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난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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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난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2022.06.09.
“그게, 그러니까 갑자기 그렇게 됐습니다. 형수님.”
하 비서 말투에서 당황스러움이 느껴졌다.
하 비서 말은 반만 믿어야 하는데…….
바쁘다는 말이 거짓일까, 출장이 거짓일까.
“하 비서님? 지훈 씨 정말 출장 간 것이 맞아요? 사실대로 말해 주세요.”
“다, 당연히 정말 출장 간 것이…….”
“하 비서님. 제가 하 비서님 많이 신뢰하시는 것 아시죠? 하 비서님이 지훈 씨 곁에 있어서 늘 안심되고 믿을 수 있고 그래요.”
“아이고. 형수님. 저도 형수님 참 많이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그게 사실은요…….”
해인이 상진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듣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전해 듣고 나서는 딱히 몰라도 될 일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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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 입이 어떻게 그렇게 가벼울 수가 있냐?”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형수님의 거룩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그만…….”
“아무리 그렇다고 그것 하나 비밀로 못 하냐고. 어차피 내일 퇴원할 건데.”
“지송, 합니다.”
“지송? 죄송도 아니고 지송?”
확 그냥 저걸 죽일 수도 없고.
화가 난 지훈이 상진을 째려보았고 상진은 먼 산 보듯 창밖을 내다보았다.
지훈을 입원시킨 상진이 휴게실 자판기에서 콜라를 뽑고 있을 때 해인의 전화를 받았다. 진실을 말해 달라는 거룩한 목소리에 차마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다.
결국, 지훈이 장어를 먹고 장염에 걸려 입원 중이라는 것을 실토하고야 말았다.
지훈이 필사적으로 알리고 싶지 않아 하는 그 진실을.
속으로는 누구라도 그 거룩한 목소리를 들었다면 어쩔 수 없었을 거라는 핑계를 대며.
일단 콜라를 마시고 입원실로 돌아와 해인이 병원으로 오고 있음을 알렸다.
지훈은 그때부터 저를 들들 볶고 있었다.
“네가 알아? 난 육체와 정신에 깃든 모든 것이 완벽해. 우리 해인이가 나에게 완벽하다고 한 건 괜히 한 말이 아니거든.”
“형수님이 그 정도로 말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함축 몰라? 완벽하다는 그 말에는 아주 많은 의미가 담겨 있거든. 근데 네가 망쳐놨어. 내가 너 때문에 지금, 이 꼴이 됐잖아.”
그때였다.
지훈이 아랫배를 움켜잡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또 장이 부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지사제를 먹었는데도 아직 배탈이 잡히지 않는다.
해인이 오고 있다고 했는데.
출장 갔다고 대충 둘러대라고 했더니 저 입 싼 비서가 냉큼 급성 장염임을 알렸다고 한다.
퇴원하면 비서부터 갈아치워야겠다. 침대에서 일어나 링거 거치대를 잡고 막 화장실로 향하던 찰나였다.
VIP 병실 문이 열리고 해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화장실로 가던 지훈이 그대로 굳었다.
“지훈 씨.”
“여길 뭐하러 왔어?”
해인이 반가웠지만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필이면 들어오는 타이밍마저 별로라서 도저히 반갑게 맞을 수가 없다.
“아프다고 해서…….”
“괜찮아. 그냥 가.”
“아픈 사람 두고 어떻게 그냥 가요.”
“아프긴. 괜찮아. 안 아……, 읍. 잠깐만.”
말을 멈춘 지훈이 엉거주춤 화장실로 향했다.
링거 거치대를 밀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우스웠지만 그렇다고 웃을 수도 없었다.
해인이 침대 옆에 서 있는 하 비서에게 다가갔다.
민망한 듯 서 있던 하 비서가 해인을 향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살짝 머리를 숙였다.
“아직도 좋지 않은가요?”
“이제 시작이잖아요. 한 며칠은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갑자기 웬 전어를 먹은 거예요? 전어 철 지난 지가 언젠데…….”
“그거야,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러잖아도 속이 별로라고 그러던데 왜 전어를 먹어서는.”
“그러게나 말입니다.”
몇 마디 대화를 더 주고받는 사이 지훈이 밖으로 나왔다.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나온 그가 해인을 바라보며 퉁명스레 말했다.
“아직도 안 갔어?”
“이제 왔는데 어딜 가요. 몸은 괜찮아요? 장염 걸리면 몸살 걸린 것처럼 아픈데.”
“응. 괜찮아. 얼른 가.”
