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완벽한 남자.
(51/92)
51. 완벽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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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완벽한 남자.
2022.05.26.
지오의 이름을 들은 순간, 지훈의 피가 또 거꾸로 솟았다.
아냐. 잘못 들었을 거야. 우리 해인이가 절대 그럴 리 없다며 애써 위로한 지훈이 침착하게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내가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
“그래요? 그럼 또박또박 말해 줄 거니까 잘 들어요. 지오 오빠가 연락하기로 해서, 그거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뭘 기다려? 급기야 거꾸로 솟은 피가 얼굴로 몰려들었다. 지훈의 낯빛이 붉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지오가 우리 해인이 번호도 알아?”
이번에도 침착하게 되물었다.
이런 일로 흥분한다는 것은 자신이 풋내기나 다름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나 똑같다고 생각하며.
“미국에서 만났을 때 연락한다고 번호 달라 했거든요. 너무 보고 싶었다고 하면서.”
“번호를 달란다고 덥석 번호를 줬어?”
“당연하죠. 지온데.”
해인이 햇살을 머금은 꽃잎처럼 방긋 웃었다.
그 웃음이 청량음료처럼 상큼해서 하마터면 아, 그래? 하고 넘어갈 뻔했다.
어이 상실이었지만 지훈은 조금만 더 침착해보기로 했다.
그렇다고 꿈틀거리는 눈썹까지 막을 수는 없었지만.
“언제부터 이렇게 못된 입술이 됐을까?”
“눈썹 찌푸려져도 하나도 안 무서워.”
“무서웠으면 좋겠어?”
“웃기지 마요.”
“기대해.”
“뭘요?”
“지오의 최후를. 젊은 친구가 참 안 됐어.”
입에서 나온 내용은 끔찍했지만, 지훈은 최대한 평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리 발칙한 해인이에게 낚이면 초짜라는 생각이 여전히 그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쉽지는 않았다.
“혹시, 지오 놈 번호 있어?”
“아니요. 나만 줬어요. 유명 아이돌 번호를 달라 하기도 그렇잖아요. 근데 왜요?”
“갑자기 쌍욕이 하고 싶어졌어. 지오한테 남의 여자한테 관심 끄라고 욕이라도 해서 풀어야지.”
“푸흐흐흐. 지훈 씨, 욕도 할 줄 알아요?”
“한번 해 보려고. 내가 하면 뭐든 잘하는 남자거든.”
해인이 머리를 그의 가슴에 묻고 웃음을 터트렸다.
질투하는 지훈이 매력적이어서 부러 자극하긴 했지만 역시나 윤지훈이란 남자는 제 기대를 훌쩍 뛰어넘고도 남았다.
자기가 제 주인이나 된 것처럼 으스대더니 지오라는 이름에 금세 경계하며 씩씩거리는 것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말을 흘려듣는 것이 얄밉다가도 그런 모습을 보니 마음이 사르르 풀리고 말았다.
웃으며 내뱉는 뜨거운 열기에 지훈은 몸이 달아올랐다.
하필이면 슈트 가운데인 셔츠에 닿아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뭔가 변화를 느낀 해인이 가슴에서 얼굴을 떼고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지훈은 해인의 허리를 붙든 손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
“어딜 가려고?”
“놔 줘요. 할 일 있어요.”
“할 일? 내가 왔는데 무슨 할 일?”
“아, 그게. 실은…….”
급하게 할 일을 만들어 보려 했으나 생각나는 게 없다.
그 사이 지훈은 해인을 뒤로 몰아 거실 창문까지 밀고 가서는 두 팔로 가둬 버렸다.
“오늘은 더 각오를 해야 할 거야.”
“그런 게 어딨어요? 오늘은 그냥 일찍 가요. 지훈 씨, 집 있잖아요.”
“나도 그러려고 했어. 근데…….”
지훈이 입고 있던 슈트를 거칠게 벗어 던졌다.
퍽!
소리가 얼마나 요란한지 사람을 한 대 치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놀란 해인이 슈트와 지훈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를 히죽 웃으며 보던 지훈이 이번에는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냈다.
탄탄하고 매끈한 가슴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자 해인의 시선도 어쩔 수 없이 그 가슴으로 향했다.
탄성에 가까운 숨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을 꾹 참으며 짧게 침만 삼키는 그 순간 또다시 던져진 셔츠는 아까보다는 작은 소리를 내며 거실에 처박혔다.
해인은 그저 두 눈만 말똥말똥 굴리고 있다.
어쩌려고 저러나 싶어 보는데 이번엔 허리띠를 풀고 있다.
