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밀회.
(40/92)
44. 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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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밀회.
2022.05.01.
지훈은 해인의 허리를 잡아 올려 난간 쪽으로 앉혀 주었다. 그러고는 단숨에 뛰어올라 해인을 안고 곧장 침실로 걸어갔다.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오솔길처럼 따라붙었다.
거침없던 걸음과 달리 해인은 사뿐히 침대에 눕혀졌다.
젖은 몸이란 것을 알면서도 망설임은 없었다.
마음은 급하고 손은 더 급하고.
하지만 젖은 드레스가 쉽게 벗겨질 리 없었다.
숭고하던 의식과도 같이 떨리는 손길이 수없이 해인의 몸에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내쉬는 해인의 달뜬 숨이 지훈을 더욱 타오르게 했다.
재회는 뜨거웠고 거침이 없었으며 온전히 하나가 되어 그 밤 내내 이어졌다.
.
.
.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의 넓은 품이 그리웠고 그의 따스했던 눈동자가 보고 싶었고 제 이름을 불러주던 듬직한 목소리도 다시 듣고 싶었다.
끊임없이 밀어내도 다가오는 남자가 있다는 것이 마음을 든든하게 해 주었던 것일까.
그가 다시 돌아왔던 날부터 마음속은 늘 파도가 치는 것처럼 어수선했었다.
“무슨 생각해?”
은근히 속삭이는 지훈의 목소리가 해인의 상념 속으로 끼어들었다. 해인이 체념한 듯 말했다.
“나는 왜 이렇게 항상 무너지나.”
“좋은 생각이네.”
“나는 왜 이렇게 줏대가 없나.”
“그것도 좋아.”
“이런 어이없는 남자가 뭐가 좋을까.”
“다 좋아.”
지훈의 웃음소리가 호탕하게 이어졌다. 저는 심각한데 웃고 있는 남자를 보니 왠지 얄밉다.
“웃지 말아요. 난 심각하니까.”
“날 아주 많이 좋아하나 봐. 우리 해인이가.”
아마도 정답이 아닐까.
해인은 굳이 부인하지 않고 괜한 한숨만 내쉬었다. 잠이나 자야겠다 싶어 눈을 감는데 잠이 올지도 의문이었다.
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제 몸을 휘감고 있는 남자가 계속해서 여기저기 만지는 까닭이었다. 오랜만이라 이해는 하지만 그 정도가 좀 더 심해진 것 같아 걱정이었다.
“아무래도 뭔가에 홀린 것 같아.”
“미국에도 구미호가 있나?”
“뱀파이어는 있겠죠.”
“난 피를 싫어해.”
느긋이 말한 지훈이 해인의 이마에 쪽 하며 입을 맞추고는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머리는 팔베개로, 몸은 다른 한쪽 팔로, 다리는 지훈의 굵고 긴 다리로 휘감겨 있는 상태였다.
도망갈 곳이 없는지라 이런 입맞춤을 수도 없이 당하고 있었다. 서서히 머리 쪽이 불편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혹시, 어제도 일부러 수영했나요?”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었어. 하다 보니 물소리를 크게 내려고 엄청 노력하긴 했는데, 솔직히 내 생각보다는 늦게 나오더라고.”
“하! 진짜 못 말려.”
해인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수영하는데 첨벙거리는 소리가 그렇게 요란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속절없이 무너져 안겨 버린 건 결국 제 선택이었다.
이렇게 안겨 버릴 것을 그동안은 왜 그렇게 힘들게 했을까. 홀로 그 시간을 버티게 한 것이 못내 미안해졌다.
“내가 많이 미웠을 것 같아.”
“밉다기보다는 서운했지. 그래도 다 이해할 수 있었어. 너로선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네가 왜 헤어지자고 했는지 아니까. 그래서 잠깐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어.”
“미안해요. 결국 이렇게 될 것을.”
“괜찮아. 조금 힘들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사실 네가 정말로 날 밀어내 버리면 어떡하나, 정말로 잊어 버렸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어. 그저 이렇게 다시 받아줘서 고마울 뿐이야.”
더 아프고 힘들었을 해인으로 인해 힘들다는 것 자체도 사치로 생각하며 견뎠었다. 하지만 지훈에게도 그 시간들은 아픔이고 고통이었다.
멀리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어디 있는지도 알았지만 다가서지 못했던 그 시간들을 견뎌내며 나름 돌아갈 길을 찾느라 얼마나 애를 썼던지…….
