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불길한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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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불길한 예감.
2022.06.26.
고심을 거듭한 한 차장은 결국 직접 난영을 찾아가기에 이르렀다. 사과문을 올리기 전 난영에게는 미리 알려야 할 것 같아서였다.
집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던 난영은 그녀를 집으로 들이지 않고 인근의 카페로 향했다.
커피를 시키고 마주 앉고서야 비로소 사과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발끈한 난영이 한 차장을 만류하고 나섰다.
“한 차장.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조금만 버텨 봐. 다 지나간다니까?”
“저를 속이셨잖아요.”
“그, 그건, 그러니까 그건 나도 모르는 일이었어. 그냥 파일 올리는 줄 알았지. 그렇게 조작해서 돌아올 줄 알았겠냐고 내가. 그건 정말 그놈이 혼자 저지른 일이라니까.”
“인트라넷에 올린 파일은 들으셨을 거잖아요. 그땐 파일이 조작된 걸 아셨으니까 그때라도 알려주셨으면 일이 이렇게 커지지 않았죠.”
“미안. 내가 그럴 줄 알았나. 그냥 잘 지나가려니 했지.”
“그럼 원본 파일이라도 잘 지켰어야죠. 일을 이렇게 만든 건 어쨌든 제가 아닙니다. 이젠 저도 몰라요. 어쩔 수 없다고요.”
끄응. 난영의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튀어 나왔다.
제 딸이 원본 파일을 지훈에게 넘길 줄은 미처 몰랐었다. 잠적해 있으라 했던 세나가 지훈의 사탕발림에 홀랑 넘어가 버릴 줄을 누가 알았겠나.
“우리 세나 그것이 마음이 약해서 그래. 윤 서방이, 아니 부사장이 만나서 이래저래 꼬드기기도 하고 협박도 하고 그랬나 봐. 어린 세나가 뭘 알았겠어. 그리고 해인이 그것도 모진 성격은 아니야. 제 아빠 얼굴도 있으니 원본이 있다 해도 터트리지는 않을 거야.”
“아니요. 주해인 씨가 문제가 아니에요. 부사장이랑 그 비서란 작자는 그 이상도 할 사람들이었어요. 한낱 비서 따위가 날 얼마나 우습게 본지 아세요?”
잠시 하 비서를 떠올린 한 차장이 치욕스럽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도 그 비서에게 당한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어디 가서 그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처음엔 자존심이 너무 상해서 오히려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다.
하지만 난영으로서는 그 일로 인해 돈까지 받은 한 차장이 이제 와서 저러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돈을 그렇게나 받아놓고 이제 와서 이러면 어쩌라는 건가.”
“어머.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이게 편집된 거고 원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저야 당연히 하지 않았죠.”
원본이란 말에 난영이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그것에 대해선 한 차장은 모르는 일이었으니 무작정 몰아붙일 수도 없었다.
원본을 넘긴 세나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안형준 파일은 원본이 있다고 해도 제 것은 없다며 딱 잡아떼도 무방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딱히 세나와 저의 잘못이 드러날 일도 없었다.
이래저래 큰일이었다. 남편이 이 일을 알게 되면 또 대노할 텐데…….
해인에게 오점을 남기고자 한 일이 여러모로 골치 아픈 일이 되어 버렸다.
* * *
해인이 지오의 전화를 받은 건 지훈이 도착하기 불과 10분 전이었다.
얼떨결에 전화를 받았고 곧 회사 앞으로 도착한다는 지오의 말에 미처 거절 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다.
서둘러 나오느라 핸드폰을 두고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지오와 함께 밴을 타고 출발한 이후였다.
물론 그 밴이 그렇게 먼 곳으로 갈 줄도 미처 몰랐었다.
한참을 달린 밴이 멈춘 곳은 시외의 분위기 좋은 한 레스토랑이었다.
지오가 정말 왔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가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렸다는 것에도 놀랐다.
물론 지오는 아주 간단하게 말했다.
“누가 보면 안 되니까 통째로 빌렸어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아! 네.”
이런 일이 현실에서도 일어나는구나.
지오도 그렇고 숲속의 레스토랑도 그렇고 해인은 꼭 동화책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함께 먹을 스테이크와 샐러드와 와인 등 각종 음식이 이미 테이블에 준비되어 있었다. 사람의 출입을 자제하기 위해 미리 준비해둔 듯했다.