저걸 던지면 소리는 둘째치고 가운데 장식이 망가지지 않을까.
“설마 그것도 던지려고요?”
“왜? 이것도 풀어서 던졌으면 좋겠어? 아니면 우리 해인이 좋아하는 것처럼 묶을까?”
“벨트는 원래 묶는 것보다는 때리는 용도 아닌가요?”
“하아!”
이 여자는 뭐 이렇게 아는 게 많아. 설마 그쪽으로도 조예가 깊나?
살짝 멍해진 지훈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사이 해인이 한마디를 더 했다.
“아무거나 하나만 골라봐요. 내가 제대로 해 줄게요.”
참다못한 지훈이 해인을 꽉 끌어안아 버렸다.
가만두면 별소리를 다 할 것 같아 키스를 해서 입을 꽉 막아 버릴까 했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일단 참았다.
“생각보다 더 매력적이었어. 우리 해인이.”
“오우. 취향이 그쪽이었나 봐요?”
“발칙하기도 하고.”
하고 싶은 말 다 했으니 키스나 해야겠다.
지훈이 살짝 몸을 떼던 그 순간이었다.
“나는 취향 아닌데 맞춰 줄 수는 우읍…….”
아! 키스 타이밍이 좀 더 빨랐어야 이런 발칙한 말을 안 듣는 건데…….
지훈은 동작이 느린 제 몸을 한탄하며 키스의 수위를 점점 높여갔다.
거실 창과 지훈의 두 팔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는 해인은 폭격과도 같은 키스를 받아내며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불이 환히 켜진 방 안.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침대 위였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잃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해인은 조금 전까지 지훈이 사랑의 이름으로 제게 자행했던 행동들을 떠올리며 눈을 찔끔 감았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할수록 부끄럽잖아.
일단 옷이라도 입어야겠다 싶어 옆으로 누운 지훈을 슬며시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있는 그는 쌔근쌔근 숨소리만 내뱉고 있었다.
잠이 들었나.
오늘은 집에 가야 할 텐데 갈 생각이 아예 없어 보였다.
에휴. 이러면 안 될 텐데…….
고개를 저으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려던 찰나였다.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이 어느새 꽉 조여졌다.
“화장실이라도 가게?”
귓가를 파고드는 끈적한 목소리.
움직임 때문에 잠에서 깼나 보다.
“깼어요?”
“잠든 게 아닌데 깨긴. 그냥 눈 감고 있었어. 해인이가 좋아하는 내 얼굴 맘껏 보라고.”
“누가 그래요?”
“뭘?”
“내가 지훈 씨, 얼굴 좋아한다고?”
“그건 아주 오래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는데?”
“오래전이라뇨?”
“음, 우리 결혼할 때부터인가? 한 번씩 몰래 훔쳐봤잖아. 그러다 나랑 눈 마주치면 얼른 피하고.”
헐. 설마 그걸 알고 있었던 거야? 속내를 들킨 해인은 발가벗겨진 느낌이 들었, 아! 지금 실제로 그렇구나.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두 배는 부끄러운 것 같았다.
아닌 척 잡아떼면 아닌 게 되려나.
“그런 적 없는데?”
“없기는. 한두 번도 아닌데. 봐! 이제. 마음껏.”
지훈이 짓궂게 웃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찬물이라도 끼얹어 주고 싶을 만큼 얄미웠지만 저렇게 확신에 차 있으니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해인은 더 말하기를 포기하고 제 허리를 감싸 안은 지훈의 손을 풀어냈다.
“지훈 씨, 선물 있어요.”
“선물?”
“네. 그러니까 얌전히 기다려요.”
선물은 받고 싶은지 풀릴 것 같지 않던 손이 금방 풀어졌다.
그렇게 침대를 내려온 해인이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뜨겁고 진득한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모르는 척 그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화장대 앞으로 간 해인이 서랍에 넣어둔 볼펜 모양의 소형 녹음기를 꺼냈다.
이것까지 주면 저 남자의 광대가 승천하다 못해 우주를 날아다니겠지.
타이밍이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계속 묻어둘 수도 없었다.
세나가 공개한 녹음도 편집되고 짜깁기됐다는 것을 알리려면 이것을 먼저 들려줘야겠지.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여졌지만, 결심을 굳힌 해인은 녹음기를 지훈에게 건네주었다.
“선물이 볼펜이야?”
“왜요. 별로예요?”
“별로라니, 내 생애 최고의 볼펜이 될 예정인데.”
지훈은 만족스럽다는 듯 밝게 웃었다.
