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59/92)
59.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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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2022.06.23.
안형준을 만나기 몇 시간 전. 상진에게 버림받은 지훈은 부친에게 신재생 에너지 포럼에 대신 참석하라는 뜬금없는 연락을 받았다.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가서 얼굴이라도 비추라는 부친의 부탁에 어쩔 수 없이 포럼이 열리는 장소로 향했다.
이미 시간이 많이 늦어서 지훈은 거의 끝 무렵에야 포럼에 참석했고 그곳에서 수빈의 오빠인 수혁을 만나게 되었다.
친구이긴 했지만 두 사람은 딱히 친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오수혁. 너도 왔냐? 난 아버지가 가라고 해서 왔는데…….”
“나도 마찬가지야. 요즘 환경이다 뭐다 해서 정부에서 은근 눈치 주나 보더라고.”
“환경, 중요하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
포럼이 끝나고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인근의 와인 바였다.
술을 주고받으며 간단한 안부를 나누었고 그 이상의 말은 없었다.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기에 침묵 자체가 길게 느껴졌음에도 그 정적은 쉽게 깨지지 않았다.
지나치게 오랜만인지라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피차 어색한 탓이었다.
결국, 지훈은 고해하는 마음으로 먼저 포문을 열었다.
“아직도 내가 싫으냐?”
“응.”
간단히 돌아온 대답에 지훈이 픽 웃었다.
솔직한 대답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수혁이 자신을 싫어하는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릴 땐 그래도 친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그가 저를 멀리했었다. 수빈을 통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부친인 오 회장께서 자꾸 수혁과 저를 비교한다는 것이었다. 그 일로 부친께 크게 대들었고 그 이후 오 회장은 수빈이 결혼하면 회사를 제게 맡긴다는 말까지 했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친구 사이가 이전처럼 유지될 리 만무했다.
이후 수혁에게 적당히 거리를 두었고 부러 그의 신경을 자극하지 않았다.
“이제 그만 좀 싫어해라. 나는 앞으로도 수빈이와는 네 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거니까.”
“알아. 해인 씨하고 다시 잘되고 있다는 말 들었어. 수빈이 길길이 날뛰는데, 난 기분이 좋더라고. 그래서 오늘 같이 술 마셔 주는 거야. 너, 수빈이랑 만났으면 나랑 전쟁이었어.”
“알았다. 알았어. 걱정하지 마.”
화해를 청하듯 지훈이 와인 잔을 내밀었다.
수혁이 멋쩍은 듯 지훈과 잔을 부딪치며 시선을 내렸다.
사실 지훈의 잘못도 아니었다. 같잖은 제 자존심이 문제였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이 몹시도 싫었을 뿐이다.
빈 잔을 채우던 지훈이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
“너 혹시 안성 모직의 안형준이라고 알아?”
“알지.”
“어떤 놈이야?”
수혁의 입가로 뭔가 미묘한 웃음이 차올랐다.
친구에게 들은 말이 있었는데 아마 그것을 지훈도 알게 된 듯했다.
“아주 웃기는 놈.”
“그래? 어쩐지…….”
“나도 건너건너 들었는데 술 취해서 한 번씩 그랬다 하더라고. 해인 씨랑 결혼이 어쩌고저쩌고. 상당히 아쉬워했다고 하던데 그게 좀 악에 받친 느낌이었다고 그러더라.”
“하! 진즉에 나한테 말 좀 해 주지 그랬냐.”
“왜. 그 자식이 무슨 사고라도 쳤어?”
“응. 아주 웃기는 사고를 쳤더라. 그래서 지금 되돌려줄 타이밍만 보고 있다.”
.
.
.
불과 몇 시간 전 그런 이야기를 했더랬다.
그랬는데, 그놈이 제 발로 나타난 것이다.
먼저 들어왔다가 해인이 없어서 다시 내려오던 참이었다. 집에서 기다렸다면 해인이 봉변을 당하는 것도 모를 뻔했다 생각하니 아찔해졌다.
지훈은 경멸에 가득 찬 시선으로 형준을 쏘아보았다. 갑작스레 손목이 잡힌 형준은 뒤늦게 상황 파악에 나섰다.
“넌 뭐야?”
“잘 봐. 누군지. 근데 나 알고 있지 않냐?”
“윤……지훈.”
잇새로 새어 나오는 이름에 경멸이 가득 담겨 있었다.
형준은 여기서 지훈을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세나에게 들은 근황은 이혼 후 다시 만나고 또다시 헤어졌다는 것까지였다.
물론 그가 부사장으로 다시 왔다는 말을 들었지만, 세나는 해인이 그를 거부하고 있다고 했었다.
그런데 또 같이 살고 있었던 건가. 형준에게 지훈은 해인의 곁에서 질척거리는 떨거지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 나다. 이 비열한 새X야.”
“뭐? 비열? 이혼까지 당하고도 어슬렁거리는 네가 할 말은 아니지. 당장 이 손 못 놔?”
