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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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충격.
2022.05.12.
해인은 내내 앉아서 고민 중이었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으니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좋지 않은 반응일 것이라는 건 보지 않아도 뻔했다. 확인하지 않으려 했지만, 손이 움직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게시판을 열어 댓글들을 확인해 보았다.
[이 회사 나도 가질래.]
[나도 갖고 싶어.]
[피는 못 속인다더니……. 다들 똑같네.]
저절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원래의 의도가 그것이 아니었음에도 해인은 자신의 경솔했던 언행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어떡해야 하나.
원본이 공개된다 한들 딱히 좋은 내용은 아닌지라 이미 받은 타격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지훈과 상의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서던 그때였다.
“블라인드 처리됐는데?”
파티션 너머로 우영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자리에 앉은 해인이 게시판을 확인해보았다. 우영의 말대로 그 글이 게시 보류 조치가 취해져 있었다.
설마 지훈이 한 일일까. 그렇다면 벌써 이 내용을 들었다는 건데…….
아무래도 지훈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해인이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수군거리는 사람은 없었고 지나가는 몇몇 직원들만 있었다. 일단 화장실로 가서 손을 씻었다. 그리고 다시 나와서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올라간 부사장실엔 하 비서 혼자뿐이었다.
마치 자신이 올 것이라는 걸 예상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하 비서님 계셨어요? 부사장님은요?”
“아! 그게 외근 나가신다고…….”
“일정에 있었나요?”
“없었는데, 사실 저도 어디 가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게시판에 올라온 파일을 들으신 후로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았어요. 내일도 연차 낸다고, 찾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 좀 더 빨리 올 것을 그랬다. 해인이 들고 있던 핸드폰으로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전화는 꺼져 있었다.
“핸드폰 끌 거라고, 연락하지 말라고도 하셨습니다.”
하 비서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해예요. 오해. 부사장님이 그런 것으로 오해할 사람이 아닌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상진이 해인의 눈치를 살피며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이어 안타깝다는 듯 덧붙였다.
“결혼…… 이야기도 오가던데요.”
“그 남자 혼자 헛소리 한 거예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상황이라고요.”
해인은 머리가 아픈 듯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충분히 지훈이 상처받고 놀랐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말도 없이 어딘가로 사라져 버릴 줄은 몰랐다.
뭐든 대화로 풀어야지. 가긴 어딜 가.
“아니, 무슨 일이 생기면 서로 만나서 대화로 해결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당연히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형수님 말씀이 백번 옳으십니다.”
“좀 잡아 주시지 그러셨어요.”
“도저히 그럴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 남자와 결혼도 생각해 본다 하시고, 부사장님께는 쓰레기라고 하시고……. 충격을 너무 많이 받으신 것 같았거든요.”
“그게 그러니까……, 여튼 그 말이 아니거든요.”
해인이 나름 변명을 해 보지만, 자신이 듣기에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은 아닌 듯했다.
미국에서 그렇게 뜨거운 밤을 보냈는데 한국에서는 다른 남자를 만나서 결혼 이야기가 오가고, 정작 지훈은 쓰레기 취급을 당하고.
아! 좀 심하긴 했네.
“저야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충격을 제대로 받으신 것 같았습니다.”
“설마요. 지훈 씨 그렇게 귀가 얇지 않은데…….”
“아! 모르셨군요. 부사장님 귀 얇으십니다. 아주 몹시도.”
“그럴 리가요.”
해인이 즉각 부인하자 하 비서의 얼굴에 은근한 미소가 차올랐다.
너는 틀렸고 자신이 맞는다는 뭐 그런 느낌?
그 미소를 본 해인은 상진이 묘하게 얄미웠다.
지난번 해 준 말도 전부 진실은 아니었다.
거짓은 아니지만 뭔가 한술 더 떠서 전달해 주는 사람이니 지금 하는 말도 다 믿을 수가 없다.
충격은 받았겠지만 하 비서가 말하는 절반 즈음으로 이해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았다.
어쨌든 오해가 있으면 풀 생각부터 해야지 이 남자는 대체 어디 갔을까.
그러잖아도 무거운 머리가 복잡하다 못해 터져버리는 것 같았다.
