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사랑받고 싶어.
(56/92)
56. 사랑받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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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사랑받고 싶어.
2022.06.12.
“알고는 있었어요?”
“하 비서가 나를 재수 없게 생각하는 거?”
돌려 말할 단어를 찾던 해인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는 해인이는 어때?”
“나는 그래도 내가 말한 거니까 나름 들어줄 만은 한데, 한 번씩 아주 조금 짜증이 날 때가 있긴 해요”
“그럴 땐 어떻게 참았어?”
“그냥, 저 입을 꿰매야 하나……, 그런 생각 하면서…….”
좋은 말이 아니었음에도 지훈의 얼굴엔 반질반질한 미소가 흘렀다.
그 웃음에 민망해지는 것은 해인이었다.
태도를 보니 그는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별로 상관없는 타입인 듯했다. 그래. 그래야 윤지훈이지.
“짜증 내는 것도 귀여워서 멈출 수가 없었어.”
“그래서, 앞으로는 멈출 생각인가요?”
“별로 그럴 생각 없는데?”
“그럼 왜 물어봤어요?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보통 그런 질문은 갱생의 의지가 있을 때 하는 거 아닌가?
“짜증 내며 얼굴 찡그리는 것도 귀엽거든. 그렇게 자꾸 귀여우니까 내가 어쩔 수가 없지.”
앞으로도 계속한다는 소리구나.
차라리 말을 말자 싶어 포기하고 있는데 마냥 좋다는 듯 웃은 지훈이 팔을 벌려왔다.
해인은 의자에 앉아 있고 지훈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저 상황에서 팔을 벌리면 일어서서 안기라는 건데…….
자세가 나오려나.
일단은 환자가 원하니까, 라고 생각한 해인이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 대충 그의 팔에 몸을 밀어 넣어보았다.
안기긴 했지만, 모양새가 이상했다.
지훈 역시 뭔가 아쉬운 표정이다.
“올라올래?”
“어딜요?”
“침대로.”
“환자 침대에 함부로 일반인이 올라가면 안 되거든요.”
“내가 괜찮은데 뭐 어때.”
“그래도 안 돼요.”
“그럼 이따가 어디서 잘 거야?”
“소파에서.”
“그럴 수는 없지. 소파에서 자면 불편하잖아. 내가 거기서 잘게. 해인이가 침대에서 편하게 자.”
“괜찮아요. 거기 있어요. 아직 잘 것도 아닌데…….”
해인이 서둘러 말려 보았지만 지훈은 이미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해인의 손을 잡고 함께 소파로 향했다.
나란히 앉음과 동시에 지훈의 손이 해인의 어깨 위에 걸쳐졌다. 아픈 사람이 이렇게 앉아 있어도 되는 걸까.
“힘들지 않아요? 장염 걸리면 열도 나고 그러던데.”
“일찍 항생제를 써서 그런지 나름 견딜 만해.”
“그만해서 다행이에요.”
“걱정해 주니까 기분이 좋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픈데 걱정하는 것이 당연하지. 해인은 별것이 다 고맙다고 중얼거리며 그의 품을 의지해 몸을 기댔다.
“힘들면 말해요.”
“괜찮아. 편하게 있어.”
“그건 내가 할 말이거든요.”
“아무나 하면 되지.”
몸도 마음도 이미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듣고 싶은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행복이었다.
지훈이 아픈 와중에도 해인은 그 소소한 행복에 한없이 젖어 들었다.
이후 다행스럽게도 지훈의 배탈은 멎었고 그런 이유로 두 사람의 몸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물론 병원이기에 언제 간호사가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니 사실 나란히 앉은 그마저도 조심스러웠다.
빛의 속도로 입맞춤이 오가긴 했다.
간혹 브레이크가 걸려 맞물린 시간이 길어지긴 했으나 그것도 지나치게 길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결국엔 두 사람이 같이 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해인이 소파에서 자면 지훈이 바닥에서 잘 거라며 협박 아닌 협박을 했기 때문이었다.
밤새 내려갈 타이밍을 살피던 해인은 지훈이 깊이 잠이 들자 귀여운 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침대를 내려왔다.
아침이 됨과 동시에 지훈은 퇴원을 했고 해인의 집으로 함께 들어갔다. 자신은 환자의 신분이기에 간호가 필요하다는 명분이었다.
그즈음 지훈은 완벽하지 않은 것도 나름 괜찮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번처럼 서로 기대고 지지해 주며 살 수 있는 남자도 괜찮다고.
.
.
.
역시 집이 최고였다.
샤워를 하고 나온 지훈이 가운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침대에 누웠다.
몸을 따듯하게 해야 한다며 해인이 잠옷을 건네 보았지만 그는 한사코 필요 없다고 거절했다.
