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 밀고 당기라는 조언. (54/92)


54. 밀고 당기라는 조언.
2022.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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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 씨. 기획팀 한 차장님 휴직 신청하신 거 알아요?”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우영의 파티션 너머로 친근한 얼굴이 넘어왔다.

민서는 여전히 우영이 편하고 좋은 것 같았다.

말의 내용만 아니라면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해인의 입가로 미소가 지어졌을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한 차장 이야기인지라 안 들리는 척 고개를 숙이고 귀를 쫑긋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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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직이요?”

우영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한 차장이라면 얼마 전 팀장님과 한판 붙은 여자분이었던 것 같은데…….

사실 크게 궁금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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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요. 부사장님께서 불러서 올라갔다 오신 후로 뭔가 이상해졌다 하더라고요. 약간 의기소침해졌다고나 할까. 그 후로 며칠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더니 갑자기 휴직 신청을 하셨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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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때문에…….”

부사장이라는 말에 우영의 표정이 달라졌다.

우영이 관심을 보이자 민서가 배시시 웃으며 머리를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귀 뒤로 넘긴 머리카락 한 올이 찰랑거리며 넘어왔다. 민서는 개의치 않고 속삭이듯 우영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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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다른 건 모르겠고, 지금 그 일로 소문이 돌고 있거든요. 그게 익명이어야 하는데, 익명 보장이 안 되는 것 같다고 말이 많아요.”

익명? 두리뭉실한 말이었지만 우영은 그 뜻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설마 한 차장이 그 파일을 올렸나? 그래서 부사장이 한 차장을 불러서 겁박이라도 한 건가.

우영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해인을 향하던 찰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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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서 씨. 점심시간 끝났으니까 얼른 가요.”

민서는 나름 속삭인다고 했지만, 사무실이 조용했기에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예민한 사안인지라 승윤이 민서에게 눈치를 준 것이었다.

민망해진 민서가 간단한 고갯짓으로 인사를 한 후 사무실을 나섰다.

우영이 손가락으로 볼펜을 굴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사생활을 공개한 것보다 익명 보장이 안 되는 것에 사람들이 더 민감한가. 사안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번 일로 또 곤란해지는 것은 역시나 제 친구일 것이다.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 우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곧장 걸어서 해인의 옆으로 가더니 노크를 하듯 책상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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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이야기 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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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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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다짜고짜 나오라 말한 우영이 먼저 사무실을 벗어났다.

괜스레 팀장과 심 대리의 눈치가 보인 해인이 재빨리 일어나 그를 따라갔다.

등 뒤로 뜨거운 시선이 날아오는 것 같았지만 그냥 모른 척했다.

밖으로 나온 우영은 해인을 데리고 옥상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사람이 많은 휴게실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였다.

옥상 위로 펼쳐진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그 맑은 하늘을 느낄 새도 없었다.

뒤따라 온 해인을 향해 우영이 대뜸 파일 이야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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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 거야? 그 파일. 한 차장은 또 뭔데.”

파일이 터진 지가 언젠데 이제 와서 묻는 걸까.

그동안 참 궁금했을 텐데…….

입이 가벼운 친구가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이럴 때 보면 새삼 놀라웠다. 그동안 섣부른 질문을 하지 않은 것도 자신을 위해 배려한 것이었을 것이다.

새삼 그 마음이 고마웠다. 그런 우영인 만큼 해인은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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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의 내용은 너도 들어서 알 거고, 한 차장이 그 파일 올린 것도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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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뒤가 안 맞잖아. 그래. 세나는 네가 때렸다 치자. 세나가 그동안 한 짓도 있으니까. 그리고 네 새엄마한테도 한소리 할 수 있지. 좀 당하고 살았냐고 네가. 근데 윤지훈 쓰레기는 좀 아니잖아. 그 말이 진심이었으면 지금 너와 부사장의 관계가 웃기잖아.”

우영은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말했다.

해인이 멋쩍게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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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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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를. 계단으로 부사장실 왔다 갔다 하는 거? 아니면 부사장이 너만 졸졸 따라다니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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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그, 그 정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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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봐. 대체 무슨 일인지. 한 차장은 뭣 때문에 그 파일을 올린 거야? 정말 부사장님이 한 차장 처리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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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그건. 도둑이 제 발 저린 거지. 그 음성 파일도 악의적으로 편집된 거야. 그리고 지훈 씨는, 그러니까 부사장님은 지금 한 차장의 휴직 승인 미루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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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이었어? 그래. 어쩐지 이상하긴 하더라. 그럼 세나가 편집해서 한 차장에게 준 거야? 결국 네 새엄마가 지시한 일이겠네.”

