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갈증. 2022.05.08.
띠링. 전화는 아무 대꾸 없이 끊어졌다. 기가 찬 지훈이 다시 걸어보았지만 이미 꺼진 핸드폰이었다. 일단 번호를 스캔한 지훈이 잠잠히 해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설명을 요구하는 그 눈빛에도 해인은 난처한 듯 얼굴을 붉힐 뿐이었다. 묻지 않고 짚이는 구석이 있는 것으로 말해보았다.
“혹시 이 새끼가 네 인생을 엿 같다고 생각하게 한, 그놈이야?”
어깨를 으쓱하며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인 해인이 멋쩍게 웃었다. 딱히 부인할 생각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자세히 말해주고 싶은 일도 아니지만.
“무슨 일인데, 이런 협박을 당해?”
“뭐라던가요?”
“제 놈 전화 피하면 좋을 일이 없다고 하던데, 계속 이런 연락 받고 있었어?”
“지훈 씨까지 신경 쓸 일 아니에요. 별일 아니니까 잊어버려요. 어차피 이제 다 끝난 일이에요.”
“끝난 게 아닌 것 같은데?”
누가 봐도 끝난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이 밤에 전화할 정도면 심각한 일이 아닌가. 지훈은 뭐라 말 좀 해 보라는 듯 재촉하는 눈빛으로 해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해인은 답을 회피하고 그의 품에 안겨 버렸다. 그녀를 품에 안은 채로 지훈은 생각했다. 해인이 말할 생각이 없으니 따로 알아봐야겠다고.
“근데 어디서 와요? 퇴근하다 온 차림은 아닌 것 같은데…….”
“본가로 들어갔어. 점수 좀 따려고.”
“좋아하셔요?”
“어머니는 뭐 하러 왔냐고 그러시고 아버지는 앞으로도 쭉 들어오라고 하시고.”
그 모습이 절로 상상이 되는지라 해인의 입가로 웃음이 번져갔다. 물론 오래가지 못했지만.
“아니, 그럼 다시 나온 줄도 아시는 거예요?”
“운동하러 나간 줄 아실 거야. 정원에서 운동하고 있었거든.”
“무슨 운동을 이렇게 오래 하나 싶겠어요. 얼른 들어가요. 내일 아침에 다 들통나기 전에.”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닌데 뭘.”
지훈이 해인의 입술을 가볍게 머금으며 두 팔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얼마나 꼭 껴안는지 어깨뼈가 아플 지경이었다. 갈증을 해소하지 않으면 지훈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해인은 좀 더 편한 장소를 택하기로 했다.
“안방으로 가요.”
. . . 눈꺼풀이 무거워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분명 잠을 잔 것 같았는데 잠을 잔 것 같지가 않았다. 묵직하게 제 허리를 휘감은 지훈의 허벅지 탓에 피가 잘 통하지 않았나 보다. 다리도 저리고 잘 단련된 근육질에 닿아 있는 몸도 미끈거리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지만 보이는 게 별로 없었다. 아직 날도 밝지 않은 것 같은데……. 옆구리가 너무나 간지러웠다. 뭔가가 기어 다니는 듯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지훈의 손 때문이었다. 기척을 느꼈는지 이번엔 키스하기 시작했다.
“으읍, 자, 잠시만. 몇 시예요?”
“더 자.”
“더 자라면서 자꾸 무슨 짓인데요.”
“간다는 말, 하고 가려고. 가서 출근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럼 얼른 가요. 키스 좀 그만 하고.”
“가야 하는데 이게 자꾸 발목을 잡네.”
“원 없이 했으면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아직 멀었어.”
“아으. 지훈 씨, 오늘 나도 출근해야 해요. 살려 줘요.”
해인의 말투는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가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몸을 일으킬 수 없었던 지훈이 가까스로 침대를 벗어났다.
“회사에서 봐.”
“회사에서는 일해야죠.”
“그래도 잠깐은 볼 수 있잖아.”
“얼른 가요. 나는 더 잘래요.”
문밖을 나서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지훈은 다시 한번 해인의 입술에 입맞춤을 하고 나서야 안방을 벗어났다. 얼굴엔 여전히 아쉽다는 표정을 한가득 짓고선. 얼른 같이 살아야 이런 번거로움이 사라질 텐데……. * * * 해인은 종일 몽롱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잠을 못 잔 것도 그렇지만 몸 여기저기가 몸살이라도 난 것처럼 아팠다. 커피라도 한잔 더 마셔야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서던 찰나였다.
