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 집착하고 분노하는. (58/92)


58. 집착하고 분노하는.
2022.06.19.


형수님?

이혼한 상사의 아내를 저렇게 부르나?

한 차장은 아니꼬운 눈빛으로 상진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조롱을 담은 실소로 돌려준 상진이 USB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 앞으로 밀어주었다.


“나 휴직이라서 회사 안 나가는데, 그건 모르시나 봐요?”

“아직 승인 안 된 거 알아. 누구 빽인데 승인 없이도 회사를 안 나오나 많이들 궁금해하고 있더라. 얼른 기어 나와서 사과문 올리고 꺼지든지 해.”

“내가 끝까지 싫다면요?”

“아직 모르나 본데…….”

상진이 느슨하게 기댔던 몸을 앞으로 바짝 들이밀었다.

그렇게 한 차장을 노려보는 그의 두 눈동자에 힘이 잔뜩 실렸다.


“나는 눈 돌면 여자도 때려. 그러니까 진짜 험한 경험 하기 싫으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경고를 담은 목소리는 매섭다 못해 살벌했다.

물론 상진은 여자는커녕 남자도 때려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경고를 할 땐 협박처럼 해야 제맛이지 않을까.

상진은 그럴듯하게 깡패 흉내를 내는 자신의 연기에 매우 흡족해하고 있었다.

정신이 나간 듯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한 차장을 향해 입꼬리를 비틀며 웃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무리도 훌륭했어.

자축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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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고 왔냐?”

“적당히 하고 왔습니다.”

“사과문 올릴 것 같아?”

“아마도요?”

상진이 전리품이라도 챙겨온 듯 어깨를 으쓱하며 거들먹거렸다. 그 거들먹거림에도 지훈은 그를 치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어깨의 들썩거림이 확신과도 같은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설득했는지까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래. 잘했어.”

“뭘, 그 정도로 그러십니까.”

“고생했는데 같이 퇴근하고 밥이나 먹자.”

개선장군처럼 웃고 있던 상진의 얼굴이 돌연 찌그러졌다. 문득 떠오른 기억에 거부감부터 일었다.


“싫습니다.”

의자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걸어둔 슈트를 챙겨입던 지훈의 동작이 멈칫했다.

잘못 들었나?


“어?”

“싫다고, 했습니다.”

예상 못 한 거절에 지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상진을 바라보았다.


“싫어? 왜?”

“가셔서 형수님하고 드세요.”

“오늘은 약속 있다던데?”

“아, 저도 선약이…….”

“선약? 그런 말 없었잖아.”

“그런 말을 일일이 말하는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그리고 아직 음식 조심해야 하지 않습니까. 대단하신 장염을 앓고 계신데…….”

“다 나았어. 괜찮아.”

“부사장님이 다 나았든 말든 저는 선약이 있습니다.”

상진이 거절은 의외로 단호하고 완곡했다.

아무리 봐도 약속이 없는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지훈이 재차 물어보려던 찰나였다. 상진이 얼른 몸을 돌려 도망치듯 부사장실을 나가 버렸다.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던 지훈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뭔가 버려진 느낌인지라 괜스레 그놈의 전어가 또 미워졌다.
 

 

* * *

뭐가 그렇게 바쁜지 친구를 만난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지훈이 비서로부터 버림받은 그 시각 해인은 친구 소연과 만나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잠깐 통화를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졌고, 그러다 보니 저녁에 시간 되면 만나자는 말이 나왔고, 갑작스럽게 약속이 잡힌 것이었다.

소연과 함께 파스타를 먹으며 해인은 그동안의 변화에 대해 대충 이야기를 했다.

친구의 연애는 왜 저렇게 매번 아슬아슬한 외줄을 타는 것 같은지. 소연은 그저 잘되길 바랄 뿐이라는 말로 위로를 대신했다.


“우영이도 같이 만날 걸 그랬다. 우영이도 잘 있지?”

소연이 음식을 먹느라 질끈 동여맨 머리를 풀며 물었다. 마지막 남은 파스타를 포크에 돌리던 해인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잘 있긴 하지.”

“대답이 왜 그래?”

소연은 알고 있으려나.

사실 오늘의 이 만남도 어쩌면 그 의문을 해소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이 왔다 갔다는 모호한 말이 해인은 자꾸 마음에 걸렸다.

혹시 민서 씨와 몰래 비밀 연애라도 했던 건가 생각하고 며칠 지켜봤지만, 민서에게는 전혀 그런 눈치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우영을 대하는 건 아주 자연스럽고 변함없이 친근했다.