그러다 생각해 낸 방법이 엘브의 부사장으로 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부친을 설득하는 과정도 쉽지는 않았었다.
“헤어지고 나서 한순간이라도 날 잊어본 적 있어?”
“말 안 할래요.”
“없구나.”
“있거든요.”
“없는 거였어. 하하.”
지훈의 웃음소리가 조롱하듯 귓전을 울려왔다. 입을 삐죽인 해인이 그대로 지훈의 품을 빠져나와 딸기 잠옷을 챙겨 입었다.
최소한의 방어 모드를 취한 셈이다.
“입어도 소용없을 텐데.”
지훈이 못마땅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다시 제 품으로 들어오는 해인을 안고 볼을 쓰다듬었다.
“이제 자요.”
“그래.”
“자꾸 만지니까 간지럽잖아요.”
“익숙해질 거야.”
이런 게 익숙해지려면 얼마나 더 간지러워야 할까.
해인은 포기하듯 눈을 감았다.
행복에 겨운 게 이런 것일까 싶어 투정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은 생각과 함께 가슴 저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어떤 아픔이 울컥 치밀어올랐다.
그것을 떠올리자마자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으흐흑.”
갑자기 터진 눈물에 당황한 것은 지훈이었다. 그러나 그 눈물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생각하지 마.”
“뭐……, 를요?”
“우리 보물이 생각하는 거잖아.”
“어떻게, 흐……윽, 알아요?”
“울음이 다르잖아. 행복해서 우는 것과 마음이 아파서 우는 거는.”
슬픔의 무게가 실린 말이었다.
해인처럼 눈물을 흘리진 않지만 그 역시도 울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함께해야 했던 시간들을 함께하지 못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어떤 이유가 있다 한들 그에게 행해졌던 가혹한 아픔이 작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안해요. 우리 보물이 잃고 지훈 씨도 힘들었을 텐데 내가 매몰차게 대해서.”
“네가 뭐가 미안해. 다 내 탓이야. 그러니까 미안해할 필요 없어.”
“혼자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서……, 으흑.”
“나는 너만 괜찮으면 상관없어. 이제 힘든 일 없게 할 거니까 그만 울어.”
사랑했던 존재를 떠나보내는 일은 힘든 일이었다.
닿을 수 없는 어떤 곳으로의 이별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 힘든 과정을 함께하지 못했던 것도 우리에겐 형벌이었을지 모른다.
해인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가혹했고 지훈은 그 가혹함의 동반 피해자였다.
어떤 위로로도 남겨진 아픔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해인은 이제 그 아픔을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이유가 또렷해질수록 지훈과의 헤어짐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응어리를 토해내듯 서럽던 울음이 점점 잦아들었다.
지훈은 내내 해인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고 해인은 그 위로 속에서 점점 안정을 찾아갔다.
“나 우리 아파트 들어가도 돼?”
“안 돼요.”
“왜?”
“기다려요.”
“또 기다려야 해?”
“준비할 시간을 줘요.”
“무슨 준비?”
한고비를 넘기니 또 하나의 산이 나타났다.
힘들지만 지훈은 이제 나름 해인을 알 것 같았다. 자신보다는 훨씬 생각이 많고 이래저래 주변의 상황도 예민하게 신경 쓴다는 것을.
하여 답을 재촉하지는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해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훈 씨는 환영받지 못하는 곳에서 사는 기분이 어떤 건지 모르죠.”
“환영?”
“난 그런 곳에서 20년을 살았어요. 그 삶이 얼마나 지긋지긋했는지,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
“…….”
“그때 결심했어요. 이곳을 나가면 다시는 내가 환영받지 못하는 곳에서 살지 않을 거라고.”
새엄마 밑에서 자랐던 순간들은 여전히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너만 없으면 돼, 너만 사라지면 우리 가족은 아무 문제 없어, 라는 말을 수시로 들으면서 자란 해인은 가족이라는 말을 신뢰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 사람들과 섞이는 것이 두려움으로 남아 있었다.
“우리 부모님들은 내가 알아서 해. 아버지는 이미 내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아셨고. 내가 부사장으로 온 것만 봐도 모르겠어? 내가 다 알아서 할 거니까 그 부분은 걱정 마.”
“난 그 부분을 지훈 씨가 해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지훈 씨가 나선다는 건 본질을 덮을 뿐이에요.”
“그건…….”