뭐든 사고 싶으면 살 수 있었고 필요하면 구해서 쓰면 그만이기에 딱히 선물로 뭘 원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해인이 주는 선물이니 이 볼펜은 이제 이 지구를 통틀어서 가장 소중한 볼펜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기꺼이 웃던 순간 지훈의 눈이 번쩍 뜨였다.
뭔가 볼펜이 볼펜 같지 않은 느낌이었다.
“이건…….”
고개를 갸웃한 지훈이 이내 볼펜의 한쪽에 있는 버튼을 눌러보았다.
그와 동시에 음성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꽤 오랜만이네. 그렇지?
-그러네요.
재생되는 음성을 듣자마자 지훈의 표정이 흠칫 굳어졌다. 여자는 해인이 같은데 남자는…….
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해인을 바라보았다. 해인은 일단 듣기부터 하라는 듯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내용을 듣는 지훈의 표정이 점점 의미심장해졌다. 아무래도 이놈이 그놈이겠지 싶어 미간은 잔뜩 찌푸려졌다.
뭔가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았지만, 지훈은 서서히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윤지훈은 완벽한 남자예요.
그 한마디에 우와, 하는 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읍! 지훈은 제 입을 막았다.
결혼도 거부하고 자신을 깎아내리는 말에 정면으로 완벽함을 선언하는 여자.
이렇게 멋질 수가!
이 카리스마는 어쩔 거야!
감격을 뒤로하고 일단 끝까지 들어야 했다.
지훈이 상처받았던 쓰레기 발언은 맨 뒤에 나왔다. 자신이 아닌 여타의 진짜 쓰레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지훈의 가슴이 황홀과 환희로 일렁였다.
이 말을 정말 나의 해인이가 했단 말인가.
무엇보다도 이것이 미국을 가기 전이라는 사실이 더 극적이었다.
“해인아! 주해인 너, 진짜!”
“선물이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들기만 하겠어. 최고야! 이보다 좋을 수는 없어.”
지훈이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몹시도 흥분해서 좀처럼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해인의 얼굴에도 절로 미소가 흘렀다.
역시 이 남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
“아! 이런 게 뉴스에 나와야 하는데…….”
뭐? 그래도 그건 아니지. 그걸 뉴스에 내보내면 나는 수치사 하라는 말이잖아. 해인의 얼굴에 흐르던 미소가 멈췄다.
지훈은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팔을 하늘로 뻗다가 함성 같은 탄성을 내지르더니 급기야 침대 위로 발라당 넘어져 버렸다.
감격이라 쓰고 오두방정이라고 읽는다……, 뭐 그런 느낌이었다.
“저기, 이 완벽하다는 건 그러니까 정신과 육체에 깃든 모든 것을 말하는 거지?”
“지훈 씨 이렇게 오버할 줄 알고 영원히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무슨 그런 말을. 이거 공개하자.”
“안 돼요. 부끄러워요.”
“이게 왜? 여기에 모든 진실이 담겨 있잖아. 이걸 공개하면 모든 오해가 풀릴 거야.”
“그렇기는 하죠. 하지만 공개하기엔 너무 사적인 영역이라서.”
“사적인 영역……, 이긴 하지.”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고맙기는 내가 고맙지. 우와! 해인이가 이런 말을 했다니, 정말 최고의 선물이야. 해인이가 보기에는 내가 완벽한 남자였구나.”
감탄을 쏟아내던 지훈이 벌떡 일어나더니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해인을 향해 다가갔다.
덮고 있던 이불이 벗겨지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뭘 봤는지 해인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지훈 씨? 옷 좀 입으면 안 될까요?”
“감춘 거 아니었어? 나 집에 가지 말라고.”
“아뇨. 아까 벗어던진 그대로 있어요. 슈트랑 셔츠는 거실, 바지랑 드로즈는 여기 바닥에.”
“쓸데없는 걸 기억하고 그런다. 그냥 완벽한 남자의 품에 안겨 있기나 해.”
그렇게 해인은 다시 지훈의 품에 갇혀 버렸다.
역시 타이밍이 별로였나 보다.
조금 더 건전한 장소에서 공개할 것을 그랬다.
뒤늦게 후회해 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별수 없이 지훈의 품에 안겨 머리며 볼이며 뽀뽀 세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하는가 싶더니 돌연 그가 멀어졌다.
“그럼 설마, 세나와 나눴던 대화도 이렇게 편집이야?”
“네. 그것도 편집이에요.”
“내 이것들을 그냥! 진짜 가만 안 둔다.”
“지금 화낸 거죠? 나를 엿 먹인 세나한테.”
“응. 지금 열 받아 미치겠어.”
“그래요. 그런 것 같은데, 벗고 있어서 실감은 안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