“많이 놀란 얼굴이에요.”
“갑자기 연락이 와서…….”
“내가 연락한다고 했는데…….”
“그게…….”
“누나, 내 말 안 믿은 거죠?”
믿지 않았다기보다는 믿기가 힘들었었다.
톱스타가 저를 보러 찾아온다?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했었다. 결국, 이렇게 마주하고 있지만 여전히 현실성은 없었다.
“지오 씨가 자꾸 누나라고 하니까 어색해요. 나, 누나 아니잖아요.”
“무슨 말이에요?”
“지오 씨 실제 나이가 프로필 나이보다 많다고 들었어요. 내 친구가 지오 씨 팬이라서 지오 씨에 대해 많이 알아요. 그 친구가 알려줬거든요.”
“그거 헛소문이에요. 안티팬들이 내가 나이 많다고 소문을 냈는데 그게 어쩌다 보니 사실로 굳어지더라고요. 근데 저 나이 안 속였어요. 프로필 나이가 맞아요.”
“그래요?”
지훈에게 이 사실을 말하면 좀 더 부드러워지려나.
아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지훈을 떠올리자마자 근심부터 들었다. 저녁에도 미팅이 있다며 기다리지 말라고는 했지만 혹시 먼저 전화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받지 않으면 걱정할 텐데…….
해인은 유리잔에 든 물을 마시며 전화가 있을 카운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유리잔에 담긴 물을 겨우 한 모금 넘겼을 때였다.
“혹시 연하는 싫어요?”
무심코 돌아온 시선에 장난기 가득한 지오의 얼굴이 담겼다.
질문 자체가 어떤 의미인지 해인은 감이 오지 않았다.
“연하라서 싫다뇨?”
“남자로서 묻는 거예요. 남자로서 나는 어때요?”
해맑게 웃는 지오의 표정에 질문만큼의 무게감은 없었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불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해인은 지오처럼 웃으며 편안하게 대꾸했다.
“나, 이미 결혼했어요.”
“그때 이혼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다시 만나고 있어요. 둘 다 그 이혼을 후회해서. 지금은 아주 절절하게 사랑하는 중이랍니다.”
“서운해요. 아쉽지만 뭐, 축하해요.”
서운하다면서 바로 축하를 건네오는 지오를 보며 해인은 그가 참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목소리가 너무 상큼해서인지 별로 서운하게 들리지도 않았다.
원래 이런 일을 가볍게 말하는 남자일 수도 있고 제게로 향하는 감정의 깊이가 크지 않아서 일 수도 있었다.
“고마워요. 근데 활동 쉬고 있다고 들었는데, 왜 살은 더 빠진 것 같죠?”
“아, 그게……, 이건 대외적으로 비밀인데 우울증 증세가 살짝 있어서 본의 아니게 다이어트를 하게 됐어요. 입맛도 없고 의욕도 없어서. 소속사 대표님은 정신과 치료를 권하고 있는데…….”
“그 정도로 심했어요?”
원래 스타들이 무대에서 내려오면 엄청난 공허함을 느낀다고 하던데 혹 그런 것으로 인해 병이 생긴 것이었을까.
해맑은 소년처럼 늘 웃고 있기에 마음의 병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많이 나요. 엄마가 많이 아프셨는데 딱 내가 성공하기 직전에 돌아가셨거든요. 이렇게 성공하는 모습을 못 보고 그냥 가셨어요.”
“아! 많이 힘드셨겠네요.”
“누나는 엄마 안 보고 싶어요?”
불쑥 들어온 질문에 해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타인의 입에서 돌아가신 엄마에 대해 듣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어릴 때 돌아가신 엄마는 잊힌 존재였고 그리움조차 너무나 먼 감정이었다.
설마 지오가 제 엄마에 대해 알고 묻는 건가. 이미 만날 수 없는 사람임을 알고 하는 질문 같았다.
“어떻게……, 알았어요?”
“엘브에 대한 뉴스를 검색해 보다가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더 연락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요. 핸드폰으로 상담만 해 주는 선생님께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만나고 마음을 기쁘게 할 무언가를 찾아보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누나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인지 대표님도 흔쾌히 허락해 주셨고요. 혹시 이렇게 나 만난 거 부담스럽나요?”
“부담스럽죠. 대스타인데 어떻게 부담이 없겠어요. 부담은 되지만 그렇다고 불편하다거나 지오가 싫다거나 그렇지는 않아요.”