지훈이 마주 보던 해인의 시선을 외면하며 침대 쪽으로 향했다. 링거 거치대를 한편에 놓고 아주 불편한 자세로 침대로 올랐다. 왼손에 바늘이 꽂혀 있으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침대 위에 올라가서도 해인의 시선은 계속 외면했다.
그동안 완벽하다는 해인의 평가에 집착하고 있었기에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 몹시도 부끄러웠다.
“밤새 같이 있어 주려고 왔는데…….”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응?”
“하 비서님. 지훈 씨 잘 부탁해요. 뭐, 걸어 다니는 것도 봤고,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까 아무래도 저는 이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해인이 싱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고작 한 걸음을 뗐을 뿐인데 등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잠깐만.”
“왜요?”
돌아서는 해인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갔다.
계속 눈을 피하는 걸 보니 정말 저런 모습을 보이기 싫은 건지, 돌아가 주는 게 더 도움이 되는 건지 속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그런데 역시 진심으로 가기를 바랐던 건 아닌 것 같다.
“꼭 있어야겠다 싶으면 있어도 돼.”
무슨 말이 저럴까. 하여간 곧 죽어도 자존심을 버리기는 싫은가 보다.
해인이 몸을 돌려 지훈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생각해 보니까 집에 가서 할 일도 있고…….”
“아니야. 생각해 보니까 하 비서 보다는 우리 해인이가 나을 것 같아.”
당연히 그래야지.
사람이 살다 보면 장염에 걸릴 수도 있지 그게 뭐가 부끄럽다고 출장 갔다고 거짓말까지 하냐고.
해인이 웃으며 지훈을 바라보자 상진이 자신의 옆에 있던 의자를 내어주었다.
지훈이 바늘이 없는 손을 내밀어 해인의 손을 잡았다.
지훈은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전어로 인해 상처받은 마음에 적잖은 위로를 받았다.
해인이 남은 한 손으로 꼼꼼하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딱히 아픈 사람 같지 않아서 한시름 놓고 나니 잘생긴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이 남자는 오늘도 이렇게 멋졌겠구나. 어쩜 환자복도 이렇게 잘 어울릴까. 지훈이 입으니 환자복도 명품이 되는 느낌이었다.
“지금 내가 이러는 건, 내 탓이 아니야.”
“…….”
“전어가 문제였어. 나올 때부터 색깔이 별로더라고.”
“그랬으면 먹지를 말았어야죠.”
“하 비서가 자꾸 맛있다고 먹으라잖아. 소주에 한잔하자고. 나는 오늘도 해인이랑 같이 보내려고 했는데 하여간 뭐라 뭐라 하면서 같이 전어에 소주 한잔하자고 날 꼬시더라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먹었고, 결국 이렇게 된 거야.”
정말 하 비서가 먼저 먹자고 했나?
아깐 그런 말 없었잖아.
해인이 고개를 돌려 상진을 바라보았다.
상진은 어느새 침대 맞은편에 있는 소파에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중이었다.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니 뭔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표정만으로는 크게 죄책감은 없어 보였다.
전어 먹자고 했다고 사람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
해인이 그러냐는 듯 가볍게 대꾸해 주었다.
“안타깝네요.”
“완벽한 남자는 고작 이런 식으로 아프면 안 되는데…….”
“완벽한 남자라고 장염을 피해갈 수는 없어요.”
“있어. 난 원래 감기도 잘 안 걸리는 사람이야. 나랑 3년 살면서 내가 감기에라도 걸린 걸 봤어?”
“그건……, 아니죠.”
“거봐. 난 원래 아주 건강해. 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난 완벽하니까.”
“그걸 자꾸 그런 식으로 연결하지 말아요.”
그놈의 완벽이 병실에서도 계속되고 있었다.
설마 하 비서에게도 그 파일을 들려 주었을까. 해인이 민망한 표정으로 하 비서를 바라보았다.
하 비서가 아까와는 달리 딱 재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훈을 보고 있었다.
아마도 들은 모양이었다.
뭔가 큰 죄라도 지은 듯 해인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실 그 파일을 듣지 않았더라도 지금 지훈이 하는 말 자체가 재수 없게 들릴 것 같기는 했다.
“해인이는 밥 먹었어?”
“먹었어요.”
“누구랑?”
“혼자요.”
“내가 가려고 했는데. 가서 같이 저녁도 먹고 내일까지 같이 있으려고 했었는데 혼자 먹게 해서 미안해.”
“괜찮아요.”
“이건 나 때문이 아니야.”
“그래요. 전어가 잘못했어요.”
“전어를 먹자고 한 상진이 놈이 잘못이야.”
