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국 끓이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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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국 끓이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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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국 끓이는 남자.
2022.05.15.
이 구수한 냄새는……. 해인은 곧장 주방으로 달려갔다.
셔츠에 앞치마를 입은 지훈이 국자를 들고 간을 보는 뒷모습이 보였다.
낯선 풍경에 놀란 해인의 시선이 식탁으로 향했다.
진미채와 멸치 같은 반찬이 있었고 심지어 나물도 있었다.
연락이 안 되었었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었던 거야?
울컥해진 해인이 곧장 달려가서 지훈의 등을 끌어안았다.
“어? 누가 허락도 없이 막 껴안을까.”
누구긴 누구야.
해인은 말없이 지훈의 등을 찰싹 때려 주었다. 몇 시간이었지만 그가 충격을 받았다 생각해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가.
하지만 저 은근한 목소리를 들으니 그마저도 헛된 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역시 하 비서 말은 반만 믿어야 해.
초조하고 답답했던 마음이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 무엇보다 이렇게 따듯한 남자의 등에 기대어 있으니 와락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설마, 감동해서 우는 거야?”
“아니거든요.”
지훈의 한마디에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혹시나 지훈이 뒤를 돌아볼까 봐 그의 허리를 두른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아직은 그냥 이 자세로 있고 싶었다.
넓고 편하고 심지어 따듯하다. 그냥 이대로 잠들고 싶을 만큼.
그는 진짜 쓰레기라는 말 듣고도 괜찮은 건가. 멘탈이 좋은 건지 아니면 그게 다 편집이란 걸 눈치챈 것인지…….
그렇게 눈치 빠른 남자가 절대 아닌데…….
설령 지훈이 오해했다 할지라도 지금 해인에겐 그의 넓고 탄탄한 등이 큰 방패처럼 위로가 되어 주었다.
“팔에 힘주는 걸 보니 좀 더 이러고 있고 싶구나. 그래. 주해인 한정판 등이니까 오늘 하루는 있고 싶은 만큼 있어. 기다려 줄게.”
“어떻게 된 거예요?”
“뭐가?”
“오후 내내 연락 안 되던데…….”
“충격받은 일이 있었거든. 그건 밥 먹고 이야기하자.”
아! 역시 받긴 받았구나.
그런데도 오해하지 않고 이렇게 집에서 밥까지 준비하며 기다려 주는 남자.
이렇게 넉넉한 성품의 소유자였다니 고마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젠 이 남자를 떠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
.
.
한참이나 지훈의 등에 기대어 있던 해인이 천천히 식탁 앞으로 가서 앉았다.
뭐랄까. 솔직히 살짝 민망해서 지훈의 눈을 마주하기가 부담스러웠다.
먼저 가서 등을 휘감은 것도 그렇고 오해받을 일을 해 놓고도 이렇게 차려 주는 밥상 앞에 숟가락만 얹으려니 양심이 찔린다고나 할까.
“나 늦으면 어쩌려고.”
그래서 괜한 투정을 해 보았다.
“오늘 우리 주해인 사원이랑 밥 먹을 사람이 있을까?”
“아!”
짧게 탄식한 해인이 곧장 고개를 숙이고 숟가락을 들었다.
그가 은근히 아픈 사실을 짚었다. 그러잖아도 회사에서 은밀히 따돌림당할까 걱정인데…….
그런 해인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지훈이 밥과 미역국을 한 그릇씩 먼저 떠 주고는 자신의 것도 담아서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실 승윤에게 미리 전화를 했었다. 혹시나 위로한다고 술 한잔하는 일 없이 고이 집에 보내 주라고.
뭐, 늦으면 늦는 대로 기다리면 될 일이지만, 해인의 성격상 그냥 집에 올 것 같아 미리 와서 이런저런 준비를 했던 것이다.
“회사에서 바로 집에 올 시간은 넘은 것 같은데, 어디서 헤맨 거야?”
“아파트 앞에, 그때 앉았던 공원 벤치에 앉아서 잠깐 생각 좀 하고 왔어요.”
“무슨 생각?”
“이 위기를 어떻게 넘기나, 지훈 씨는 어디 갔나, 왜 연락이 안 되나, 이 자식은 왜 중요할 때 사라…….”
지지는 않았구나.
뒷말을 삼킨 해인이 멋쩍게 어깨를 으쓱했다. 연락이 되지 않은 내내 걱정했던 것은 사실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저를 믿어주고 밥까지 해 준 남자를 탓할 수는 없겠지.
“아, 이건 아니네요. 필요할 때 이렇게 밥도 해 주고.”
“음, 그래. 그 자식이라는 욕은 못 들은 걸로 해 줄게.”
지훈이 픽 웃으며 대충 넘어가 주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아요?”
숟가락을 들긴 했지만, 속 편히 밥을 넘기기엔 걸리는 것이 많았다.