“이건 내 문제예요. 그러니까 내가 해결하게 해 줘요.”
지훈이 하는 말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와의 헤어짐을 생각할 때도 그를 못 믿어서는 아니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물러남이 마땅했던 것이다. 물러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결국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었다.
지훈의 모친인 애란을 생각한 해인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해관계에 밝긴 하지만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나마 그것이 한 줄기 희망이었다.
“그러니까 당분간 우리 관계는 비밀로 하고 기다려 줘요. 그럴 수 있죠?”
“은밀하게 만나는 건 괜찮지?”
해인은 은밀한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손과 다리로 옭아맨 것도 부족해 다시 이마에 입을 맞춘 지훈이 서서히 영역을 넓혀갔다. 눈과 코와 입술과 목을 차례로 점령당하며 해인은 또다시 찾아올 희열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잠은 비행기에서 자야겠다.
* * *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심 대리로부터 소문이 무성하다는 것을 들었다.
부사장과 사주 딸이 다시 만난다는…….
둘이 미국 간 것 보면 뻔하다는 둥 분명 미국에서 무슨 일이 있을 거라는 둥.
듣고 보니 뜬소문도 아니었다.
아니 땐 굴뚝은 더더욱 아니고.
이런 걸 땐 굴뚝에 연기 난다고 하는 걸까.
좀 심하게 때기도 했잖아.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화르르 붉어져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아무 말도 못 들은 척 일에만 열중했다.
일이라도 해야 민망함이 가실 것 같아서.
그런데 소문의 또 다른 당사자는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아침부터 메시지 창이 난리가 아니었다.
보고 싶다, 미국이 그립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국에서 살 걸 그랬다는 등등.
그러다 오후가 지나갈 즈음 뜸하다 싶더니 퇴근할 때가 되니 또다시 문자가 왔다.
[커피 마시고 싶다.]
간단하게 답을 해 주었다.
[마셔요.]
[둘이 같이.]
[바쁩니다.]
이 정도면 정신을 차렸겠지 싶었는데 황당한 문자가 돌아왔다.
[나는 인내심이 별로 없다는 것을 참고할 것.]
보통 이런 것을 협박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해인은 적어도 그렇게 느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탕비실로 가서 커피믹스 한잔을 탔다. 오후에는 카페인을 선호하지 않지만 뭐, 내가 마실 것은 아니니까.
그래도 일단 제가 마시는 것처럼 살짝 입술에 대면서 사무실 문을 나섰다.
등 뒤로 느껴지는 의심의 눈초리들을 가뿐히 무시하며 계단을 타고 부사장실로 향했다.
도둑 밀회처럼 느껴져 아슬아슬 가슴이 떨렸다. 마중이라도 나온 건지 부사장실 문을 열자마자 지훈과 마주했다.
활짝 웃는 그의 모습에서 다시 한번 우리가 재회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잡식성이라 이것저것 다 마시는데 부사장님은 어떠실지?”
“아무렴 어때. 우리 해인이만 있으면 상관없어.”
“이게 좀 달달하거든요.”
“나도 달달한 거 좋아해.”
“그래요? 다행이다.”
지훈이 한 손으로 커피를 받고 남은 한 손으로는 해인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았다.
그러더니 커피는 마시지도 않고 테이블에 내려놓고 입술에 뽀뽀부터 했다.
“이게 더 달달할 것 같아서 일단 먼저 한입.”
“진짜 못 말려.”
투정하는 입술에 또 한 번.
그리고 잠시 떨어지는가 싶더니 입술을 포개며 격렬히 몰아붙인다.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 싶었지만 해인에게도 그리운 입술이었다.
어쩔 수 없이 뜨거워지는 건 피차 마찬가지였다.
사무실에서 서로의 입술을 탐하며 손의 위치를 정하는 것은 약간 곤욕이었다.
해인이 방어적인 자세를 취해 보았지만 수세에 몰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필 리본 블라우스에 치마를 입었는데 손이 슬금슬금 허벅지를 타고 올라왔다.
그 아찔한 감각에 놀란 해인이 정신을 차리고 지훈을 밀어냈다.
“한 입만 한다면서요.”
“시작은 늘 그렇지.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고.”
지훈이 한쪽 팔로 해인의 허리를 휘감으며 바짝 끌어당겼다. 다시 시작을 알리듯.
그때였다. 혹시 몰라 챙겨왔던 해인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을 확인한 해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안형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