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소중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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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소중한 분.
2022.06.16.
세나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표정 관리를 하고 있지만 지은 죄가 있는지라 지훈의 엄포가 두려운 것은 사실이었다.
“회유를 좀 더 그럴싸하게 해 보세요. 나한테 뭘 해 줄 수 있는지…….”
“뭘 원하는데?”
“나중에 회사에 내 자리도 필요하고, 언니 아파트도 갖고 싶고…….”
“닥치는 게 좋겠다.”
원하는 것을 들어주려고 물은 말이라기보다는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궁금해서 물은 건데 역시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언니 아파트는 꿈도 꾸지 마. 회사에 들어오고 싶으면 언니처럼 능력이나 경력을 키우고. 근데, 그건 힘들겠지?”
통렬한 조롱이 세나의 아픈 곳을 찔렀다.
하나부터 열까지 언니와 비교하며 자라왔었다.
자신보다 예쁜 얼굴도 싫었고 공부를 잘하는 것도 싫었는데 저런 남자랑 결혼한 것은 더 싫었다.
저 남자만 아니면 이번 일도 대충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내 회유는 딱 여기까지야. 음성 파일 있는 핸드폰 빨리 넘겨.”
“생각할 시간을 줘요.”
역시 원본이 있는 것이다.
지훈은 속으로 쾌재의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반은 넘어왔으니 좀 더 확실한 경고가 필요했다.
“지금 당장 경찰에 가서 정식으로 사건 접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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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나에게 원본 파일을 넘겨받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지훈은 가벼운 마음으로 회사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동안 파일을 들었고 카리스마 넘치는 해인에게 또 반했다. 동시에 화가 난 것 같을 땐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겠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오후에 잡혀 있는 마케팅팀과의 회의 일정이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다.
공적인 자리이니 이런 마음들을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라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흐뭇한 일이었다.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적어도 심 대리가 지오의 이름을 꺼내기 전까지는 그랬다.
마케팅 전략과 예산 문제를 논의한 후 내년에 함께 할 모델 선정에 관해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심 대리가 기다렸다는 듯 거침없이 지오의 이름을 꺼냈다. 내내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잠잠해졌다.
냉엄하고도 차가운 지훈의 거절 때문이었다.
놀란 심 대리의 표정을 보며 지훈은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들려주었다.
“지오는, 절대 안 됩니다.”
“이……유가, 뭔가요?”
지훈의 표정이 오싹하리만치 차가웠기에 심 대리는 되물으면서도 등 뒤에서 땀이 나는 것 같았다.
분명 지난 회의에서 예산에 상관없이 전권을 일임한 것으로 생각하고 추진 중이었는데 단박에 거절이었다.
별다른 논의도 없이.
“여성복입니다. 당연히 여자 모델로 해야죠.”
“이번 기회에 패러다임의 전환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 말은 지오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막 신인이 된 여자 모델을 함께 쓰면 얼추 단가도 맞출 수 있을 것 같고…….”
“안 됩니다.”
지훈이 또다시 잘라 말했다.
심 대리는 당황으로 벌어진 입술을 다물지도 못하고 한참이나 미적거렸다.
“그, 그게, 그러니까 딱히 안 되는 이유라도…….”
“아까 말씀드렸잖습니까. 여자 모델로 찾아보세요.”
지훈이 워낙 단호하게 말하니 승윤과 우영마저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회의이니 얼마든지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고 모델에 대해 논의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물론 여성복에 남자 모델이 주가 되는 것은 누가 봐도 주객이 전도되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다기엔 뭔가 찜찜하다고나 할까.
그런 이유로 두 사람은 뭔가 알고 있을 듯한 해인의 눈치를 살폈다.
물론 해인은 고개도 들지 않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지오의 이름이 나온 그 순간부터 해인은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지오가 무슨 죄일까.
심 대리에게도 아무 죄가 없다. 외려 그녀의 열정과 도전정신에 손뼉을 쳐 주고 싶었다.
“해인 씨는 어때요?”
심 대리는 거의 울먹거리기 직전의 표정으로 해인에게 도움을 구했다.
하필이면 저런 공을 넘기는 심 대리가 원망스러웠지만 침울한 표정을 보니 차마 외면할 수도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결정의 순간이 왔다.
“일단 더 논의는 해 보는 게…….”
“그렇죠? 역시 해인 씨는 나와 마음이…….”
동의한다는 말이 아니었는데 심 대리가 덥석 해인의 말을 받았다.
“안 됩니다. 여자 모델로 알아보시고 그건 여기서 끝내기로 하죠. 다음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결국, 해인과 심 대리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그렇게 회의는 끝이 났다.
사무실로 돌아온 심 대리의 얼굴이 침울했다.