“아니. 전혀. 그래서 복수하려고 밥 준비한 거야. 쓰레기가 해 주는 밥은 쓰레기일까, 밥일까?”
“아니, 그 쓰레기는 그 쓰레기가 아니라…….”
“일단 먹어 보고 판단해. 쓰레기인지 밥인지…….”
“풋.”
“웃어? 웃음이 나오지? 기다려. 쓰레기가 설거지도 해 주고 발 마사지도 해 주고 키스도 해 줄 거니까.”
“아흐흐.”
이 상황에 웃음이 나면 안 되는데 자꾸 웃음이 나왔다. 역시나 편집되고 짜깁기됐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충격을 안 받은 게 아니라 나름 승화시킨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재밌구나?”
“네.”
“음. 쓰레기의 참맛을 아는 여자군.”
계속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으려 입을 꾹 다물었다.
쓰레기의 참맛을 알고 싶지는 않지만 지훈의 투정은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일단 밥 먹어. 밥 먹고 이야기하자.”
“미역국 맛있게 보여요.”
“이번엔 고기를 많이 넣어서 끓였어. 검색해 보니까 실력 없으면 고기 많이 넣으면 그럭저럭 맛있다고 하더라고.”
지훈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다정함이 차고도 넘쳐 해인을 흡족하게 했다.
감격에 젖은 듯 지훈을 향해 미소 지은 해인이 숟가락으로 국을 한 모금 떠 넘겼다.
의외로 맛있고 간이 잘 맞았다.
“맛있어요.”
“쓰레기가 끓여 주는 국이 맛있어? 혀에 문제 있는 거 아냐?”
픽 웃은 해인이 밥과 함께 다른 반찬도 먹어 보았다.
아파트 앞에 반찬가게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나 보다.
“냉장고에 먹을 게 하나도 없더라고. 들어왔다 다시 나가서 이것저것 사 왔어. 내가 다 잘할 자신은 없거든. 나는 밥하고 국만 끓였어.”
“감동이에요.”
“쓰레기가 밥해 주니까 좋지?”
끄덕끄덕.
해인은 입안에 음식을 가득 넣은 채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런 해인을 바라보는 지훈의 입가로 의기양양한 미소가 일었다.
“밥 많이 먹어 둬. 이래저래 혼나야 할 일이 아주 많을 거니까.”
할 말이 없다.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도 그렇고 미리 말하지 않은 것도 그렇고.
이래저래 잘못한 일이 많은 것 같아서 오늘은 지훈이 하자는 대로 해야 할 것 같았다.
해인은 지훈이 차려 준 밥과 국을 깔끔하게 비웠다.
워낙 많이 떠 줘서 다 먹을 수 없을 줄 알았는데 먹다 보니 금세 바닥이었다.
“잘 먹었어요. 진짜 맛있게.”
“든든해?”
“그럼요. 미역보다 소고기가 더 많은 미역국을 먹었는데 당연히 든든하죠.”
.
.
.
고기를 먹었으니 고깃값을 해야 한단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고깃값이라는 말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물에 담근 고기는 진정한 고기라고 할 수가 없다며 잠깐 맞서보았다.
하지만 얼마 못 가 해인은 결국 꼬리를 내렸다.
고기 잘 먹고 계속 헛소리하면 가중 처벌한다는 협박 때문이었다.
“이리와.”
소파에 앉은 지훈이 눈을 험상궂게 뜨고는 해인을 향해 팔을 벌렸다.
저 품에 갇히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뭐든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었는데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해인이 멍하니 보고만 있자 지훈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쓰레기 품이라서 싫어?”
“아니, 진짜 그게 아니라…….”
“아닌 거면 일단 와.”
그 단호한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은 그가 원하는 대로 하기로 했으니까 일단 가서 안겨야겠다. 그렇게 해인은 꼼짝없이 지훈의 품에 갇혀 버렸다.
지훈은 해인이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다리는 벌려 주었지만 결국 그 다리로 해인의 다리를 옭아맸고 두 팔로는 배를 꽉 끌어안아 겨우 숨만 쉴 수 있게 해 주었다.
목 언저리 위로 지훈의 따스한 숨결이 밀려왔다. 편안히 등을 기대니 넓고 탄탄한 그의 가슴이 커다란 산처럼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런 일 겪느라 고생했어.”
지훈의 진심 어린 한마디.
딱히 고생이랄 것도 없었지만 그의 말 자체로 위로가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제 다 이야기해. 어떻게 된 건지, 그놈이 누구인지. 아침에 전화했더니 그놈이 그새 번호를 바꿨더라고. 비겁하게.”
지훈은 어제 전화했던 형준을 파일의 그 남자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더 숨길 이유도 없었기에 해인은 안형준이 전화를 걸어온 일부터 차근차근 말해 주었다.