그럼 민서도 아니라는 말인데…….


“소연아! 혹시 우영이가 만나는 여자 있었어?”

“만나는 여자? 있었으면 우리가 모를 리가 없잖아.”

“그렇지?”

“그렇지. 근데 왜?”

“아니, 사랑이 왔다 갔다는, 뭐 그런 비슷한 말을 했거든.”

“뭐? 우영이가? 진짜?”

소연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되물었다.


“어.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 또 그래도 살 만하다고, 괜찮다고 그러고. 나도 잘은 모르겠어.”

“우영이 진짜 뭔가 있는 거 아냐?”

“그러니까.”

“몰래 짝사랑을 했단 소린데…….”

“어?”

“사랑이 왔다 갔다잖아. 정확한 말은 안 하고. 그럼 그게 짝사랑이라는 말 아냐?”

해인은 그 순간 우영이 자신에게 바보, 라는 말을 했던 것을 떠올렸다.

낯선 깨달음이 스치듯 뇌리를 파고들었다.

동시에 가슴 한편이 욱신거리며 싸해졌다.

설마……. 해인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너 왜 그래?”

“응?”

“왜 혼자 머리를 도리도리하냐고.”

“아무것도 아니야. 그만 일어나자.”

“야! 오늘은 이대로 안 보내. 나랑 같이 백화점 가서 쇼핑하고 들어가.”

“그래. 그렇게 해.”

해인은 스쳐 가듯 들었던 생각을 떨쳐내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바보, 라는 그 말은 쇼핑하는 내내 집요하게 해인을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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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연은 백화점을 털어버릴 정도로 해인을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정작 해인이 산 것이라곤 립스틱 하나가 전부였다.

소연이 골라주었는데 평소에 바르던 색보다 진한 붉은 색이라서 막상 쓸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택시에서 내려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던 찰나였다.

입구 오른쪽의 관상용 단풍나무 옆에 있던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딱히 신경을 쓰지 않고 입구로 향하는데 그 사람이 저를 향해 똑바로 와서는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움찔 놀라 뒤로 물러나서 보니 형준이었다.

순간 몸이 딱딱하게 굳으며 전신에 소름이 끼쳐왔다.

그런 일을 저질러놓고 어떻게 제 눈앞에 나타날 생각을 했을까.


“안형준 씨가 여긴 어떻게…….”

“기다렸어.”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음산하면서도 비열했다. 파일을 조작해 저를 위기에 빠트린 사람을 눈앞에서 보니 참을 수 없는 경멸이 밀려왔다.


“왜요?”

“나는 왜 싫어?”

아주 짧은 순간 혹시 사과를 하러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용서는 못 하겠지만 따로 문제를 삼지는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겨우 그런 질문을 하러 여기까지 왔나요?”

“그래. 대답해 봐. 나는 왜 싫어?”

형준은 마치 빚을 받으러 온 사람처럼 따져 물었다.

어쩌면 몇 달 전 해인을 다시 만났을 때부터 묻고 싶었던 말이었을 것이다.


“그럼 안형준 씨는 내가 좋은가요?”

“그건…….”

“아니겠죠. 좋다는 사람이 오랜만에 만난 여자에게 파일로 협박부터 할 리는 없으니까. 아니면 좋아하는 감정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든지.”

차라리 눈물겨운 애원을 해왔다면 일말의 동정심은 가져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껏 여기까지 와서 왜 싫은지 묻는 것을 보니 정작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는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건 너를 더 만나고 싶어서, 네가 안 만나 줄 것 같으니까 그랬을 뿐이야.”

형준이 원망에 찬 듯 토해냈다.

3년 전 부모님들께서 주선해 준 자리에서 해인은 아주 냉담하게 돌아섰었다.

홀로 그 자리에 남아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던가.

부모님들은 명문대에 뛰어난 미모를 가진 그녀를 좋아했다. 특히나 평생 장사꾼으로 사신 부친은 해인의 S대라는 타이틀을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그런 이유로 해인이 윤지훈과 결혼했을 땐 변변찮은 놈이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그리고 듣게 된 이혼 소식은 기회와도 같았다. 다시 만났을 땐 처음부터 그녀를 옭아매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무지 여유 따위 부릴 형편이 아니었다.

물론 그마저도 통하지 않았지만.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타당한 이유가 있으면 굳이 형준 씨 피할 이유 없었어요.”

“아니, 넌 피했을 거야. 3년 전에도 날 홀로 두고 혼자 갔었잖아.”

