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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불가능한 부부 싸움. (61/92)


61. 불가능한 부부 싸움.
2022.06.30.



 


“갑자기 연락이 와서…….”

“연락이 왔으니까 만났겠지. 그 자식은 왜 남의 여자에게 자꾸 연락을 할까.”

“화, 났어요?”

“어. 화났어.”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지훈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는 해인의 입가로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어렸다.

아니, 지금 화났다는데 웃음이 나와?

웃는 얼굴이 그렇게 예뻐도 되는 거야?

지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예쁜 해인을 부러 예쁘지 않게 쳐다보았다.


“전화라도 할 수 있었잖아.”

“아, 그게 미팅 있다고 했으니까 바쁠 것 같아서……. 미안해요. 먼저 전화했을 줄은 몰랐어요.”

해인이 나름 변명을 해 보았지만, 지훈의 찡그려진 미간은 여전했다.

누가 봐도 화날 만한 상황이긴 했다.

솔직히 지훈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 전심을 다 하진 않았었다.


“지오랑 즐거웠나 봐?”

“그건 아닌데…….”

아무렴 지훈과 함께 있는 것처럼 즐거울까.

화내는 모습까지도 이렇게 멋져 보이는 남자가 있는데 지오가 즐거울 리가 없었다.

물론 톱스타라는 것이 신기하긴 했지만 그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지훈을 바라보는 해인의 입가로 다시 미소가 차올랐다. 결국, 지훈은 그 미소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화난 척 돌아서 걸어야 했다.

해인이 재빠른 걸음걸이로 다가와 지훈의 손을 꽉 잡아 쥐었다. 그런 해인을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지훈은 잡아 오는 손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지훈이 화난 척하느라 정면만 보고 있으니 버튼을 누르는 건 모두 해인의 몫이었다.

나름 분위기를 맞춰야 해서 웃으면 안 되는데 자꾸 웃음이 났다.

참지 못하고 피식피식 웃고 있는데 지훈이 고개를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째려보는 그 모습에 해인은 서둘러 웃음을 멈췄다.


“미안……해요.”

거듭되는 사과에도 지훈은 말이 없다.

집 안으로 들어와서는 해인의 손을 꽉 잡고 테라스로 데려갔다. 부러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백허그로 해인을 안고 보드라운 어깨 위에 입술을 묻었다.


“우리 해인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벌써 이렇게 안았으면서 뭘 어쩌려고. 많이 기다렸어요?”

“아주 많이.”

“미팅이 일찍 끝났어요?”

“아니. 취소됐거든. 그래서 우리 해인이랑 같이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려고 했는데, 우리 해인이가 다른 남자를 만났네?”

“미안해요. 그럴 줄 알았으면 안 만나는 건데. 그런데 이렇게 안고 있으면서도 아직 화가 안 풀렸어요?”

“이 정도로 풀리면 그건 남자도 아니지.”

대답과 함께 은근히 허리를 감아오는 손길이 야릇했다.

동시에 어깨 위쪽으로 뱉어지는 뜨거운 숨결에 몸도 뜨거워지는 듯했다.


“나 피곤해서 얼른 자고 싶은데…….”

“포기해. 오늘은 안 재울 거야.”

“진짜 피곤한데…….”

“양다리 걸치느라 피곤하기도 하겠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또 만날 거야?”

“아니요. 이제 연락하지 말라고 하고 왔어요. 부담스럽다고.”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지오가 그런다고 해?”

“그건…….”

해인은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지오가 그 말에 분명한 답을 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제 뜻을 전했으니 이젠 전화가 온다고 해서 그를 만난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 그놈은 대답을 안 했어?”

해인의 머뭇거림은 지훈의 인내심을 폭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름 분노를 꾹꾹 내리누른 것은 해인의 미소 때문이었다. 내리눌렀다기보다는 그 미소가 너무 예뻐서 저절로 소멸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오에 대한 분노가 사라지거나 그렇게 덥석 밴에 오른 해인에 대한 서운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가슴이 화산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놈이 답을 하지 않았다면 언제고 또 전화가 올 것이 아닌가.


“걱정 말아요. 대답은 안 했지만,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그래. 그럼 다행인데……, 아무래도 오늘은 그냥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아.”

해인의 허리에서 손을 뗀 지훈이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목소리도 아까와는 달리 훨씬 굵고 진중해졌다.