이불이라도 덮으라 해도 보란 듯이 가슴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분간은 과일이나 유제품은 안 되고 익힌 음식 먹어야 한다고 했어. 죽도 웬만하면 전복 같은 거 넣지 말고 소금도 넣지 말라고 했고.”
“그럼 하얀 쌀죽 끓여 줄게요.”
“해인이 힘들잖아.”
“괜찮아요. 쉬고 있어요.”
주방으로 나가려고 몸을 일으키려던 해인의 등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왜요?”
“나 열나는 것 같아.”
“열이요?”
침대 귀퉁이에 앉아 해인이 누워 있는 지훈의 이마에 손을 얹어 보았다.
그냥 미지근했다.
“적당한데요?”
“그럼 몸에서 나나? 으슬으슬 추운 것도 같고 살살 아프고 그러네.”
“내가 옷 입으라고 했잖아요. 아님 이불이나 덮든지.”
“아, 춥기보다는 그냥 살이 아픈 것 같아.”
“의사 선생님이 그랬잖아요. 한기가 들거나 몸살기가 있을 거라고. 장염이 그렇다고. 근데 약에 항생제 처방해서 먹고 있으니까 괜찮을 거라고도 했는데…….”
“아냐. 약을 며칠 더 먹어야 하나 봐.”
“그래요. 쉬고 있어요.”
“그래. 미안. 내가 해인이 수고스럽게 해서.”
“괜찮아요.”
안방을 나오는 해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병원을 나오기 전까지는 괜찮았다.
일어날 때만 해도 이제 다 나은 것 같다고, 몸이 아주 거뜬하다고 가벼운 운동과 스트레칭까지 했었다.
운전도 직접 해서 돌아왔는데 들어오기 전 하 비서와 잠깐 전화 통화를 하더니 그때부터 갑자기 아프단다.
장염에 걸리면 원래 몸살기가 있고 아프기도 한데, 분명 아침엔 괜찮다던 사람이 갑자기 저러니 뭔가 이상했다.
일단 주방으로 간 해인이 쌀을 꺼내 씻었다.
하얀 죽을 무슨 맛으로 먹나. 달걀이라도 하나 넣어줄까 생각하다 이내 의사의 처방대로 하기로 했다.
막상 그렇게 죽을 끓이고 나니 맛이 너무 밍밍했다.
뭐, 내가 먹을 거 아니니까. 환자는 맛보다는 건강이지.
죽을 담은 그릇을 쟁반에 올려 안방으로 돌아왔다.
눈을 감고 있던 지훈이 희미하게 눈을 뜨고는 해인을 올려다봤다.
“왔어?”
“일어나 봐요. 죽 먹어요.”
일어나기는 하는데, 아프다는 듯 인상을 한껏 찡그리고 있었다.
“나, 숟가락 들 힘도 없다.”
있는 것 같은데……. 아침에 운동도 했잖아.
해인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그 말을 꾹 내리눌렀다.
“먹여 줄까요?”
“으응. 그럼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해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연기도 드럽게 못한다고.
이건 누가 봐도 나 아픈 척하고 있어, 라고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사랑은 이런 발칙한 거짓에도 속아주는 것이리라.
“아, 해요.”
지훈이 아이처럼 크게 입을 벌렸다.
아파도 입만 잘 벌리네. 날름날름 받아먹기도 잘하고.
해인이 웃음을 삼켰다.
그렇게 별 무리 없이 하얀 쌀죽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죽 쟁반을 주방에 두고 돌아온 해인이 냉큼 침대에 올라갔다.
해인이 그럴 줄 몰랐는지 지훈의 얼굴로 환한 웃음이 들이찼다. 아프다는 사람이 팔을 선뜻 내어주며 해인을 제 몸 가까이 밀착시켰다.
매끈한 가슴을 더듬던 해인이 속삭이듯 물었다.
“하 비서가 뭐라 그러면서 아픈 척하라던가요?”
“어? 무, 무슨 말이야?”
“하 비서가 코치한 것 같던데…….”
“아, 그게…….”
“완벽한 지훈 씨가 어쩌다 이런 아가가 됐을까요. 난 지훈 씨가 항상 믿음직했거든요. 거짓말은 하나도 못 하고 늘 진실만을 말하고 늘 완벽했던 지훈 씨잖아요. 언제 어디서든 듬직하고 자랑스러웠거든요. 자! 이제 말해봐요. 하 비서가 뭐라 그랬는지.”
“그, 그러니까, 사랑받고 싶으면 모성 본능을 자극하라고. 안 아파도 아픈 척하라고. 그럼 엄청 사랑받을 거라고, 했어. 하 비서가.”
지훈은 있는 그대로 실토했다.
하 비서가 당했다는 해인의 거룩한 목소리가 바로 이것이었다는 것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설마 화난 건 아니지?”