“하! 이 미친 새X가 여기가 어디라고 제 발로 나타나. 기껏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더니 겁도 없이 여길 기어와? 대가리에 똥만 차서 뭘 모르는 거냐, 멍청해서 사리 분별을 못 하는 거냐 이 개념 없는 새X야.”
거친 욕 세례를 들은 형준의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잡힌 손목을 비틀며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썼지만 얼마나 꽉 잡고 있는지 끄떡도 하지 않았다.
형준이 남은 한 손으로 저를 잡은 지훈의 팔을 내리쳤다. 그런데도 손은 풀리지 않았다.
외려 힘이 겨우 그거밖에 안 되냐는 조롱 섞인 눈동자와 마주할 뿐이었다.
발길질이라도 해서 벗어나려던 찰나였다.
얼굴 왼쪽에서 빛이 번쩍임과 동시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어흑.”
지훈의 주먹질 한 번으로 형준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쓰러진 형준의 멱살을 잡은 지훈이 형준을 깔고 앉아 이번엔 손바닥으로 뺨을 후려쳤다.
-촤악.
-으윽.
“비열하다는 말이 듣기 싫었으면 행동을 똑바로 했어야지. 감히 우리 해인이를 협박해? 그깟 녹음 파일 따위로?”
“이혼했으면 끝난 거 아냐? 네가 뭔 상관인데…….”
“이혼을 하든 말든 너 따위가 나설 자리는 아니지. 너 같은 새X가 뭔데 아무 잘못 없는 여자를 괴롭혀.”
“이, 이 손 못 놔, 이 새X야.”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잘못했다고 빌어도 시원찮을 판에.”
퍽.
이전처럼 손바닥으로 내리쳤지만 강도가 워낙 센 탓에 둔탁한 파열음이 울렸다.
“남자 자식이 오죽 못났으면 여자 집 앞에 찾아와서 이런 짓이나 할까. 네가 한 짓이랑 똑같이 너희 회사 인트라넷에 올려줄까?”
퍽!
지훈이 연거푸 손바닥으로 형준을 내리쳤다.
사태가 폭력으로 번지자 해인이 서둘러 지훈을 말리고 나섰다. 해인의 옆으로 어느새 경비 아저씨가 다가와 있었고 몇몇 입주민도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더 악화되는 것은 막아야 했다.
“그만 해요. 지훈 씨.”
이러다 괜스레 지훈에게 해가 가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지훈이 형준의 멱살을 잡은 채로 해인을 올려다보며 안심하라는 듯 웃어주었다.
“아냐. 또 협박하러 온 거 봐. 정신 차릴 때까지 좀 맞아야 해.”
“그러다 지훈 씨까지 곤란해지면 어떡해요.”
“괜찮아. 이미 쌍방이라서. 그리고 이 새끼는 구린 게 많아서 어차피 신고 못 해.”
“아!”
잡은 손을 놓으며 해인이 짧은 감탄사를 터트렸다.
어떻게 보면 그럼 더 때려도 된다는 의미로 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어쩌다 보니 나온 감탄사였다. 물론 지켜보던 경비 아저씨는 그럼 더 때려라, 는 표현으로 오해했지만.
“아이고.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러다 경찰차 옵니다. 이제 그만들 하세요.”
맘 같아선 몇 대 더 때려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지만 폭력은 지훈도 싫어하는 것 중 하나였다.
실컷 때리고 나서 이런 마음이 드는 건 좀 미안한 일이지만.
지훈이 형준의 멱살을 풀고 몸을 일으켰다.
“너 앞으로 우리 해인이 앞에 한 번만 더 나타나면 진짜 죽는다.”
매섭게 내리꽂히는 경고에도 형준은 코웃음을 쳤다.
이가 부들부들 갈렸다. 어쩌다 먼저 손을 잡혀 반격할 기회를 놓쳤을 뿐이다.
힘의 차이를 느꼈으면서도 형준은 자신이 방심한 탓이라 여겼다.
재빨리 몸을 일으킨 그가 자세를 잡고 지훈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의 주먹은 가볍게 빗나갔다.
뒤로 물러나며 살짝 피한 지훈이 구둣발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 버렸다.
“아으윽.”
정강이에 받은 타격 탓에 형준이 앞으로 비틀거렸다.
반 무릎을 꿇고 몸을 버틴 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하여간 머리가 멍청해서 그런지 보여줘도 몰라. 딱 봐도 힘의 차이가 안 느껴져? 한 번만 더 덤비면 그땐 다리든 손이든 부러질 각오해라!”
가소로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던 지훈이 묵직한 경고를 쏟아냈다.
형준은 더는 덤빌 용기를 내지 못했다.
지훈의 말처럼 힘에서도 밀리고 빠르기에서도 밀린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물러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너희들 가만둘 줄 알아?”
“네 주제에 가만 안 두면 뭘 어쩔건데.”
“내가 절대 가만 안 둘 거니까 너야말로 각오해.”
