이 먼저 지쳤고 지훈이 눈을 감고 있는 틈을 타서 도망치려 했지만, 허사로 돌아갔다.
어느 틈에 다가온 지훈이 뒤에서 그녀를 꼭 안고 놓아 주질 않았다.
“다 했냐. 주해인?”
“다 했으니까 들어가 보려고요. 아까도 말했지만, 물을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반말은 왜 안 하시나?”
내가 치고빠질 때를 아주 잘 알거든. 태평양을 건너와 조금 들뜨긴 했지만 해인은 이제 여기까지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음……, 위기를 느껴서?”
“알긴 아네. 지금 위기라는 걸.”
“…….”
“잠시만 이렇게 있자. 금방 놔줄게.”
지훈이 숨을 들이마시며 해인의 목 언저리에 고개를 묻었다.
불시의 접촉에 해인은 물속에서도 온몸의 신경이 곤두섬을 느껴야 했다.
위기라는 것을 좀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나.
태평양을 넘어왔어도 지훈이 여전히 제게 집착하는 전남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는데 너무 긴장을 풀어 버렸다.
“이러지 말아요.”
“잠시만…….”
물속에서도 서로의 체온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적나라한 숨소리가 귓가를 맴돌고 해인은 뛰는 가슴을 억누르느라 맘 놓고 숨을 쉴 수도 없다.
허리를 두른 그의 두 손이 출렁이는 물결을 따라 움직일 땐 가슴이 터지는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이 자세는 너무 위험했다.
“피곤해요. 들어가서 자야겠어요.”
“그래.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거칠 것이 없던 남자는 어느새 절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중저음으로 깔린 관능적인 목소리 탓에 해인은 더 긴장되고 말았다.
이 남자가 함부로 목소리 깔지 말라고 했더니 여전하네.
“편하게 자. 네가 원하지 않는 한 그 방문을 여는 일은 없을 거니까.”
해인은 간단한 대답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 당연한 것을 무슨 배려라도 되는 양 말하는 것에 동의할 수도 없었지만, 사실은 가슴이 너무 떨린 탓이었다.
침대 위에 누워 잠을 청하면서도 여전히 그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잠재워지지 않는 설렘은 그 밤 내내 해인을 괴롭혔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자다 깨면 찌르르 가슴이 떨리는 아슬아슬한 밤이었다.
* * *
패션쇼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67층의 빌딩이었다.
15층에서 쇼를 진행하고 한 층 아래에서 디너 파티가 열릴 예정이었다.
이른 시간부터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오전에 라이센스 수수료 관련 계약을 마치고 돌아온 지훈이 해인과 함께 패션쇼장으로 향했다.
검은 슈트를 입은 지훈과 은은한 파스텔 톤의 원피스를 입은 해인은 선남선녀처럼 잘 어울렸다.
해인은 아는 사람이 없어서 인사할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지훈은 줄리아를 비롯한 몇몇 인사들과 유창한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지훈이 멋있어 보여 해인은 은근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런웨이 쇼가 끝난 후 지훈과 함께 디너 파티장으로 향했다.
모델들이 선보인 옷과 그녀들의 워킹까지 모든 면에서 뛰어난 행사였다.
줄리아를 만난 해인은 쇼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초대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옷들이 자유분방하면서도 고급스러웠어요.”
“고마워요. 이번 컬렉션 기획하면서 기술적인 드레이핑에 많은 시간을 들였어요. 파트너와 함께 원단공장도 직접 방문하면서 맨해튼 거리를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몰라요.”
“그래서 이렇게 멋진 쇼가 탄생한 거네요.”
“해인 씨가 여기 뉴욕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갔으면 좋겠어요.”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워낙 유명인사라 짧게 인사를 나눈 줄리아는 영화배우로 보이는 한 여자와 함께 사라졌다.
지훈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슈트를 입은 한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본 해인이 지나가는 웨이트리스에게 음료 한 잔을 받으려던 찰나였다.
“저기, 잠깐만요.”
갑자기 들려오는 한국말에 해인이 놀라 뒤를 돌았다.
해인의 눈앞으로 모자를 쓴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어?”
* * *
분명 해인을 본 것 같았는데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시야에서 해인을 놓치지 않았었는데 잠깐 사이에 없어졌다.
지훈이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꺼져 있다.
아마 아까 꺼두었던 핸드폰을 아직 켜지 않은 모양이었다. 처음엔 근처에 있겠거니 하고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화장실도 가 보고 한층 아래에도 내려가 보고.
심지어 한층 더 올라가서 카페도 뒤져보고 레스토랑도 찾아보았다.
아무리 찾아도 없어 잠깐 바람을 쐬러 갔나 싶어 아예 1층으로 내려가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해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헤맨 시간이 한 시간이 넘었다.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돌아왔나 싶어 파티장으로 다시 와보았지만, 해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불안을 넘어 점점 가슴이 타들어 갔다.
뉴스에서 보았던 인종차별, 아시아인을 향한 테러 등등의 안 좋은 일만 떠올랐다.
순간적으로 911이라는 숫자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갈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