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속죄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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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속죄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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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속죄하는 남자.
2022.05.29.
“원초적인 분노가 제일 강렬한 법이야.”
“원초적 본능이겠죠.”
“그런가? 그러고 보니 몸이 뜨거워진 것 같기도 해.”
지훈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해인을 바라보았다.
해인이 얼른 뒤로 한 발짝 물러나 바지와 드로즈를 집어서 던지듯 주었다.
일단 저거라도 입어주면 그나마 사람으로서의 격식은 갖추는 건데…….
속으로 생각하던 해인이 실소를 흘렸다.
그럼, 저기 있는 남자는 사람이 아니라 탈피한 짐승인가 싶어서.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며 그 짐승이 스르르 일어섰다.
탈피한 육체의 모양이 적나라할수록 해인은 낯이 뜨거워졌다.
짐승이 나름의 격식을 갖추는 동안 얼른 밖으로 나가 바닥에 팽개쳐 있던 슈트와 셔츠도 가져왔다.
해인이 바지를 챙겨입은 지훈에게 셔츠와 슈트도 건네주었다.
옷을 받아든 지훈이 입을 생각은 하지 않고 침대로 던져 놓는다.
마저 입을 줄 알았더니 옷을 왜 입다 말아.
“입으라고 준 건데…….”
“더워서.”
“지금 집에 가는 거 아니었어요?”
“할 말이 있어서.”
좀처럼 진지해질 것 같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이렇게 진지할 때 파일을 들려줬어야 하는 건가 생각했지만 어차피 들은 후에 오두방정이 시작되었으니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무슨…….”
“세나는 아직도 연락 안 돼?”
“아직이요. 조만간 집에 오겠죠. 학교도 다녀야 하는데 참 기가 막히네요. 학점 관리는 하는 건지.”
해인으로서는 수업을 빼먹거나 리포트를 하지 않는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대체 어디로 튄 건지 벌써 며칠째 연락이 되지 않았다.
“원본은 세나한테 있겠지?”
“그렇겠죠.”
“그래. 세나는 금방 찾을 거고. 한 차장 이야기 좀 하자. 한 차장과는 일면식이라도 있었어?”
“얼굴을 알긴 해요. 몇 마디 대화도 했었고. 물론 그걸 대화라고 해야 할지도 의문스럽긴 하지만. 아무튼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당연히 잘은 모르죠.”
회사에 있을 때 인트라넷에 파일을 올린 이가 한 차장이라는 것을 지훈에게 들었었다.
전화 통화를 길게 할 수 없어서 피차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었지만, 그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해인은 지훈에게 난영의 지시로 그녀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화장실 앞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듣던 지훈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랬다면 더더욱 용서할 수가 없었다.
“한 차장 고소할 거지?”
“그게…….”
“왜?”
“한 차장을 고소하면 결국 세나랑 새엄마도 엮이게 되잖아요. 퇴근하기 전에 아빠랑 잠깐 이야기했는데 그냥 사과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라고 하셨어요.”
“안 돼. 차후 취하하더라도 일단 고소는 하는 게 좋아. 나중에라도 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본때를 보여줘야지.”
“그렇긴 한데…….”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런 일은 그냥 나한테 맡겨.”
지훈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아빠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면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한 차장을 통해 그동안 자신을 감시한 그것부터도 사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긴 했다.
그러나 고소를 하게 되면 언론에 알려지게 될 테니 그건 그것대로 회사에 좋을 것이 없었다.
새엄마는 아마도 이것을 노렸을 것이다. 회사를 생각해서 저 혼자 타격을 입고 마무리되는 결말이기를.
맡겨달라는 지훈의 말이 믿음직했다. 가족끼리 싸우는 것보다는 좀 더 정의구현에 가까운 느낌이랄까.
아! 그러고 보니 저도 결산할 것이 있었다.
“지훈 씨, 나도 할 말이 있는데.”
“뭔데?”
“우리도 이제 결산해야죠.”
“결산이라니?”
“기억 안 나요? 다른 진실이 있으면 지훈 씨가 죄인이 된다고 했잖아요. 내가 두 배로 갚아준다고 했었는데?”
“아!”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지훈이 감탄을 터트렸다.
어쩐지 그 상황이 앞뒤가 안 맞았었는데 이런 엄청난 진실이 숨어 있었던 것이었다.
오해라는 중죄를 저질렀으면서도 지훈은 그저 행복했다.
“이 상황이 감탄을 터트릴 상황인가요? 사랑한다는 여자를 오해한 죄인 주제에?”
해인이 지난번 그가 했던 말을 되돌려주자 지훈이 냉큼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마냥 행복해할 때가 아니라는 듯.