보통 저런 말을 할 땐 분위기가 은근 야하고 눈빛도 야릇했던 것 같은데 분위기가 살짝 달랐다.


“무슨…….”

“우리 부부 싸움 한번 하자.”

“으음?”

부부 싸움? 우리 아직 정식 부부 아닌데?

그리고…….


“하려면 아까 해야 하지 않았나요? 아파트 입구에서 걸어오는 나를 봤을 때.”

“그랬어야 했는데 그땐 네가 너무 예뻐서 타이밍을 놓쳤어.”

“지금은 안 예쁘다는 말로 들리네요?”

“그건 아니야. 지금도 예쁘긴 해. 그래도 하자. 부부 싸움.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부부 싸움을 해야 할 일인 것 같아.”

“우리 부부 아닌데…….”

“우린 이미 사실혼이거든. 사실혼 알지? 법적으로도 인정되는 거.”

그런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하자. 부부 싸움.”

다소 엉뚱한 말이었지만 미안한 마음 때문인지 그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할 것 같다. 부부 싸움이라도 해서 저 서운한 마음을 다 털어버려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뒤끝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해인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래요. 그럼.”

“어?”

“하자고요. 부부 싸움.”

“어, 그래.”

그렇게 일단 부부 싸움을 하기로 합의했다.

근데 막상 싸움을 하자는 사람이 아무 말이 없다. 해인은 그럼 그렇지 하는 눈으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막상 먼저 하자고 했지만, 그 부부 싸움의 시작을 대놓고 선언하기는 어색할 것이다.

눈치껏 상대가 치고 나오기를 기다려 주었다. 그러나 지훈은 한참이 지나서도 첫 포문을 열지 못했다.

부부 싸움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는 모양이다.

그럼 도와주는 게 인지상정.


“참고로 하나 알려드릴까요?”

“어. 알려줘. 부부 싸움을 어떻게 하는지 정보가 별로 없네.”

“난 싸우면 주먹부터 나가는데…….”

“말로 해. 말로. 난 폭력은 별로야.”

말도 못 하면서 치는 건 또 싫단다. 말이라고 해서 썩 잘할 것 같지도 않은데 무슨 자신감일까.


“좋아요. 그럼, 말로 싸우죠. 어서 시작해요.”

“그래. 이제 한다?”

“그래요. 얼른 하세요. 자, 부부 싸움 시작!”

줄다리기의 시작을 알리듯 해인이 큰 소리로 시작, 을 외쳐 주었다.

그 말과 함께 지훈의 눈매가 조금씩 매서워졌다.

싸움의 준비를 하려는 듯 차분히 숨도 고르고 머리도 굴린 후 비로소 처음 할 말을 찾아내었다.


“전화라도 할 수 있었잖아. 그게 그렇게 어려웠어?”

“어려웠어요. 핸드폰이 없었거든요. 잘 알지도 못하는 지오한테 핸드폰 빌려 달라는 말은 하기 싫었거든요.”

“아! 그랬어?”

뭐야. 지금 설득된 거야? 싸움의 기본은 되받아치기라는 걸 몰라?

해인이 어이없는 제 질문의 답을 확인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훈이 이미 되받아칠 의지가 전혀 없는 얼굴로 웃고 있었으니까.

싸움의 기본도 모르고 설득당한 그는 팔불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환한 얼굴이었다.


“부부 싸움은 차후에 하는 것이 낫겠죠?”

“아니. 차후에도 안 될 것 같아.”

호기롭게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상대가 해인이라면 어차피 이길 수가 없다. 승산 없는 싸움을 하느니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는 것이 낫겠지.

지훈은 말없이 해인을 당겨 안았다.


“이제 정말 양다리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거지?”

해인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도 성의를 다해 답해 주었다.


“원래부터 양다리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어요. 그래도 지훈 씨가 꼭 내 대답을 듣기를 원하니까 말해줄게요. 나는 그런 부도덕한 일은 절대 안 할 거니까 걱정 말아요.”

“예쁘다. 이 입술이 오늘따라 너무 예뻐.”

“사실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보면, 그러니까 지훈 씨가 스타가 찾아왔다고 덥석 만나러 가면 음, 나도 싫을 것 같아요.”

“이제 내 기분을 좀 알겠지? 내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미안해요. 톱스타가 만나자고 하니까 너무 신기해서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돌아왔으면 됐어. 이제 나만 볼 거지?”