우영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나왔다.

이제야 모든 의심이 풀리는 것 같았다. 얼마나 악의적인 편집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 해인의 위상이 깎인 것이 사실이었다.

두 모녀는 아마도 그것을 원했을 것이다.

아무리 계모라지만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었다.

왜 해인의 삶은 늘 이렇게 고단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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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와줄 일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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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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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 자문 안 필요해? 아니면 변호사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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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필요하면 말할게. 지금은 괜찮아.”

해인이 차분히 대답했다.

친구라서 그런지 딱히 감추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지훈의 도움만으로도 충분했다.

해인은 우영에게 다른 것이 더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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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우영아! 네가 듣기에 이 회사 내가 가질 거야, 는 어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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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주 웃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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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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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답지 않기도 하고, 포부는 좋은데 너처럼 맹한 애가 그걸 해낼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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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어째? 내가 맹하다고? 나한테 맹하다고 하는 애는 너밖에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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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오래 봤으니까 내가 제일 잘 알지. 아마 정답일걸?”

싱긋 웃으며 대답하는 우영의 표정은 짓궂기까지 했다.

하여간 말을 말아야지.

해인이 흘깃거리는 눈으로 우영을 째려보다 이내 손부채질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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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그렇게 힘들게 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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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갑자기 무슨 말이야?”

해인의 시선이 다시 우영에게로 향했다.

거의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뭔가 핵심을 찔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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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장 옆에 있으니까 계속 힘들잖아. 사랑이 뭐 별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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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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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헤어지는 것 같더니 왜 또 시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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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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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생각해. 굳이 험난한 길 가지 말고. 사랑? 개나 줘 버리라고 해. 그딴 것 없어도 사람은 다 살게 되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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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렇기도 한데, 그게 또 그렇지가 않더라고. 너라면 어떨 것 같아?”

해인은 순수하게 물었다.

만일 그게 가능하다면 너라도 그렇게 살라며 응원해 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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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 개나 줘도 시원찮을 것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왔다 갔더라고. 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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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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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괜찮아. 잘 살아져. 그러니까 너도 굳이 어려운 길 가지 말고 편하게 살아. 인생 별거 없다.”

사랑과 인생에 대해 독설을 퍼부은 우영이 그렇지 않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우영에게 여자가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사랑이 왔다 갔다니 해인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졌다.

물론 우영이 모태 솔로는 아니었다. 군대 가기 전까지 과 동기와 연애를 했었고 자연스럽게 헤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혹시 최근에 재회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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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 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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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그리고 오래전에 네 옆에 누가 있었는지 생각 중이야.”

대답하는 중에도 해인은 자신이 아는 모든 상황을 되짚어보았다.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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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무감하게 뱉어진 한마디가 가슴으로 툭 던져지듯 날아왔다.

뭔지 모를 울림이 해인의 가슴을 덮쳤지만, 그것을 깨닫기엔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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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넌 똑똑해서 좋겠다. 너라도 편하게 살아서 진짜 다행이야.”

해인은 진심으로 친구의 편함을 응원해 주었다.

그렇게라도 잘 살 수 있으면 좋은 거지, 뭐.

어쩌면 제게 있었던 두 번의 헤어짐도 그 편함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우영의 말대로 다시 지훈과 재결합을 한다면 시댁에서 좋아하지 않으실 것이다. 특히나 시어머니가 지훈과 수빈의 결혼을 원한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재벌들의 결혼이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자주 봐 왔기에 그 결혼에 사랑이 없다고 해도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 그림을 예상하며 지훈을 매몰차게 떼어내기도 했었지 않은가.

근데 우영아!

그 사랑이 별거 아닌 게, 아니더라.

옥상을 넘어온 바람이 해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가을의 끝을 알리듯 바람은 차가웠지만, 다시 피어오른 사랑 때문인지 해인은 그 바람이 차갑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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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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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랑 만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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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차장 만난 후 과천으로 가서 어떤 남자를 만났답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안성 모직 사옥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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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모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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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자세히 알아보니 거기 둘째 아들 안형준과 형수님, 그리고 세나 양까지 전부 안면이 있는 사이라고 합니다. 가족끼리 식사를 했던 이력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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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았네. 이 새X.”