“미안. 사과할게.”
“웃으면서?”
급조된 표정인지라 웃음까지 감추는 것은 무리였나 보다.
하지만 입꼬리가 늘어나는 걸 어떡하나.
우리 해인이에게 완벽한 남자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게 미국 가기 전이었으니 사실 해인은 마음속으로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할수록 마냥 행복해서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죄인은 웃으면 안 되는 건가.
뾰로통한 얼굴로 째려보는 해인을 보니 안 될 것 같다.
지훈은 다시 표정을 급조해 최대한 죽은 표정을 만들어 냈다.
“진심으로 미안해. 오해해서. 내가 죄인이야. 어떤 처분이라도 달게 받을게. 속죄하게 해 줘.”
“말은 빤지르르하네요. 표정은 여전히 웃고 있는데.”
죽은 표정이 아니었나?
지훈이 동그란 눈알을 굴리다 애매하게 눈을 좁히더니 입꼬리를 아까보다 더 늘어뜨렸다.
이러면 좀 죄인처럼 보이려나.
“그건 화날 때 지을 표정인데.”
살다 보면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일도 있는 법이다.
솔직히 지금 너무 기분이 좋아서 해인이 원하는 표정을 만들어 내지는 못할 것 같다.
그럼 정면 돌파해야지.
“미안. 별로 죄인인 적이 없어서 표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렇죠. 내가 보기엔 지훈 씨는 지금 죄인이라는 생각도 전혀 안 드는 것 같아요.”
“아냐.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어. 아까 말했듯 무슨 벌이라도 달게 받을게.”
“나름 각오는 좋은데…….”
“그럼. 당연하지. 곱게 안길게. 그렇다고 괴롭힘의 강도를 줄일 필요는 없어.”
이번엔 지훈이 지난번 해인이 했던 말을 살짝 변형해서 돌려주었다.
그 어떤 괴롭힘도 달게 받겠다는 듯.
“각오의 방향이 이상해서 탈이네요.”
“다시 벗을까. 벌을 달게 받으려면 다시 벗는 게 낫지 않나?”
“또 앞서가시네?”
“난 완벽하잖아.”
“혹시, 대가리가 꽃밭이란 말 알아요?”
“알아야 해?”
“그럴 것 같은데요?”
“그냥 모르는 거로 하자.”
그리고 또 실실 웃는 지훈이었다.
완벽한데 뭐가 문제야. 오늘은 그저 완벽함에 취하고 싶을 뿐이다.
결국, 해인은 원본 파일을 지훈에게 공개한 것을 몹시도 후회하기에 이르렀다.
하필이면 그게 미국 가기 전의 일이었으니 저 남자가 저렇게 좋아하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그것과 별개로 제 기분은 꿀꿀하지만.
“솔직히 말해봐. 내가 언제부터 완벽해 보였어? 그럼 좋아도 했겠네? 언제부터 좋아했던 거야?”
지훈이 슬금슬금 다가오며 물었다.
해인은 불길함을 느끼며 뒤로 물러서야 했다. 안방이 아무리 크다 한들 딱히 도망칠 곳은 없었다.
“다가오지 말고 옷이나 입죠? 집에 가야 하지 않나요?”
“말해 줘. 시점이 있을 거 아냐. 내가 완벽해 보였던 그 순간. 그게 언제였어?”
아니, 근데 이 남자가 왜 자꾸 침대 쪽으로 몰아붙이는 거야. 그만하면 할 만큼 했잖아.
괜히 불타는 남자에게 파일을 들려줘서 기름을 끼얹은 건 아닌지 정말로 후회막심이었다.
“좋은 처분이 생각났어요.”
“뭔데?”
실실 웃는 저 얄미운 얼굴을 단번에 구길 수 있는 방법.
바로 그것이 떠올랐다.
“지오에게 전화오면 밥이라도 한번 먹어야겠어요.”
아니나 다를까 지훈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나름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했다.
아니, 화난 건가?
“그런 걸 양다리라고 하는 거야. 아주 부도덕한 일이라고.”
“아니, 스타랑 밥 한번 먹는 게 무슨 부도덕한 일이라는 거예요?”
“다른 거로 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그런 부도덕하고 잔인한 일을 꼭 해야겠어?”
“부도덕한 건 그렇다 쳐도 잔인할 것까지야…….”
“잔인해. 남녀관계에서 양다리는 있을 수 없어.”
지훈의 말에 냉기가 잔뜩 서렸다.
아니, 사람 얼려 죽이려고 작정했나.
해인은 살짝 움찔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어떻게 해도 지훈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것 같아 괜스레 승부욕이 발동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도덕적인 걸 좋아했나요?”