“해인 씨. 이거 부사장님께 가져다드려요. 올해 마케팅 자료인데 검토하시고 우리 회의하실 때 참고하시라고.”
“꼭 제가 가야 하나요?”
해인이 탐탁지 않다는 듯 웅얼거렸다. 가면 또 붙잡혀서 뭔 짓을 당할지 몰랐다. 그러나 일전의 실수를 만회해야 하는 승윤으로선 그런 해인의 마음을 배려해 줄 생각이 없었다. 심 대리와 우영을 번갈아 바라본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우린 다들 바빠서.”
뭔가 답이 정해진 듯한 이상한 상황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해인이 파티션 너머의 우영을 향해 말했다.
“우영아! 너 안 바쁘지?”
“어. 나 안 바빠. 이리 주세요. 제가 갑니다.”
재빨리 일어난 우영이 쪼르르 승윤에게로 달려왔다. 이럴 땐 역시 베프 뿐이다 싶어 해인이 피식 웃었다.
“안 돼. 이건 해인 씨가…….”
“제가 갑니다.”
승윤이 말려 보았지만, 서류는 이미 우영의 손으로 넘어갔고 벌써 문을 나서는 중이었다. 뭔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문 쪽을 바라보던 승윤이 쯧, 하며 혀를 찼다. 사회생활을 잘 못 하는 우영의 미래가 훤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지나가던 직원들 몇몇이 안쪽을 바라보며 수군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승윤은 오늘따라 직원들이 왜 저러나 싶었다. 아까 잠깐 화장실을 갔는데 뭔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듯 자신이 들어오자마자 이야기를 멈추는 것 같기도 했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인가. 승윤이 고개를 갸웃하던 그 찰나 부사장실로 향했던 우영이 돌아왔다. 모두가 총알 같은 그 속도에 놀라고 말았다.
“우영 씨, 벌써 다녀왔어?”
놀란 심 대리가 우영을 향해 물었다.
“네. 잘 전해 주고 왔습니다.”
우영이 덤덤히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해인이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그 순간, 늘 한 번씩 들르던 민서가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오더니 이번엔 우영이 아닌 심 대리에게로 향했다. 멋쩍게 주위를 한번 살피고는 이내 그녀에게 귀엣말을 하고는 급히 나가 버렸다. 민서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은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얼굴을 굳힌 채 마우스를 움직여 모니터를 보던 그녀가 작위적으로 깜짝 놀라며 해인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해인 씨, 잠깐 이것 좀 봐야 할 것 같아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어 보였다. 해인이 서둘러 그녀의 자리로 향했다. 모니터 화면에 인트라넷 익명게시판이 열려 있었다. 은진은 사주 딸의 폭력과 이중성이란 제목의 글을 클릭했고 그 글에는 사주 딸, 이래도 되는 것인가라는 짤막한 내용과 함께 두 개의 동영상 파일이 있었다. 은진이 음성파일을 재생시켰다.
『“이 손 못 놔?”
“내가 아직도 어린아인 줄 아세요?”
“뭐가 어째?”
“언니, 너 미쳤어? 빨리 그 팔 안 놔?”
“너, 너 어디서 이런 돼먹지 못한 것이…….”
“내가 진즉에 새엄마 멱살 한번은 잡았을 거예요. 꿈 깨세요. 이 회사는 내가 가집니다.”
촤악!
“이젠 너하고도, 정말 끝이야.”
촤악!
“이건 네 엄마 몫이야.”』
음성파일은 해인이 세나를 다시 때리는 것까지였다. 아! 이건 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이런 걸 악마의 편집이라고 하는구나. 기가 막힌 해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새엄마가 누군가에게 지시한 일일 것 같았다. 함께 듣던 세 명의 동료들도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우영은 누구보다도 해인을 믿었다. 이건 조작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럴 만하니 그랬을 것이라 생각했다. 해인은 말없이 다음 파일을 열었다.
『“세나를 때린 건 무모했어.”
“세나랑 연락하지 말아요. 그 파일 공개 안 할 거죠?”
“왜 그렇게 생각해?”
“공개할 거였으면 진즉 공개했겠죠.”
“내가 결혼하자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생각해 볼게요.”
“확답은 안 하네?”