“사랑받고 싶어 하는 남자에게 화가 날 이유가 없죠. 연기가 좀 구리긴 했지만 나름 귀여웠어요.”
“정말?”
“그럼요. 마음껏 사랑해 줄게요. 계속해도 되는데, 대신 연기 좀 잘해 봐요.”
아!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연기고 뭐고 다 필요 없다. 그저 이 사랑스러운 입술을 간절히 맛보고 싶을 뿐이다.
지훈이 천천히 해인의 입술로 다가갔다.
마주 다가오는 입술로 인해 촉촉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프다는 사람이 타오르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뜨거워지는 열기로 인해 지훈은 더 이상 아픈 척을 할 수 없었다.
* * *
일요일이 지나고 지훈은 멀쩡한 몸으로 출근을 했다.
해인의 극진한 간호 덕분에 금방 회복이 되었다고 했지만 사실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퇴원할 때부터 증세만 남아 있었지, 크게 아프지는 않았다는 것을.
지훈은 아주 건강하게 할 일 다 하면서도 아픈 척을 했고 해인은 그 아픈 척을 모두 받아주었다.
그렇게 행복한 이틀을 함께 보냈으니 더할 나위 없는 휴일이었다.
출근과 함께 지훈은 세나의 전화를 받았다. 상진의 협박이 어느 정도는 먹힌 듯했다.
약속 시각보다 이십 분이나 늦게 카페로 나온 세나는 진한 화장에, 과한 웨이브 머리까지 제대로 멋을 부리고 나왔다.
그런 짓을 하고도 저리 태연할 수 있을까 싶어 화가 치밀었지만, 지훈은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어떤 말에 반응한 거야?”
“반응이라뇨?”
“내 비서가 경고도 했고 회유도 했잖아. 둘 중에 어떤 거냐고.”
지훈의 냉정한 물음에 세나는 서운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물론 지훈의 비서가 남긴 음성 메시지 때문에 지훈에게 전화를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한때 처제였는데 잘 지냈냐는 인사도 한마디 안 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비서가 남긴 메시지도 그렇다.
퇴학도 부족해 돈줄도 막아 버리고 고개도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망신을 줄 거라며 법적 처벌까지 한다고 했다.
그나마 회유라고 한 것은 어쨌든 피가 섞인 동생이니까 빨간 줄은 안 긋게 해 준다는 것이 전부였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편집도 어차피 안형준이 해서 건네준 것이었다. 아무리 법을 모른다지만 그 일이 그렇게까지 큰일은 아닌 것 같아 그 경고가 마냥 두렵지는 않았다.
“둘 다 별로던데요?”
“닥치고 원본이나 내놔.”
지훈이 매섭게 쏘아붙였다.
세나는 움찔하면서도 기죽지 않고 답했다.
“없어요. 삭제했어요.”
“주세나!”
이름을 부르는 지훈의 목소리에 살기가 잔뜩 묻어났다.
아직은 참아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한 치의 죄의식도 느끼지 않는 모습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핸드폰으로 녹음했었지?”
“그랬죠.”
“그럼 핸드폰 내놔. 포렌식 할 거니까.”
“버렸어요.”
“장난해?”
아깐 삭제했다더니 이젠 버렸단다.
지훈은 세나의 말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하나의 증거를 없앤다고 해서 모든 것이 감춰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때 세나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흔들었다. 마치 새 핸드폰이라는 것을 보여주듯이.
지훈이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의자 뒤로 몸을 느슨히 기댔다.
“친한 친구가 검사야. 네 핸드폰 위치추적 그게 어려웠겠어?”
“…….”
“안 한 거야. 그만한 가치가 없어서. 공권력이 너같이 하찮은 애한테 쓰이면 그것만큼 낭비도 없잖아. 네가 어디 있는지 찾으려면 못 찾았을까. 그것도 하찮아서 관뒀지. 기다리면 이렇게 제 발로 올 거니까.”
“말 겁나 기분 나쁘게 해.”
“내가 네 친구야? 말 똑바로 안 올려?”
“나쁘게 해요, 됐어요? 아이 XX.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야 해?”
짜증이 극에 달한 세나는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사람처럼 가방을 꼭 붙들었다.
평소 하던 버릇이 있는지라 말이 좋게 나올 리가 없었다. 그런 세나를 보는 지훈의 눈이 더욱 매서워졌다. 여전히 말 똑바로 하라는 듯.
“있어야 해요. 근데, 이건 혼잣말이거든요?”
“시끄러우니까 입 다물고 내 말 잘 들어. 인트라넷에 올린 파일, 국과수에 보내면 편집된 것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어. 그 하찮은 일을 기어이 하게 할래? 네가 언니에게 한 짓을 네 대학 친구들이 전부 알게 뿌려 줘? 우리 해인이 차별받으면서 맞고 자란 것까지 전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