“난 원래 그런 사람이야.”
“사랑한다는 여자한테 발끈해서 얼려 죽일 듯이 노려보는 건 괜찮고?”
“내가 언제…….”
지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바지 포켓에 두 손을 찔러넣으며 미소를 지었다.
부러 가슴을 쫘악 펼쳐서 해인이 보란 듯 들이밀면서.
근육으로 잘 다져진 굴곡진 어깨와 복근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러려고 셔츠는 일부러 안 입었구나.
“죄인이 너무 당당해서 탈이네요.”
“멋져서 탈이겠지.”
가슴 근육을 손으로 팡팡 두드린 지훈이 씨익 웃으며 돌아섰다.
해인이 자신을 도발하기 위해서 지오놈을 끌어들인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해인이 다른 남자를 만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해인의 의도를 알기에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지만, 만에 하나라도 절대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화장실 좀. 잠깐 씻어야겠다.”
“집에 가서 씻어야죠.”
“물만 묻힐 거야.”
물만 묻힐 거면 뭐 하러 씻는 건데. 집에를 가려고 저러는 건지 안 가려고 저러는 건지. 해인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지훈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그때 침대 협탁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이 울렸다. 돌아선 해인이 핸드폰을 들고 액정을 바라보았다.
모르는 번호인데……. 누굴까.
“여보세요.”
-누나?
낯설지 않은 미성의 남자 목소리.
“설마…….”
-지오예요.
“와우!”
뒤늦게 입을 막아보았지만 이미 터진 감탄사는 어쩔 수 없었다.
해인의 감탄하는 듯한 목소리에 지오에게서도 곧장 반응이 왔다.
-지금 내 전화 받고 좋아해 주는 거 맞죠?
“예? 그게, 하하, 그러니까…….”
지오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타이밍이 너무 절묘해서 터진 감탄사였다.
하지만 양다리니 뭐니 했던 전후 사정을 알 리 없는 지오에게는 그 의미가 남다르게 들렸을 것이다.
-내 전화 기다렸어요?
“아니요. 전혀요.”
-반가워한 거 아니었어요?
“반갑다기보다는, 놀란 거죠. 갑자기 전화가 와서.”
-서운해요. 그냥 반갑다고 해 주면 좋잖아요.
“아, 그게, 그러니까 지오 씨에게 전화가 올 거라고는 생각을 아예 안 했거든요. 그땐 그냥 인사치레로 하는 말인 줄 알았죠.”
-내가 한다고 했잖아요. 미국에서 만났을 때 진짜 반가웠거든요. 그리고 나는 인사치레로 그런 말 안 하거든요. 누나는 나 안 보고 싶어요?
핸드폰을 쥔 해인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지오의 이런 거침없는 면모가 스타라서 그런 것인지, 단순함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해인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딱……히?”
-에이. 실망이에요. 그래도 우리 만날 수 있죠? 일찍 연락하려고 했는데 일도 많고 생각할 게 많아서 늦었어요. 언제 한번 내가 회사 앞으로 찾아가면 우리 볼 수 있나요?
“회사 앞으로 오면 사람들이 알아보지 않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톱스타인데.”
-마스크에 모자 쓰고 가면 상관없어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요. 밤늦게 갑자기 전화해서 미안해요. 그럼 다음에 또 연락할게요. 잘 자요. 누나.
그렇게 지오는 제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닌 밤중에 이게 무슨 일일까.
지오가 자꾸 누나 누나 하니까 진짜 동생 같기도 해서 괜스레 귀여운 생각이 들었다.
아! 정말 이런 동생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피식 웃은 해인이 뒤를 돌았다.
그 순간 장승처럼 턱 하니 버티고 서 있는 지훈과 마주해야 했다.
헉.
아니, 이 남자는 또 언제 이렇게 가까이 왔을까.
머리카락이 살짝 젖어 있고 가슴에도 물방울이 맺혀 있다. 씻었다기보다는 일부러 물만 묻혀서 빛나도록 만든 느낌이랄까.
정말 물만 묻히고 나온 거야?
왜?
그건 그렇고.
“내가 저번에도 말했죠. 사람이면 발소리는 내고 다니라고. 기척도 없이 이렇게 사람 놀라게 할 거예요?”
“랍스타? 랍스타가 뭔데 회사 앞으로 찾아와?”
“……?”
“그 랍스타가 혹시 지오 새끼야?”
전화 내용을 들었구나.
톱스타가 랍스타로 들렸을 것 같지는 않고 그냥 지오에게 욕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 있죠. 아무래도 양다리가 운명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