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사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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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사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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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사랑해야 했다.
2022.06.02.
“운명 같은 소리 한다. 해인아. 제발 정신 차리자.”
“나 정신 말짱하거든요. 전화 오는 타이밍 한번 죽이지 않나요?”
“지오가 죽을 타이밍인가 보지.”
지훈의 시선이 해인이 들고 있는 핸드폰으로 향했다.
당장이라도 전화해서 결투를 신청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 눈빛이었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해인이 핸드폰을 뒤로 감추었다.
“지훈 씨, 일단 진정해요.”
“난 충분히 진정하고 있어. 우리 해인이가 알려주지 않아도 지오의 번호를 알 방법은 아주 많고.”
지훈이 고개를 모로 기울며 여유롭게 웃었다.
그 순간 머리카락에 묻어 있던 물방울이 흘러 가슴으로 떨어졌다.
탄력적인 근육과 물방울의 조화가 아찔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뻔히 눈에 보이는 설정임에도 해인은 가슴이 설렜다.
“지오랑 무슨 이야기 했어?”
“별말 안 했어요. 보고 싶었냐고 물어봐서 아니라고 했고요. 됐죠?”
“그래. 잘했어. 완벽한 남자가 옆에 있는데 지오가 보고 싶을 리가 없지.”
“그건, 그래요. 근데 지오도 누군가에겐 완벽한 남자일 거예요.”
“완벽함의 무게를 가볍게 하지 말아 줘.”
얼핏 듣기엔 애원이라도 하는 말투였지만 정작 지훈의 얼굴엔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터질 듯 말 듯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해인은 오롯이 저만을 담고 있는 지훈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가볍지도, 가벼워질 수도 없는 무게의 사랑이었다.
지훈이 완벽하다는 고백은 3년 짝사랑의 집합체라고도 할 수 있었기에.
그러나 그런 남자를 보며 홀로 감당해야 했던 외로움은 알지도 못한 채 자신감에 취해 오버하는 모습을 보니 살짝 가볍게 희석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알고는 있나? 내 3년의 짝사랑을? 그 외로움과 고통을 안고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야 했던 내 심정을 네가 알기는 해?
물론 두 번째 헤어졌을 땐 그도 아팠다는 것을 알기에 한편으로 가엽기도 했다.
그건 미안하지만 그래도 살짝 얄밉잖아.
“원래 사람의 말이란 게 때론 새털처럼 가벼운 법이거든요.”
그 가벼움을 증명이라도 하듯 해인이 고개를 까닥이며 가볍게 웃어 주었다.
그런 해인을 바라보는 지훈의 눈동자가 불시에 뜨거워졌다.
지훈이 도발엔 응징만이 답이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성큼 다가가 해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재밌구나. 지금.”
남은 한 손으로는 해인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다 지그시 눌렀다.
못된 입술이라는 듯.
“벌 받는 남자가 너무 당당한 것도 문제라는 생각은 안 드나요?”
“나는 완벽하니까.”
당당하게 돌아온 대답과 함께 몸은 다시 밀착되었다.
그만큼 서로의 얼굴도 가까워졌다.
체온이 나누어지고 또다시 불처럼 화끈거리는 무언가를 느끼며 해인은 위기를 감지했다. 탄탄한 그 품에서 벗어나려 뒤로 물러나 보았지만, 허리를 안은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외려 칡넝쿨처럼 휘감으며 해인을 더욱 끌어당겼다.
“왜 이래요?”
“몰라서 물어? 날 자극했잖아.”
아주 심각한 자극이었을 것이다.
질투라는 건 어쩌면 사랑을 타오르게 하는 또 다른 명약일 테니까.
해인이 배시시 웃으며 물기가 묻어 있는 가슴을 손으로 더듬거렸다.
오늘 장난은 이쯤이면 되었다는 듯.
“정말 물만 묻히고 나온 거예요?”
“그랬지.”
“왜요?”
“완벽한 남자가 젖어서 빛나면 우리 해인이 또 반할까 봐?”
“그래서요?”
“집에 가기 싫잖아.”
“그럼 그 작전 성공이네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지훈은 제 노고가 이루어낸 결과물에 만족하며 흡족하게 웃었다.
품에 안긴 해인의 입술이 유독 선명하고 붉었다.
이 붉고 앙증맞은 입술이 잘도 앙큼한 말을 뱉어냈더랬다.