“뭔가 이상해요. 이제껏 경험한 부사장님은 굉장히 열린 마인드였는데 오늘은 꽉 막힌 느낌이랄까요? 우영 씨, 오늘 부사장님 좀 이상하지 않았어요?”
“뭐, 제가 보기엔 원래 그랬던 것 같아서, 딱히…….”
우영이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준천에서의 일도 그렇고 이래저래 좋은 감정이 아니니 평가가 좋을 리 없었다.
“아니요. 이제껏 부사장님은 굉장히 젠틀하시고 아랫사람이 이야기하시는 것도 경청하시면서 잘 들어주시고 그랬거든요. 오늘처럼 답답하고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고요.”
“몇 번이나 봤다고…….”
“보면 알아요. 해인 씨는 뭐 아는 것 있어요?”
“아, 아니요?”
알아도 모른 척해야 했다.
조직의 평화를 위해서.
오후 내내 우울했던 심 대리는 퇴근 시간이 되어서야 기분이 풀렸다.
그녀를 위해 팀장이 긴급 회식을 제안했고 모두 소주에 감자탕을 마시며 지친 하루를 달랬다.
다른 일정이 있었던 지훈은 해인이 집으로 온 직후 도착했다.
당당히 비번을 누르고 들어오는 지훈을 바라보는 해인의 표정에 당황이나 불만은 없었다.
자기 집인 양 슈트를 벗고 늘 그랬던 것처럼 해인을 안는 모든 모습이 그저 자연스러울 뿐이었다. 심지어 이제는 원래 자신이 쓰던 방으로 가지도 않고 안방의 욕실까지 쓰고 있었다.
뭐, 그러려니.
그가 이 집으로 귀가한다는 사실이 내심 싫지만은 않은 것이 해인의 심정이었다.
“오늘 회의할 때 대단히 오버한 건 잘 알죠?”
“내가 뭘?”
머리에 묻은 물기를 마저 털어낸 지훈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수건을 목에 걸치고 양손으로 끝을 잡고는 가슴을 쫙 펴고 선 채로.
우람하고 탄탄한 근육 아래로 하체를 두른 타월 하나.
부러 아슬아슬하게 묶었는지 금방이라도 풀릴 것 같았다.
시도 때도 없이 저런 자세는 왜 하는 걸까.
봐 줄 사람도 없는……, 아! 있구나. 바로 나.
에이. 안 보고 말지.
해인은 부러 시선을 피하며 침대를 정리하는 척 베개를 탈탈 털었다.
“심 대리님이 많이 민망해했거든요.”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하니까 그렇지.”
“거절을 하더라도 일단 논의는 해 볼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단칼에 거절하면 의견을 제시한 당사자 기분이 어떻겠어요. 회의하는 자리였는데 회의도 못 해보고 의견을 묵살당한 기분을 지훈 씨는 전혀 모르죠?”
“그래서 우리 주해인 사원도 지오를 원하나?”
짐짓 찔린 지훈이 부러 화제를 전환했다.
“내가 지오를 원할 이유가 없잖아요. 만약 회사에서 지오가 필요하다면 그땐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어쨌든 나는요, 누구처럼 사적 감정으로 회사 일을 처리하지는 않거든요. ”
“우리 회사에 지오는 전혀 필요 없어.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일할 때는 사적 감정을 내세우지 않는다고.”
“아니요. 누가 봐도 오늘 지훈 씨는 아주 사적으로 회의를 주관했어요. 나는 얼마든지 지훈 씨를 이해할 수 있지만 다른 직원들이 행여 그 일로 지훈 씨를 안 좋게 볼까 걱정이라고요.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거절하더라도 좀 더 부드럽게 하려는 노력을 해 봐요.”
무슨 말을 해도 동요하지 않을 것 같던 얼굴이 비로소 구겨졌다.
미간에 실금처럼 주름이 잡히더니 뭐라 말하려는 입술이 달싹 다물려져 할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해인은 자신보다 훨씬 큰 남자를 어린아이처럼 안아 주었다.
“지훈 씨, 원래 그런 사람 아니니까 나 때문에 중심을 잃지 말라고 해 주는 말이에요. 알았죠?”
“알, 았어. 생각해보니까 난 집에서 일 이야기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
지훈이 제 실수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이상하게 해인과 관련된 모든 일에 사심이 들어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도 딱히 그럴 수 없을 것 같지가 않아 대답조차도 자신이 없었다. 그런 속마음을 감추는 것은 화제를 전환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세나에게 원본 파일 받았어. 이제 어떻게 할까.”
이미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해인이 무슨 말을 하든 그대로 실행할 생각이면서도 일단 그녀의 의사를 묻고 존중해 주고 싶었다.
해인의 얼굴에 머물러 있던 웃음이 사라졌다.
해인 역시 이미 생각한 것이 있긴 했는데 그게 최선인지는 확신이 없었다.