이런 간지러운 말을 하는 남자가 아니었는데 언제 이렇게 변했을까.

사실 지훈만 변한 것은 아니었다.

저 또한 지훈과 함께 살며 한 번도 드러내지 못했던 감정들을 이제 아주 쉽게 드러내고 있었다.

좋아하는 마음부터 기분 나쁜 것까지, 그리고 불편한 감정들에 대해 편하게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나름 서로의 마음에 대해 더 들여다보게 되었으니까.

그래서인지 더 솔직해질 수는 용기도 생겼다.


“당연하죠. 지훈 씨도 이제 나만 보는 거 맞죠? 솔직히 나는 지훈 씨가 양다리를 걸치거나 혹시 그럴 만한 오해의 소지가 있게 행동을 한다면 정말 가만있지 않을 것 같아요.”

“걱정하지 마. 난 그럴 일 절대 없어.”

“절대 그럴 일 없다고 해 주니까 마음이 편해요. 믿어도 되죠?”

“그럼. 당연하지. 혹시라도 그런 일이 있으면 절대 참지 말고 그냥 총으로 쏴버려! 살려둘 필요도 없어.”

“그건 너무 심하잖아요.”

“그럴 일도 없을 텐데, 심하긴.”

“그건 그렇네요.”

지훈의 말대로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에게 푹 빠져 있는 남자가 쓸데없이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닐 일은 없을 거니까.

해인은 지훈의 가슴에 깊이 얼굴을 묻었다. 밤바람이 적절히 배어들어서인지 그에게서 나는 은은한 스킨 향이 좋았다.

* * *

밤이 깊도록 술을 따르는 소리가 이어졌다.

한 모금을 마시고 남은 술을 화분에 버리는 소리도 함께 이어졌다.

술이 세지 않은 지오가 술을 마시는 방식이었다. 시들어가는 산세베리아는 오늘도 힘겹게 지오의 술을 받아내고 있었다.


“왜냐고.”

지오의 입에서 탄식 같은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초점 없는 멍한 눈동자가 흔들리듯 어두운 창밖을 향했다.

지오는 또 술을 따르고 한 모금을 마신 후 창문 옆에 있는 산세베리아 화분에 남은 술을 부었다.


“왜?”

영문 모를 질문이 아련히 지오의 입술을 맴돌았다.

몸을 돌려 소파까지 걸어가는 동안 그는 수없이 비틀거렸다. 넘어지듯 소파에 몸을 기대며 가까스로 잔과 와인병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손을 뻗어 옆에 있는 리모컨을 잡아 쥐었다. 스치듯 느껴지는 유리의 차가운 질감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기실 차가운 것은 모두 싫었다.

특히나 오늘은 더.

리모컨을 눌러 음악을 틀었다.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지오는 반쯤 정신이 나간 듯 웃으며 그 노래를 따라부르다 이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누나는 왜? 나, 지오잖아.”

허탈하고 허무한 감정이야 지긋지긋하게 느껴왔던 것이지만 오늘은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갈망보다 그녀가 자신을 보고도 넘어오지 않는다는 것에 오히려 흥미가 생길 지경이었다.


“누나. 나, 지오라고.”

지오의 중얼거림이 이어지는 사이에 노래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지오는 열정적으로 그 노래를 따라불렀고 노래가 끝날 무렵에야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액정을 확인한 지오가 픽 웃었다.

여러 개의 부재중이 찍힌 것을 보면 벨이 울린 지 한참은 된 모양이었다. 핸드폰을 집어 들며 소파 뒤로 눕듯이 몸을 기댔다.


“무슨 일이야?”

친절한 인사 따위 나눌 여유마저 없었다. 핸드폰 너머 들려 오는 여자의 음성이 신경을 거스를 만큼 하이톤이라 길게 통화하고 싶지도 않았다.


“신경 꺼. 내가 알아서 해.”

지오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다시 핸드폰이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그 후로도 원망 같은 물음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왜, 왜냐고. 대체 왜.”

꼭 닫은 창문 너머로 스쳐 가는 바람 소리가 사나웠다. 그 사나워진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것처럼 느껴지던 순간 지오는 큰 소리로 웃어 버렸다.


“으흐흐흐!”

뒤이어 흐느낌 같은 울음소리도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

괴기스럽기까지 한 그 소리는 마치 생명이 끊어져 가는 늑대의 미약한 부르짖음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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