* * *
원본 파일이 있을 것 같은 세나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그렇다고 새엄마에게 연락하는 것도 그렇고.
해인은 일단 사장실로 가서 부친과 이 일을 의논했다. 이 일의 주동자는 안형준이며 그동안 안형준이 제게 하고 있었던 일까지 모두 이야기했다.
부친은 많이 놀라면서도 자신이 알아서 해결할 거니까 이제부터 나서지 말라고 했다.
곧장 안 사장에게 전화를 해서 만나기로 약속하는 것을 보고 사장실을 나섰다.
사무실로 돌아왔지만 역시나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심 대리가 마음 가라앉히라며 허브차 한잔을 타 주었다. 그 음성파일을 들었음에도 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지 않은 것이 고마웠다.
어디로 갔는지 승윤과 우영은 보이지 않았다.
멍하니 앉아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문 쪽에서 쾌활한 인사 소리가 들려왔다.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어? 수빈 씨. 오랜만이에요.”
마침 밖으로 나가려던 심 대리가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어쩐 일이세요?”
“지훈 오빠, 만나러 잠깐 들렀어요. 부사장님이요.”
“아, 네.”
심 대리가 곁눈질로 해인의 눈치를 살폈다. 들어오려던 수빈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
“근데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디자인 팀에 볼일이 있어서요.”
“바쁘시구나. 그럼 우린 다음에 또 봐요. 저는 해인 씨랑 잠깐 이야기하다 올라가 볼게요.”
“그, 그래요. 그럼.”
하필 이런 상황에 수빈이 와서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은 심 대리가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나간 후 수빈은 해인이 있는 책상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해인은 제 자리로 다가오는 수빈을 무뚝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우리가 사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닐 텐데…….
“잘 지냈어요?”
“잘 지냈어요. 수빈 씨도 잘 지냈나요?”
딱히 반갑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수도 없기에 일단 인사는 받아 주었다.
“네. 저는 잘 지냈어요. 근데 어머님이 화가 많이 나셨던데…….”
어머님? 설마 지훈의 어머니를 말하는 건가? 역시나 좋은 말을 하러 온 것 같지는 않은 듯했다.
해인은 굳이 되묻지 않고 수빈을 빤히 보기만 했다.
“지훈 오빠 어머님이요. 두 분 미국 다녀온 이야기 들으셨나 봐요.”
아! 역시 그랬구나.
아무리 일 때문에 갔다고 해도 그분으로서는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가서 저지른 일도 있었기에 해인은 더욱 할 말이 없었다.
“어머님은 지훈 오빠가 저와 결혼하기를 바라시거든요. 그래서 이번 미국 다녀온 일로 화가 많이 나셨다고, 두 분이 더 이상 일로도 부딪히지 않으셨으면 한다고 전해 달라 하시던데요?”
해인이 아무 말이 없음에도 수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을 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해인이 담담히 말했다.
“어머님이 화를 내셨을 것 같기는 하네요. 지훈 씨가 수빈 씨와 결혼하기를 바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고. 그런데…….”
“…….”
“화가 많이 나셨다는 것을 전해 달라고 하신 것이 맞나요?”
“네?”
“내가 아는 고애란 사모님은 하실 말이 있으면 직접 하시는 분이거든요.”
“어머. 그럼 내가 어머님이 하시지도 않은 말을 거짓으로 한다는 말인가요?”
“물어보는 거예요. 정말 그런 말을 전해 달라고 하신 것이 맞는지…….”
“참나. 이혼했으면 끝이지, 왜 자꾸 지훈 오빠 옆에서 알짱거리세요?”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본색이 드러나기 마련인가 보다.
그동안 쿨하고 멋진 이미지를 고수하며 나름 포장이라도 하는 것 같던데 오늘은 대놓고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차피 지훈은 이제 누가 뭐래도 제 남자였다. 하필 오늘 같은 날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좀 더 나긋하게 대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해인은 수빈을 향해 부러 여유롭게 웃었다.
“내가 아닌데…….”
“…….”
“알짱거리는 사람은 그쪽이 말하는 지훈 오빠예요. 난 최근에 그 알짱거림에 결국 넘어간 사람이고. 더 자세한 건 올라가서 확인해 보세요. 난 일이 바빠서 이만.”