“일단 파일 조작인 것만 밝히고 사과문 올리는 것으로 마무리했으면 좋겠어요.”
“원본 파일은 공개 안 할 거야?”
“공개한다고 해도 내가 세나를 때린 건 바뀌지 않아요.”
“회사의 주인에 대한 가장 중요한 말이 있잖아. 어릴 때 당한 일도 살짝 나오고. 난 공개했으면 좋겠는데…….”
“아뇨. 전부는 싫어요. 일단 무작정 편집이라 하면 믿지 않을 사람도 있으니 그럼 중요한 그 일부만 공개하고 한 차장이 사과문 올리는 것으로 해요.”
이 일을 크게 만들면 부친의 비리에 대한 것까지 파고드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고, 그러면 일어서려 노력 중인 회사는 또 다시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
그것은 엘브에 소속된 직원들에게도 영향이 가는 일이기에 가급적 조용하고 강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지훈은 해인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단죄를 확실히 해야 뒤탈이 없을 텐데…….
파일의 남자인 안형준을 알게 된 것은 부러 말하지 않았다.
보나 마나 또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겠지.
이놈만은 정말 가만둘 수가 없었다. 법적으로도 그렇지만 인간적으로도 아주 뭉개버리고 말 것이다.
지훈의 입가로 사악한 미소가 흘렀지만 해인은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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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으로부터 특명을 받은 상진은 다음날 한승미 차장을 만났다.
만나기 전부터 묘한 전의와 쾌감이 그의 가슴을 불태우는 것만 같았다.
상진은 굳이 한 차장을 회사 근처 카페로 불러냈고 그녀는 상진을 보자마자 투덜거리기 바빴다.
“아니, 회사 근처 말고 다른 곳에서 만나자는데 왜 꼭 이런 곳으로 사람을 불러내요?”
“지은 죄가 많은가 봐? 근데 내가 바쁜 사람이라서 멀리 갈 시간이 없어.”
상진의 무심한 말에 한 차장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다짜고짜 반말에 지은 죄 운운하는 것이 몹시도 불쾌했다.
“저기, 왜 반말이에요? 나이도 내가 많은 것 같은데…….”
“많긴 할 거야. 근데, 나는 나한테 소중한 사람을 공격하면 사람 취급 안 하거든. 그리고 지금은 부사장님 대리로 나온 거라서.”
“이봐요. 부사장도 나보다 나이 어리거든요?”
“나이 많아서 대접받고 싶었으면 인간답게 살았어야지. 난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은 기본적으로 무시하고 싶어지거든.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은 부사장님 대리로서야. 직장에서 나이로 위아래를 가리나?”
상진의 경멸은 흡사 간악한 죄를 지은 인간에 대한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한 차장은 자신이 왜 저런 경멸을 받아야 하나 싶어 억울했다. 하지만 상진의 눈빛이 워낙 살벌해 되묻는 것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무슨 일로 부른 거예요?”
“뒤지기 싫으면 내가 원본 파일 줄 거니까 사과문 써서 같이 올려. 그럼 참작의 여지는 있어.”
상진이 거침없이 쏘아붙였다.
한 차장은 상진이 쓰는 저속한 말에도 놀랐지만, 원본이라는 말에 더욱 놀랐다.
“원본……, 이라뇨?”
“당신이 올린 파일은 편집된 거야. 세나가 원본 파일 주고 용서를 구하기로 했으니까 당신도 직접 사죄해.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진짜 뒤, 지, 기 싫으면!”
한 차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정확한 내막은 모르지만 뭔가 자신에게 불리한 일이 벌어진 듯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밀릴 수도 없었다.
“나, 나는 모르는 일이거든요. 세나 양이 편집했으면 직접 사과하라고 하세요.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니까.”
“아들이 둘이나 있던데, 엄마가 이딴 짓이나 하고 다닌 것을 알면 뭐라 할까.”
“아니, 남의 뒷조사도 하세요?”
“어. 뒷조사 그거, 내 전문이야. 그러니까 조심해. 혹시나 이상한 곳 들락거리다 걸리면 그것도 다 공개해 버릴 거니까.”
“말이 너무 심하지 않아요?”
“내가 원래 입이 좀 험해. 내 상사가 이런 일 하라고 나를 비서 자리에 앉힌 것 같아. 자기도 이러고 싶은데 사회적 지위가 있어서 못 하니까. 아주 못된 상사야.”
“아깐 소중하다면서요.”
“그거? 소중한 분은 상사 말고 우리 형수님. 차라리 부사장을 건들지 그랬냐. 그럼 가만있었을 건데…….”
상진은 부러 과장되게 험악한 모습을 자아내려고 애썼다. 형수님이 원하는 게 조용한 해결이라면 뒤에서 겁을 주는 게 가장 빠른 해결책이라는 판단이었다.
자연스러운 듯한 상진의 흉악스러움에 한 차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