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허락을 구하는 일.
(62/92)
62. 허락을 구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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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허락을 구하는 일.
2022.07.03.
욕조의 물이 찰랑거리며 흘러넘쳤다.
수온만큼이나 뜨거운 열기가 안개처럼 가득한 욕실엔 그림처럼 어우러진 두 남녀가 있었다.
지훈이 해인을 뒤에서 안은 채로 손가락 장난을 하고 있었다.
먼저 씻겠다는 해인을 뒤따라온 것은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거절하는 해인과 문고리를 잡고 잠시 실랑이를 벌이긴 했으나 손쉽게 승리를 거머쥐었다.
“가볍게 씻고 나가려고 했는데.”
해인은 그 패배가 싫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투정 중이었다.
지훈이 따라 들어오는 바람에 원치 않게 목욕 시간이 길어져 버렸다.
“뜨거운 물에 담그면 피로도 풀리고 좋잖아. 반신욕이 좋은 건 알고 있지?”
“글쎄요. 이걸 반신욕이라고 하기엔 좀 무리가 있는 것 같아요.”
지훈과 처음부터 이렇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함께 맞으며 나름 샤워다운 샤워를 했었다.
이렇게 지훈에게 등을 기대고 앉아 반신욕까지 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지만.
솔직히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부끄럽기도 하면서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야릇한 반신욕까지 마치고 나니 몸이 한결 더워지는 느낌이었다.
다시 침대에 누우니 절로 눈이 감기려 했다.
“몸이 나른해요.”
“반신욕까지 했으니 더 그럴 거야. 이제 얼른 자.”
“그래요. 근데 우리 오늘 부부 싸움은 정말 시작과 동시에 끝난 건가요?”
“그렇게 아쉬우면 내가 좀 더 노력해 볼까?”
“아니요. 됐어요. 그게 뭐 좋은 거라고.”
“자꾸 아쉬워하는 것 같으니까 그렇지.”
“먼저 하자고 한 사람이 아무것도 못 하니까 웃기잖아요.”
“웃길 일도 없다.”
“그거 알아요? 지오가 나를 위해서 숲속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린 거.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었을 거예요.”
내내 웃고 있던 지훈의 미간이 꿈틀거리며 일그러졌다.
제대로 해 준 것도 없는데 그런 이벤트마저 지오 놈에게 뺏기다니…….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는 놈이었다.
물론 그런 이벤트를 받고 온 해인이도 얄미웠다.
“아무래도 진짜 부부 싸움 한번 해 보자는 말 같은데…….”
“푸흐흐. 아니에요. 그냥 웃자고.”
“기어이 지오가 죽는 꼴을 봐야겠어?”
“그냥 그랬다는 말이에요.”
“기대해. 내가 섬을 하나 통째로 빌려서, 아니, 이 기회에 아예 섬을 사자. 거기서 멋진 이벤트를 해 줄게.”
“난 이렇게 지훈 씨만 내 옆에 있으면 돼요.”
해인이 지훈의 넓은 가슴으로 파고들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것을 기적이라고 할까.
해인의 입술에서 나오는 언어들이 너무나도 달콤했다.
지훈은 잠시 벅차오르는 감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연기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열감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느새 애틋해진다.
“나도 그래.”
“그럼 우리 오늘 부부 싸움은 이제 끝.”
“끝.”
“자요. 이제.”
부부싸움의 결말은 이러했다.
시작은 다소 어이없었고 잠시 위태로울 뻔했으나 끝은 기적처럼 아름다웠다.
지훈은 제품에 찾아든 기적을 만끽하기 위해 온몸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나 잘 건데.”
“자라고 안아주는 거야. 잘자.”
편안히 자라는 듯 지훈이 해인의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어스름한 새벽.
해인은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깼다.
지훈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움직이면 깰까 봐 가만 그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잘 보이지 않음에도 우월한 이목구비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를 보고 있자니 뭔가가 서운했다.
미국에서 같이 보냈던 밤을 제외하고는 지훈은 철저히 피임을 하고 있었다.
아이를 갖는 것이 부담스러워서일까.
아니면 아직 그 일이 아파서일까.
문득 명치 끝이 아려왔다. 처음 계획처럼 유학을 가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있었지만, 그보다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했다.
보물이를 기억하는 마음 때문인지 지훈을 닮은 아이를 갖고 싶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다시 아이가 갖고 싶을 뿐이었다.
물론 보물이를 경험하지 못했을 때는 아이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다.
딱히 아이를 좋아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설령 이것이 떠나 버린 생명에 대한 그리움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해인은 다시 아이가 갖고 싶었고 그럴수록 피임을 하는 지훈에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 *
한 차장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곧바로 사과문이 올라왔고 회사는 또다시 술렁였다.