“시간이 필요해요.”
“왜? 윤지훈한테 제대로 데였나? 잠깐 다시 같이 산 것으로 아는데. 아무래도 윤지훈이 성에 차지 않았나 봐?”
“그런 쓰레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이건 더 최악이었다. 두 번째 파일로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이 파일을 올리도록 사주한 배후에 안형준이 있다는 것을. 이 미친 자식. 세나와 연락하는 것뿐만 아니라 새엄마와도 연결 고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밉기로서니 새엄마는 왜 회사에 전혀 득이 되지 않는 일까지 꾸미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세나를 때린 건 사실이니 앞으로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녀야 할까. 이건 누가 봐도 자신이 저격당한 상황이었다. 해인은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해인 씨, 괜찮아? 그, 머리카락 너무 세게 잡으면 머리 빠지는데…….”
심 대리가 나름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정작 해인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사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던 그 찰나, 지훈의 얼굴이 뇌리를 스쳐 갔다. 지훈도 이 음성파일을 들었을까. 열어봤다면 연락이 왔을 것 같은데 지금까지 소식이 없는 걸 보면 못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설마 듣더라도 오해 같은 건 안 하겠지? 제 자리로 돌아온 해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며 고민에 빠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자료를 우영에게 넘기지 말고 직접 다녀올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 . . 그 시각 지훈도 인트라넷에 올라온 음성파일을 듣고 있었다. 사실 모르고 있었는데 마침 들어오던 하 비서가 직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며 알려준 것이었다. 첫 번째 파일을 들은 지훈이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와우! 우리 해인이 이렇게 멋져도 되는 거야?”
이미 세나를 때린 것은 알고 있었기에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단지 이 회사 내가 가집니다, 에서 폭발하는 해인의 카리스마에 반했을 뿐이다. 상진은 해인이 누군가의 뺨을 때린 것에 심히도 놀랐지만, 지훈의 반응이 더 놀라웠다. 저런 걸 콩깍지라고 하는 것이리라.
“형수님이 우리가 모르는 카, 카리스마가 있는 분이셨네요. 정말 멋지십니다.”
“하하! 우리 해인이 카리스마가 이 정도였다니, 진짜 새롭다. 너무 멋져.”
하지만 감격은 거기까지였다. 두 번째 파일을 들은 지훈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쓰, 쓰레기라니…….”
“뭐, 뭔가 사정이 있겠……지요.”
말을 더듬는 상진의 얼굴에 이전에 없던 묘한 웃음이 어렸다. 뭔가 고소해하는 표정이었다.
“사정이야 당연히 있는 건데……, 아무리 그렇다고 쓰레기라고까지 했다는 건…….”
톡톡. 지훈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상황이야 어찌 되었건 이런 일을 혼자 당하고 있었다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 것이 미안하고. 이 새끼가 그놈 같은데 제 목소리만 변조해서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오전에 어젯밤 외워 둔 번호로 전화를 했더니 없는 번호라고 했다. 그새 번호까지 바꾼 비겁한 놈. 이렇게 알아서 꼬리를 드러내 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런데 우리 해인이는 왜 이런 놈을 상대하고 있었을까. 뭔가 협박을 당하는 것 같았는데 그게 도대체 뭘까. 감히 우리 해인이를 괴롭히고 있었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익명이라도 이거 올린 직원 추적 가능하지?”
“엘브는 익명 보장이 원칙입니다. 언론에도 몇 번 나왔지만, 익명을 추적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해서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사모님과 세나 양의 일도 그렇게 알려졌고요.”
“은밀하게 알아봐. 이 사안은 사주 딸의 이중성이 문제가 아니라 주해인이라는 사원의 사생활 침해니까. 본인 동의도 없이 불법으로 올린 파일이잖아.”
“네, 일단 알아보겠습니다. 그런데 쓰레기, 라는 말은 괜찮으신지…….”
상진은 굳이 쓰레기, 라는 말을 콕 짚어서 한 번 더 상기시켰다. 잠깐 잊고 있었던 지훈의 얼굴이 벌레라도 씹은 것처럼 다시 구겨졌다. 물론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은 되었다. 그렇다고 충격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전혀 안 괜찮아. 우리 해인이 혼나야겠어. 나 외근 나갈 거니까 전화해서 이 파일 듣고 나서부터 내가 연락이 안 된다고 좀 전해 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