사과를 베어 물 듯 한입에 크게 삼켜버렸다. 붉었던 색깔만큼이나 달콤한 맛이었다.
놀란 해인이 뭐 하는 짓이냐며 쳐다보다 이내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 웃음 한줄기에 녹아내리고 가슴팍을 간질이는 손가락에 다시 타오르고.
그렇게 서로의 이마를 맞대고 한참을 웃었다.
양다리니 벌이니 했던 순간은 이미 기억 속에서 지워졌다.
내일 다시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 우리는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 했다.
그 밤이 처음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
두려움은 의외로 쉽게 비밀을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한 차장은 일을 치른 후 당분간은 연락하지 말아야 한다는 난영의 당부가 있었음에도 기어이 전화를 걸었고 만남을 끌어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한 차장은 분풀이라도 하듯 푸념을 늘어놓았다.
“일단 휴직 신청했어요. 부사장이 저를 고소한다는데, 진짜 할 것 같아요. 아니, 왜 자기가 난리래요? 부사장이 그렇게 나올 줄은 미처 몰랐어요.”
“나도 몰랐어. 이혼까지 했으면서 왜 그렇게까지 관심을 가지는지, 헤어졌으면 끝이지. 굳이 전부인 챙길 이유도 없는데…….”
난영이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 걱정을 가득 담은 투로 말했다.
물론 지훈이 해인을 생각하는 마음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두 번이나 헤어진 것은 의아한 일이었지만.
“챙기는 정도가 아니던걸요? 자기가 미쳐서 날뛰더라고 꼭 세나랑 그놈에게 전하라면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건드렸다고 진짜 가만 안 둘 것처럼 말했어요. 사실 다시 오셨을 때부터 소문이 있기는 했어요. 전 부인을 못 잊어서 왔다는 둥, 그냥 회사를 꿀꺽하러 왔다는 둥 말이 많았거든요. 저야 뭐, 사모님께 두 사람이 별로 안 좋게 헤어졌다는 말을 들어서 당연히 그런 줄만 알고 있었는데.”
부사장이 그렇게 전처를 애틋해하는 줄 알았다면 이번 일엔 절대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사모님이라지만 잘못된 정보로 인해 고소까지 당하게 생겼는데 마냥 좋은 말만 나오기는 힘들었다.
한 차장은 불퉁스럽게 입술을 내밀고는 웨이브 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돌돌 말더니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 제 머리를 확인하고는 다시 집어넣었다.
난영은 그녀의 말과 행동이 예의 없게 느껴졌지만, 입단속을 해야 하는 처지였기에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헤어졌으면서 아직도 미련이 남았나 보지. 그건 그렇고 회사 분위기는 어때?”
“싱숭생숭하죠. 주해인 씨에 대한 평가가 안 좋아진 건 사실인데, 팀원들과는 또 잘 지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휴직 신청하고 며칠 안 나가서 지금은 잘 몰라요.”
“승인이 난 것도 아닐 텐데 벌써 회사를 안 나간다고?”
“그러니까 사모님이 신경 좀 써 주세요. 얼른 휴직 승인이 날 수 있도록. 파일 올린 사람이 나라는 걸 부사장이 알았으니까 이제 곧 다른 직원들도 알게 되겠죠. 기분이 괜히 그래요. 어쨌든 남의 사생활 까발린 거잖아요. 지금이야 표적이 주해인 씨겠지만 부사장이 어떻게 하냐에 따라서 표적이 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고.”
“그것도 그렇군.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어머. 그걸 저한테 물으시면 안 되죠. 난 사모님이 시킨 대로 한 것뿐인데…….”
“그거야…….”
한 차장이 발끈해서 쳐다보자 난영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원래 한승미 차장은 난영의 외가 쪽 먼 친척이었다. 입사 때부터 면접관에게 난영의 입김이 작용한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었다.
잔일을 처리해 주는 선에서는 임원들보다 훨씬 이용가치가 있었기에 아직은 버릴 카드가 아니었다.
“알았어. 알았어. 회사에 연락해서 빨리 처리하라고 할게. 그리고 고소당할 걱정은 안 해도 돼. 해인이 그것이 회사에 해가 되는 일을 할 만큼 모질지는 못할 거야. 이 일이 외부에 알려지면 회사가 더 시끄러워질 텐데 뭐 하러 그런 위험을 감수하겠어. 제 아빠 생각해서라도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실상 이 모든 일의 기획자는 난영이었기에 굳이 책임 소지를 묻는다면 난영에게 절대적인 책임이 있었다.