“그래요. 전어랑 상진이 놈이 잘못했어요.”
얼떨결에 말을 따라 하다 보니 하 비서를 욕하고 말았다.
해인이 미안한 얼굴로 상진을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하 비서님. 생각 없이 말하다가 그만 실언을 했네요.”
“형수님이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먼저 한 놈이, 아! 죄송합니다. 그 말이 전염력이 강하긴 하네요. 먼저 하신 분이 잘못이겠죠.”
아무래도 하 비서는 고의로 따라 한 것 같았다.
지훈이 얼굴을 팍 구기며 상진을 노려보았다.
“아니. 난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난 완벽하거든.”
해인은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괜히 왔나. 그냥 다시 갈까. 아니, 아까 그냥 갔어야 했어.
완벽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만감이 교차했다.
저 입을 꿰맬 수도 없고, 라고 생각하던 해인이 홱 고개를 돌려 지훈을 바라보았다.
꿰매지는 못해도 테이프로 붙일 수는 있지 않나, 라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지훈이 갑자기 시뻘게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급하게 화장실로 향했다.
링거 거치대를 쓱쓱 밀면서 엉거주춤 가는 모습에 이번엔 정말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이를 물고 웃음을 참았는데 어쩌다 하 비서와 시선이 마주했다.
그 역시 입술을 앙다물고 합죽이처럼 합을 하고 있었다.
해인이 먼저 시선을 외면했다.
그리고 결국 창문을 바라보다 혼자 빵 터져 버렸다.
한참 웃고 있는데 등 뒤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숫자 10을 세고 난 후 심호흡을 했다.
그렇게 마음을 진정하고 상진의 얼굴을 다시 마주했다.
상진은 때는 이때다 싶어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우리 부사장님이 몸보다는 정신이 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원본 음성 파일을 들으신 후 사람이 조금 이상해졌습니다.”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차라리 쓰레기가 나을 뻔했어요.”
“그러니까요.”
“왜 그러셨어요.”
“죄송합니다.”
“아무리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애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저렇게 춤을 계속 추면, 그러니까 그 칭찬을 온 세상이 다 알도록 말하고 다니면, 보통은 미친X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말을 조심해 주세요. 밑에서 모시는 사람 생각도 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았어요. 조심할게요. 하 비서님.”
몹시도 민망한 해인의 사과가 거듭되었다.
때마침 지훈이 밖으로 나왔다.
“무슨 말 했어?”
“그냥 별말 안 했습니다.”
“무슨 말을 한 것 같은데. 아무튼 됐고, 넌 이제 가봐.”
가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상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형수님 밤새 고생하십시오.”
“그래요. 조심해 가세요. 하 비서님.”
상진이 나가고 나니 그러잖아도 큰 병실이 더 크게 느껴졌다.
VIP 병실이라 그런지 컴퓨터도 있었고 침대도 호텔급이었다. 소파도 꽤 넓어서 밤을 보내기엔 괜찮을 듯했다. 장염 때문에 이런 병실에 입원한 환자가 몇이나 될까.
하여간 하 비서도 좀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지금은 좀 어때요?”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증세가 심하니까 입원하라고 했겠죠.”
“의사가 하라고 한 거 아니야. 응급실에서 치료받고 있는데 하 비서가 냉큼 입원 절차를 밟았더라고. VIP 병실이 하나 남았으니까 거기서 쉬라고. 어차피 집도 절도 없는 몸이니까.”
정확히는 가시다 차에서 일을 치르시면 자기가 곤란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곤란한 말을 해인에게 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만으로도 지훈은 충분히 절망스러웠다.
“어쩌다 이런 꼴을 보여주게 됐을까.”
“자괴감 느낄 필요 없어요.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아니. 그럴 수 없어. 난 완벽하거든.”
“네. 뭐.”
하 비서에게 테이프나 사다주라고 할 걸 그랬다.
설마 밤새 이런 투정을 들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아픈 사람이니 오늘은 일찍 잠이 들 수도 있다는 것에 해인은 한 줄기 희망을 걸었다.
“피곤한데 뭘 여기까지 오고 그래. 장염이 별거라고.”
“입원했다고 하니까.”
“그래서 걱정했어?”
“그랬으니까 왔겠죠. 근데 오자마자 가라 그러고.”
해인이 짐짓 서운하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무슨 말이 돌아올까 기다리고 있는데 지훈의 표정이 어느새 진지해졌다.
“나는 완벽하다는 말, 이제 그만할까?”
기대와는 다른 말이었지만 갱생의 여지는 있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