“하! 이 새X가 아직도 정신 못 차리네. 그러다 너희 안성 모직 끝장난다. 그러기 전에 정신 차리고 가서 소장 받아볼 준비나 하고 있어.”
“지훈 씨. 이제 그만 가요. 사람들 봐요.”
해인이 지훈의 팔을 잡아끌었다.
지훈이 걱정 말라는 듯 해인의 어깨에 팔을 둘러 제 품으로 당겨 안았다.
안형준은 울분에 가득 찬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품었던 여자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꼴을 보자니 속이 뒤틀렸다.
그는 일어서는 자신의 몸을 잡아주는 경비 아저씨의 팔을 거칠게 뿌리쳤다.
“내 몸에 손대지 마! 너희들 다 가만 안 둘 거야.”
악에 받친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씩씩거리며 노려보던 안형준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지훈과 해인은 번갈아 가며 경비 아저씨의 몸을 살폈고, 아저씨는 별일 아니라는 듯 허허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지켜보던 몇몇 주민들은 그제야 서둘러 제 갈 길을 갔다.
소란스러웠던 아파트 단지 입구가 다시 조용해졌다.
지훈이 해인의 어깨를 감싸 안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해인은 일단 지훈의 몸 상태부터 살폈다.
일방적으로 이기긴 했지만, 처음에 주먹으로 팔을 맞아서 걱정이었다.
“팔 괜찮아요?”
“팔이라니?”
“아까 맞았잖아요.”
“내가 언제?”
지훈은 그런 적이 없다며 딱 잡아뗐다.
곧 죽어도 맞았다는 말은 듣기 싫은 모양이었다.
“같이 때려서 쌍방 아닌가요?”
“그렇긴 한데, 그거야 명분을 위해서 살짝 맞아준 거지. 하나도 안 아파. 맞았는지도 몰랐거든.”
“그래도 좀 봐요.”
해인이 강제로 지훈의 슈트를 벗기고 셔츠의 소매 단추를 풀어 팔을 확인했다.
얻어맞은 부위가 붉어져 있었지만, 따로 처치가 필요할 정도는 아니었다.
“괜찮은 것 같네요. 이 정도는.”
“당연하지. 난 완벽하잖아.”
익숙한 단어가 또 들려왔다. 하루라도 저 말을 안 하면 입안에 가시가 돋치나 보다.
“또 시작인가요?”
“완벽한 남자 좋아하잖아. 해인이가.”
“입을 꿰매는 건 너무 심한 것 같고.”
“…….”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손을 뒤로 묶고 입에 테이프를 붙이는 거. 그럼 떼지 못하니까 말은 못 하겠죠?”
“완벽한 남자에게 그러고 싶어?”
“아주 많이 그러고 싶어요. 아주 많이.”
두 번을 말한 건 진심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였다.
근데 이 남자가 히죽 웃는다.
설마 그게 좋은가?
“저기, 취소할게요. 난 그런 취향 아니거…….”
이쯤에서 알았어야 했다.
키스 타이밍이라서 히죽 웃었다는 것을.
속절없이 입술을 내어주고 말았다. 거부할 수는 없었다.
멋지게 안형준을 물리쳐 준 내 남자가 너무 멋있어서.
평생동안 이렇게 강렬하게 제 편을 들어준 사람도, 위기의 상황에서 구해준 사람도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지훈보다 더 열을 올리며 키스에 온전히 집중해 버렸다.
돌연 그가 멀어지고 입술이 허전해졌다.
게슴츠레 눈을 뜨니 의외라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는 그가 보였다.
뭘 그런 걸 가지고 놀라고 그래. 그냥 그런 줄 알고 하면 되지.
그만 할까? 눈을 쭉 찢어 노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알아들었겠지?
“지오는 연락 없지?”
알아듣기는 개뿔, 키스하다 저런 쓸데없는 소리는 왜 하는 걸까.
그때까지도 지오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기에 해인은 네, 뭐, 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양다리가 쉬운 게 아냐.”
은근 자극하는 말이었지만 현재로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닥치고 키스나 해요.”
뿌린 대로 거둔다고 했던가.
지난밤 했던 말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는 데에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 * *
외근이 있었던 지훈은 퇴근 무렵 상진과 함께 회사로 돌아왔다. 원래는 업체 관계자들과 저녁 미팅까지 잡혀 있었는데 돌연 취소되었다.
해인에게 이미 늦어진다는 말을 하고 왔기에 갑자기 나타나 놀라게 해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차에서 내려 회사로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사옥 입구에서 도로로 이어지는 가로수 앞에 검은 밴 한 대가 멈추는 것이 아닌가.
밴의 문이 열리고 나무에 가려져 있던 누군가가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짧은 순간 지훈은 아침에 해인이 입었던 원피스를 기억해냈다.
하늘거리는 아이보리 원피스에 카디건.
상큼하고 예쁜 그 모습에 쪽쪽, 모닝 뽀뽀를 몇 번이나 했던가.
그런데 저렇게 이쁜 모습으로 밴에 올라?
저 밴에 대체 누가…….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오.
진정 그놈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