지훈의 말을 듣고 해인이 고소라도 하게 되면 이래저래 복잡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쨌든 제 남편에게는 제대로 한 방 먹인 셈이 되었다.
자신과 세나의 자격 운운하며 회사를 해인에게 거저 물려줄 것처럼 굴었었는데, 이제 해인도 별반 처지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사모님만 믿을게요.”
승미는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는 듯 에피타이저로 나온 샐러드를 깨작거렸다.
일이 어떻게 되든 그저 한밑천 잡아서 카페나 차려야겠다는 생각도 없잖아 있었다. 회사 생활하기도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난영 덕분에 어찌어찌 승진은 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도 없고 앞으로의 승진도 장담할 상황이 아닌 듯했다.
사실 이번 일로도 난영에게 받은 돈이 꽤 두둑한지라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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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영은 그길로 안형준에게로 향했다.
남편이 안 사장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대충 알아둘 필요도 있었고 혹시 모를 앞으로의 대처 방법도 의논해야 했다.
안성 모직 사옥 근처의 카페에서 형준을 만나기로 한 후 자몽 주스 한잔을 시키고 그를 기다렸다.
형준은 한참 만에야 카페에 모습을 드러냈다.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난 형준은 커피를 시킨 후 난영에게 두 번째 파일의 원본이 있음을 알렸다.
“뭐가 어째? 해인이 그게 자네와의 대화를 녹음했다고?”
“예. 저도 까맣게 몰랐습니다.”
“세상에나. 그 깜찍한 것이 그런 짓도 할 줄 알아?”
“그러게 말입니다. 다소곳하게 앉아서 제가 하는 부탁을 들어줄 것처럼 해 놓고는 가방에 녹음기를 숨기고 있었는 줄 누가 알았겠어요.”
“만약 그걸 공개한다면 사람들은 우리 파일도 그런 식으로 편집됐을 거로 의심할 거 아닌가.”
“의심이 아니라 사실이죠. 정확히 말하면.”
“그건…….”
난영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만일 그 파일이 공개되면 직원들은 다른 파일에 대해서도 의심을 가질 것이다.
아무래도 형준이 갖고 있던 파일까지 터트린 건 무리가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없던 일로 할 수도 없고.
절대 해인의 명예가 회복되어서는 안 된다.
엘브의 직원들에게 해인은 능력도 없이 회사를 탐내는 존재여야 하며 전남편을 쓰레기 취급하는 오만한 여자여야 했다.
“그래서 그 파일은 공개한다던가?”
“일단은 모두 덮기로 했다고 합니다. 없었던 일로 하자고 두 분이 합의를 본 것 같던데요.”
“역시, 그럴 줄 알았네. 그런데 해인이 전남편이 한 차장을 고소한다고 난리를 쳤다는군. 혹시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으면 어쩌나 싶어서 자네를 찾아왔네.”
고소라고?
전남편 주제에 또 해인의 일에 간섭하는 그가 형준은 탐탁지 않았다.
파일을 올렸던 그 날 주 사장을 만나고 온 부친은 아주 오랜만에 골프채를 휘둘렀다.
잘 피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어렸을 때처럼 어디든 맞아서 멍이 들었을 것이다.
부친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따위 짓을 저질렀냐고 물었지만, 해인을 며느릿감으로 처음 점찍은 사람은 오히려 부친이었다.
마침 이혼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시작된 일이었었다.
오래전 저를 외면하고 가 버린 해인을 살짝 밟아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물론 처음 그 파일을 들고 해인을 만났을 때는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었다.
하필이면 윤지훈이 다시 끼어들어서 이 사달이 날 줄 누가 알았겠나.
“그건 왜 안 터트리지? 내가 지난번에 준 것들 말이야. 이미 특별판으로 나왔다고 들었는데…….”
난영은 상황이 불리해지기 전에 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다시 형준이 움직여 줘야 했다.
“생각 중입니다만…….”
형준이 뒷말을 흐렸다.
이대로 마무리 될지도 모르는데 굳이 여기서 더 나가도 되는 건지…….
부친은 주 사장이 절대 혼자 죽을 사람이 아니니 더는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해인을 만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잠시 추억을 떠올리며 즐기고 싶었을 뿐이다.
결혼까지 하면 더 좋은 일이었고.
형준은 기왕 이렇게 된 거 마지막으로 해인을 한 번 더 만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