“다행이다. 걱정했는데. 사실 내가 편하게 만날 사람이 별로 없거든요. 학교도 가지 않고 연습생 생활을 해서 친구도 별로 없고.”
“많이, 외로웠겠어요.”
“그랬어요. 이제 누나가 내 친구 해 줄래요?”
“아, 그게…….”
대답보다 먼저 지훈의 얼굴이 떠올랐다. 물론 지훈이 아니라도 이 나이에 대스타의 친구가 되는 일은 부담스러웠다.
“누나도 나랑 친하면 좋잖아요. 내가 광고도 해 주는데…….”
거절을 예상했는지 지오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기가 죽은 듯한 그 모습이 가여웠지만 이쯤에서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았다.
“아무리 마케팅 전략이 뛰어나다고 해도 본질이 우수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어요. 뭐든 상품 그 자체의 본질이 중요하니까. 사실 난 마케팅보다는 창작자의 입장이에요.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고 스타일링도 하고 싶었고. 그래서 그런 말은 오히려 나에게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답니다. 지오 씨.”
“우와! 맞아요. 우리도 아무리 뮤비가 뛰어나고 마케팅이 훌륭해도 결국엔 노래가 별로면 아무 의미가 없거든요. 누나는 진짜 멋진 분 같아요.”
언제 기가 죽었냐는 듯 지오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은근 단순한 스타일이네.
그렇다고 마케팅이 아주 의미 없다는 말은 아니었는데…….
“친구는 못 해도 우연히 만난 인연이 있으니 가끔 우리 옷 광고 해 주시면 고마울 것 같아요. 물론 상품이 마음에 드는 것이 먼저겠지만요.”
본질이 중요하지만, 영업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지훈이 부사장이 됐는데 실적 면에서 유의미한 성적을 거두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이건 어디까지나 회사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다.
“그럼요. 그럼요. 당연하죠. 내 제의를 거절했다고 내가 누나를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나 그렇게 유치한 남자 아니에요.”
지오는 해인을 바라보며 예의 그 해맑은 미소로 웃어 주었다.
* * *
지훈은 해인이 밴을 타고 사라지는 것을 보자마자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핸드폰은 연결되지 않았고 부재중이라는 음성만 흘러나왔다.
어쩔 수 없이 홀로 돌아와 집에서 해인을 기다렸지만 속은 타들어 갔다.
정말 지오를 만난 거야? 그놈이 정말 온 거야?
의문이 생길수록 질투는 불처럼 타오르고 가슴은 터질 것 같았다. 거실을 서성이던 지훈이 셔츠차림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해인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올 것이다.
아니면 그놈이 다시 밴으로 데려다주는 건가.
그놈의 밴을 폭파해 버리고 말지.
살아남지는 못할 거야.
그런데 왜 해인은 전화 한 통이 없는 걸까. 핸드폰은 일부러 안 받는 걸까 아니면 아예 꺼버린 걸까.
나중에 전화했을 땐 신호음조차 연결되지 않아 지훈은 더 미칠 노릇이었다.
아마 저에게 이런 일이 생겼으면 백번이라도 해인에게 연락을 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화 한 통이 없다는 것은 너무한 처사였다.
아파트 입구 앞으로 나온 지훈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나가는 차도 사람도 별로 없었다.
너무 늦지 않게 와야 할 텐데…….
이것은 해인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을 위해서였다.
기다리다 미쳐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한참을 기다린 끝에 입구 앞으로 검은 밴 하나가 휙 지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분명 저 밴이었던 것 같은데 서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렸다.
저 밴이 아닌가.
멀어지는 밴의 꽁무니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지훈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우측 도로 쪽에서 단지 내로 들어오는 해인을 볼 수 있었다.
밴이 저 앞에서 우리 해인이를 먼저 내려주고 간 모양이었다. 하! 얍삽한 자식. 죽을 자리는 알아서 피해가네.
지훈은 미간을 잔뜩 구기고 걸어오는 해인을 묵묵히 응시했다.
고개를 숙이고 오던 해인은 몇 걸음을 더 걷고서야 지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지훈 씨?”
“…….”
“여기서 나 기다렸어요?”
“응. 기다렸어. 누구를 만났는데 연락이 안 돼?”
“아, 그게 지오…….”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을까.”
“…….”
“결국, 지오 그놈을 만나고 왔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