“그땐 나도 그게 최선이었어요. 혹시 그것이 상처였다면 미안해요. 그런데 정말 내가 안 만나 줄 것 같아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그건 전적으로 형준 씨 본인의 문제인 것 같네요.”

“함부로 말하지 마.”

호의도 베풀었고 기회도 주었었다.

그 선의를 저버리고 자신을 기만한 것은 바로 눈앞의 여자였다.


“기회를 줄게. 나를 갖고 논 거 사과해. 사과하면 내가 다 용서해 줄게.”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이 바뀌었다는 생각은 안 드나요?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안형준 씨라고요.”

“네가 아버지 생신 파티에 온다고 했다가 안 왔잖아.”

“이봐요. 간다고 정확히 약속한 적은 없었어요. 생각해 본다고만 했지.”

“그렇게 여운을 남겼잖아. 마치 올 것처럼 은근 사람을 기대하게 했고. 그랬으면서 그 녹음 파일이 생기니까 더는 올 이유가 없었던 거잖아. 그러니까 사과해.”

“그건 안형준 씨의 협박에 대한 내 나름의 방어였어요. 그걸 사과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니, 넌 내 자존심을 짓밟았어. 아주 철저히. 그러니까 사과해.”

해인이 보기에 형준은 쓸데없는 것에 집착하고 분노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어그러진 자존심이 아닐까.

사과를 한다 해서 쉽게 돌아설 남자라면 이렇게 무례하게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과하면 진짜 용서해 주나요? 그럼 다시는 이런 식으로 찾아오지 않는다고 약속할 수 있나요? 난 우리가 더 이상은 안 만났으면 하는데.”

“여기서 말고, 우리 집에 와서 정식으로 사과해.”

역시 그렇지 싶은 해인의 입가로 비소가 흘렀다. 실상 그는 용서는커녕 일을 여기서 끝낼 생각도 없을 것이다.

그때도 그랬지만 그는 지금도 저를 그의 집으로 데려가려 하고 있다.

책에서 스토킹하는 사람들의 습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상대에게 반응이 오면 그것을 응답으로 생각한다고.

그러니 아예 상대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아마도 그의 집으로 간 이후엔 또 다른 꼬투리를 잡아 물고 늘어질 것이 분명했다.

절대 그가 원하는 대로 끌려다닐 수는 없었다.


“그럴 생각 없어요. 사과할 이유도 없고요. 법적으로는 사소한 일이라 나한테 한 짓을 별거 아닌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사소한 처벌이라도 받게 할 테니까 각오하시고요.”

“주 사장님께 못 들었어? 없던 일로 하기로 우리 아버지와 두 분이 합의 보셨다던데. 시끄러워지기 싫다는 뜻 아니겠어?”

형준의 입가로 비릿한 웃음이 흘렀다.

마치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가로등에 비친 그의 모습이 비열하기 짝이 없었다.

해인은 이제 그와 함께 서 있는 것조차 모멸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저 멀리서 무슨 일인가 싶은 경비원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은 곳이라 다행히 다른 사람은 없었지만 어쨌든 이목이 쏠리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당당했나요? 어릴 땐 적어도 이렇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이젠 그마저도 기억에서 싹둑 잘라내 버리고 싶네요. 더는 상대하기도 싫어졌으니까 그만 가세요.”

해인이 몸을 돌려 앞으로 나아갔다. 막 그를 지나쳐 아파트 입구로 향하던 찰나였다.

손목에서 통증이 느껴짐과 동시에 몸이 뒤로 끌려갈 만큼 휘청거렸다.

형준이 해인의 손목을 낚아챈 것이었다.


“내 말 안 끝났어.”

“꺼져. 이 미친 새X야.”

더는 참을 수 없었던 해인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 나왔다.


“뭐가 어째?”

형준이 두 눈을 번뜩이며 해인을 노려보았다.

마치 못 들을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그때였다.

형준의 손목을 잡아채는 또 다른 남자의 손이 있었다.

본의 아니게 손목이 비틀린 형준은 해인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완력의 주인공을 바라본 그의 얼굴이 죽음의 사자라도 만난 것처럼 창백해졌다.


“이 새X야?”

여유 있게 형준의 손목을 잡아 꺾은 지훈이 해인을 보고는 싱긋 웃어 주었다.


“네 인생을 엿 같다고 생각하게 만든 놈이.”

“맞아요. 그놈.”

해인이 풀린 왼손을 털어내며 담백하게 말했다.

바야흐로 심판의 시간이 도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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