물론 그의 이름과 어디서 뭘 하는 사람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굳이 누구라는 것을 말하지 않은 이유는 당장 쫓아가서 일을 낼 것 같아서였다.
형준이 불쌍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훈이 그놈 때문에 이성을 잃는 건 원치 않았다. 오늘은 지훈과 이렇게 남은 감정을 풀어내는 게 먼저였다.
“그놈이 너를 좋아하는 거야?”
“그랬나…… 봐요. 나도 몰랐어요.”
“근데 그놈을 계속 만났고, 청혼도 받았고?”
지훈의 목소리에 살짝 날이 섰음이 느껴졌다.
지금부터 장르가 바뀌는 걸까.
목 언저리가 스산해짐을 느끼면서도 해인은 담담히 대답했다.
“계속까지는 아니고 두어 번 만났고, 청혼은 거절했어요.”
“생각해 본다고 했잖아.”
“그건…….”
작전이었는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잠시 망설이는 사이 지훈이 먼저 확신하듯 물어왔다.
“속이려고 그랬어?”
“……!”
“속여서 뭔가 얻어내야 할 것이 있었나? 그래서 나도 쓰레기라고 한 거야?”
이 남자, 첩보 영화 찍는 데 소질이 있었다. 더불어 저에 대해서는 그 어떤 오해도 하지 않는 것 같고.
처음엔 오자마자 음성 파일부터 들려 주려고 했는데 뭔가 그럴 필요도 없어진 느낌이었다.
음성 파일을 들려주면 윤지훈이 완벽한 남자라고 말했던 것도 들키게 된다. 그건 좀 쑥스러우니 그냥 첩보 영화로 밀고 나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해인은 인정도 부인도 하지 않고 웃어 버렸다. 그와 동시에 귓불에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지훈이 귀를 깨물어 버린 것이다.
“아야. 아파.”
“아파? 쓰레기 심기를 건드린 대가치고는 약과 아니야?”
“아, 알았어요. 미안해요.”
한 번 더 깨물지는 않을까, 해인이 급히 사과했다.
“아, 근데 점점 숨쉬기가 힘들어지는데 팔 좀 느슨하게 해 주면 안 될까요?”
해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몸이 돌려지더니 입술이 맞물렸다.
언제 고개가 돌아갔고 지훈이 어떻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윗입술 아랫입술을 차례로 머금더니 후, 하며 호흡을 밀어 넣는다.
“인공호흡. 숨 부족하다며.”
“아, 네. 고마워요.”
“좀 살 것 같지?”
“그런 거로 하죠.”
아랫배는 계속 이렇게 꽉 잡고 있을 작정인가 보다.
후우. 한숨을 쉬며 제 처지를 비관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랑하는 남자를 속였으니 이 정도는 달게 받아야겠지. 숨이야 이렇게 한숨 쉬면서 들이마시면 될 일이고.
그나마 오해하지 않고 이렇게 위로까지 해 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걱정이에요. 지훈 씨는 이렇게 날 믿어 주는데…….”
“그런데?”
“회사 직원들은 날 어떻게 생각할까요.”
“앞으로 잘하면 되지. 사정이 있었던 걸 알면 이해해줄 거야.”
“다들 지훈 씨 마음 같진 않을 거예요.”
“나는 멋있던데? 이 회사 내가 가집니다, 그거 진짜 멋있었어. 우리 해인이 카리스마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상상 이상으로 더 멋졌어.”
“아으. 그만 해요. 부끄러워요.”
“부끄럽긴. 진짜 멋졌어. 앞으로도 쭈욱 그렇게 당당히 말하고 살아. 내가 열심히 지원해 줄 거니까. 근데 경영에 관심 없다 하지 않았나?”
“자꾸 짜증 나게 하니까 열 받으라고 해 본 말이에요.”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해인은 자신이 원하는 목표가 분명했기에 딱히 회사를 탐낼 이유도 없었다.
음성 파일이 공개되니 그나마 남아 있던 작은 욕심도 사라진 느낌이었다.
“우리 해인이는 열 받으면 멋있어지는구나. 감동이야.”
아무래도 이 남자는 감동하는 핀트가 좀 남다른 것 같았다.
아니면 뭐가 감동인지 잘 모를 수도 있고.
“늦었는데 집에 가야 하지 않나요? 어제도 여기서 잤는데. 부모님들 걱정하시겠어요.”
“다 큰 아들 걱정하실 분들은 아니야.”
“그래도…….”
“이제 쓰레기랑은 같이 자기 싫어진 거야?”
“그 쓰레기는 왜곡된 거라고요. 그러니 자꾸 쓰레기, 쓰레기 하지 말아 줘요.”
“왜 자꾸 할까. 내가 너무 부드럽게 대해 주니까 화도 안 나고 충격도 안 받은 거 같지? 주해인.”
쓰레기 투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