지훈이 흥분한 얼굴로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동안 지훈은 난영에게 미행을 붙여 그녀가 누구를 만나는지 감시를 했다. 한 차장은 당연히 만날 것이라 예상했지만 파일에 있는 그 남자를 직접 만날 것인지에 대해서는 미지수였다.

그런데 버젓이 그놈을 만났다는 것이다.

책상 위에 올려진 주먹이 누구라도 한 대 칠 것처럼 꿈틀거렸다. 전우애를 느낀 상진의 주먹도 덩달아 꿈틀거렸지만,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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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착하셔야 합니다.”

상진이 대단히 중요한 말이라는 듯 목소리에 힘을 잔뜩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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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침착할 수가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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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나 양을 만나서 나머지 원본 파일을 확보하실 때까지는 절 믿으시고 기다리세요. 전적으로 절 믿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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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필요 이상으로 비장해진 상진을 지훈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 그럴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진이 매번 우리 형수님이라며 해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끔찍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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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일단 두 사람 만나는 거 CCTV 확보해 놓고 그놈은 조금 기다렸다가 나중에 처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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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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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나는 아직도 연락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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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이 켜질 때도 있는데 받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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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은 확인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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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요? 확인했으면 연락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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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수고했고, 그만 퇴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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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랑 술 한잔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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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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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형수님한테 가십니까? 너무 그렇게 찾아가면 재미없어요. 남자가 너무 그렇게 죽고 못 사는 티를 내면 여자들도 금방 질립니다. 잡아 놓은 고기에게 밑밥 주는 것 봤습니까? 연애는 원래 밀고 당기는 게 제맛입니다.”

상진의 입에서 해인이 했던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솔직히 요즘 지나치게 매달리긴 했다.

근데 너무 좋은 걸 어떡하나.

또한, 지금은 밀고 당길 때가 전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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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밀고 당길 자격이나 있어? 잘한 게 하나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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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더 밀고 당겨야죠. 사랑이든 경영이든 모든 것엔 전략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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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말을 신뢰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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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죠. 그동안 무리하셨는데 가서 전어에 소주 한잔하시면 피곤이 좀 풀리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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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어? 전어 철 지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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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무렵이긴 해도 전어는 거짓말을 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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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회 먹으면 장염 걸릴지 몰라. 요즘 장이 좀 예민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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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에 먹으면 괜찮습니다. 한잔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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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완벽해서 탈 나면 안 되는데. 완벽한 남자가 장염 걸려서 화장실 들락날락하면 좀 웃기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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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걱정을 다 하십니다.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 * *

습관처럼 오던 남자가 오늘은 연락도 없다.

내일이 토요일이니 같이 늦잠도 자고 함께 브런치를 먹으러 갈까 생각했는데…….

기껏 본가로 가라며 구박할 때는 언제고 오늘은 또 이런 계획을 세웠던 걸까.

해인은 괜히 마음이 울적해져서 거실을 서성였다.

벌써 아홉 시.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전화 한 통이 없네.

본가로 갔으면 갔다고 말이나 해 줄 것이지.

먼저 전화해 볼까.

두어 번 망설이다 결국 테이블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저장된 지훈의 번호를 눌러 통화를 시도했지만, 신호음만 울리고 연결되지는 않았다.

바쁜 일이 있나 보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뭔가 아쉬웠다.

그렇게 해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한 시간 동안 거실만 서성였다.

혹시나 부재중 전화를 확인한 지훈에게 연락이 올까 봐 손에 핸드폰을 들고 있었지만 감감무소식이다.

아무 생각 하지 말고 텔레비전이나 봐야겠다 싶어 리모컨을 찾는데 이럴 땐 또 리모컨도 안 보였다.

에라 모르겠다 싶은 해인이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보았다.

신호음이 울리고 한참 만에야 연결된 핸드폰 너머로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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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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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비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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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형수님. 저 하 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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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 씨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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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장님은 지금, 아 그게 급한 일이 생기셔서 출장을 가셨는데, 여튼 지금 좀 바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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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토요일인데 이렇게 갑자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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