책상으로 고개를 숙이던 해인이 다시 수빈을 바라보았다.
“아! 스케줄도 모르고 오셨나 봐요? 부사장님 외근 나가셨는데. 퇴근에 맞춰 들어올지 그냥 퇴근할지는 나도 모르겠네요. 중요한 일이면 연락해서 만나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다시 고개를 숙인 해인은 수빈이 나가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그저 어머, 되게 웃겨 라는 말을 하며 멋쩍게 돌아서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얼마 후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이미 복잡해진 머릿속은 결코 조용할 수 없었다.
* * *
안성 모직의 안 사장을 만난 석현이 느지막이 집에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세나부터 찾았지만, 집에는 난영뿐이었다. 석현은 그녀를 향해 대뜸 분노부터 쏟아냈다.
“당신 미쳤어? 어쩌자고 그런 파일을 올리냐고. 제정신이야?”
“나도 모르는 일이에요. 난 세나에게 녹음만 하라고 했어요.”
“그 파일, 다 편집된 거라며. 당장 세나 불러들여!”
“며칠 여행 간다고 갔어요. 핸드폰도 두고 가서 연락이 안 돼요.”
“당신이 여행가라고 시켰어? 이런 일 저질러 놓고 세나 핑계 대면 그만이냐고.”
“핑계라뇨? 그,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난영은 두서없이 덧붙였다.
자신은 형준이 해인이나 세나를 만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고.
물론 석현은 그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무엇보다 회사 내에 누군가와 통하고 있다면 그건 안 될 일이었다.
“내가 안형준, 이 자식을 가만둘 줄 알아? 당신은 그놈이 내 약점 가지고 해인이 협박한 것은 알고 있는 거냐고.”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으이그. 하여간 일이나 저지를지 알지. 집구석에 가만 틀어박혀 있으면 될 것을 그것도 못 해서 이 난리를 치느냐고!!!”
석현이 슈트를 벗어 거칠게 팽개쳤다.
울화통이 터지는 것만 같아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안형준이 직접 우리 회사 직원과 접촉한 거야, 아니면 당신이 심어둔 사람이야?”
“난 모른다니까요? 아니, 근데 당신은 그걸 듣고도 해인이 역성만 들 거예요? 그게 내 뺨도 치려고 했다고요.”
“시끄러워. 이 일이 제대로 수습되지 않으면 당신은 이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거야.”
석현이 난영을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뜨끔해진 난영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저 해인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려 했을 뿐이다.
세나를 시켜 녹음 파일을 형준에게 건네주며 이것으로 뭘 할지 잘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 편집되어 돌아온 파일은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다.
해인이 이혼 후에도 안형준을 거부하는 것이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형준과 손을 잡은 것이었고 결과는 절반의 성공이나 다름없었다.
그 파일이 공개되고 달린 댓글들은 죄다 해인에 대한 실망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난영은 석현이 두려우면서도 자신이 저지른 일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 * *
아파트 입구로 들어오는 해인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정말 충격이라도 받은 것인지 지훈은 내내 연락이 없었다.
핸드폰은 계속 꺼져 있고.
이럴 줄 알았으면 형준의 전화를 받았던 날 모든 것을 이야기할 것을 그랬다.
결혼 이야기까지 나왔으니 지훈의 기분이 좋을 리 없을 것이다.
쓰레기라는 말이 그렇게 연결될 줄이야.
다행히 그 대화를 녹음한 건 형준뿐만은 아니었다. 저에게도 녹음한 원본이 있으니 지훈과 연락만 되면 딱히 문제 될 것도 없었다.
그래. 연락만 되면.
문제는 그 연락이 안 되는 것에 있었다.
급기야 서운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 근데 이 남자는 이런 일이 있으면 대화로 풀어야지. 무슨 잠적을 하고 난리냐고.
원본 파일 들려주고 나서는 실컷 혼내주든가 해야겠다.
허탈한 마음으로 비밀번호를 누른 후 집 안으로 들어왔다.
신발을 벗으려는데 익숙한 남자 구두가 보였다.
그리고 낯선 풍경이 해인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