원본 파일이 따로 있다는 것과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부분적 파일을 첨부하였지만 정작 파일을 올리라고 시킨 사람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그녀는 파일이 편집되었다는 것을 몰랐다면서도 다른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았다. 한 차장이 밝히지 않아도 사원들은 이미 그 배후에 난영이 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어설픈 사과문이었지만 효과는 있었다.
[이 회사는 어차피 우리 친정이 일으킨 회사나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네 지분은 하나도 없어. 그래서 각서 쓰라는 건데 감히 종이를 찢어?]
[이 회사는 직원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회사예요. 회사의 대표가 누가 될지는 사원들과 주주들이 결정하게 될 겁니다.]
음성이 공개된 부분은 극히 일부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해인의 진심은 충분히 전달되었고 해인에 대한 사내 평가는 다시 뒤집혔다.
민서는 부지런히 마케팅팀을 오고 가며 다른 사원들의 뒷이야기를 전달해 주었고 우영은 그녀의 수다를 별말 없이 들어주며 미소를 짓곤 했다.
승윤과 아영도 오해가 풀린 것을 기뻐했고 마케팅팀의 분위기도 한결 좋아졌다.
그러나 몇몇은 여전히 해인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이 모든 것이 부사장 지훈에 의해 이루어졌다며 음모론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해인은 이런 것들로 인해 피로감을 느꼈다.
원치 않게 휘말리는 일들과 그 일들로 인해 달라지는 자신의 평가들.
그저 평범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었는데 본의 아니게 어떤 무대로 던져진 것 같은 삶이 아직은 익숙지 않았다.
복잡한 머리를 커피로 식히며 일에 집중할 때였다.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와 받았더니 지난번 통화한 적이 있던 신온 백화점의 쇼퍼였다.
-사모님. 일전에 한 번 전화 드렸던 신온 백화점 쇼퍼인데요. 부사장님께서 사모님께 스타일링 받아서 옷 가져오라고 하셔서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오늘 저녁에 동산 일보 창립 기념회에 참석하셔야 하거든요. 그래서 입을 옷을 준비하라고 하시면서 사모님께 부탁하라고 하셨어요.
“그걸 왜 내가, 그리고 저번에도 말했지만 저는 사모님 아니에요.”
“죄송하지만, 호칭은 저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 일단 사모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지시받은 대로 할 수밖에 없거든요. 이번에는 제발 꼭 부탁드려요. 사모님.”
하! 진짜 못 말리는 남자다.
그냥 쇼퍼가 골라주는 옷을 입을 것이지, 왜 굳이…….
딱히 쇼퍼가 골라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입는 남자이기도 했다.
“설마 이번에도 못 받으면 무슨 불이익이라도 생길 것처럼 말하던가요?”
-직접적으로는 하지 않으셨지만, 뭐, 그렇습니다. 죄송하지만 꼭 좀 부탁드려요. 사모님.
후! 해인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직업적으로 봤을 때 이 남자에게 어울리는 색이 있기는 했다.
정열의 빨강. 언젠가 그에게 빨간 빤짝이 의상을 입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는데…….
핸드폰 너머 들려 오는 여자의 목소리가 너무 안쓰러워서 그냥 끊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들어주기는 해야 할 것 같으니 소원성취라도 해야겠다.
“검정 비닐 팬츠에 빨간 반짝이 셔츠로 할게요.”
-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검정 비닐 팬츠에 빨간 반짝이 셔츠. 왜 있잖아요. 가수들이 무대 행사 다닐 때 입는 옷. 빨강 셔츠에 큐빅이나 보석 장식도 있으면 좋고요.”
-진심이신가요?
“그럼요. 기념회 행사라면서요. 그것 입고 가서 인증사진도 찍으라고 하세요.”
간단히 말한 해인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입든지 말든지 이제 지훈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이래저래 골머리를 앓던 해인은 퇴근 무렵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먼저 전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아 미루고 있었던 일이 있었다.
해인이 전화를 걸었고 통화는 길지 않게 이어졌다.
전화를 끊은 해인은 먼저 전화를 했음에도 상당히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급하게 화장을 고치고는 회사를 나섰다.
해인이 만난 사람은 지훈의 모친인 애란이었다.
지훈과 다시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 시점에서 그분들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한번 인사드리러 찾아뵙겠다고 전화를 한 것인데 애란이 먼저 오늘 당장 만나자고 한 것이었다.
해인은 초조한 마음으로 애란이 약속장소로 정한 이탈리아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애란은 해인을 보자마자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네가 먼저 전화할 줄은 몰랐다. 지훈이 녀석이 불시에 데리고 올 거로 생각했는데……. 지금 우리 지훈이랑 같이 살고 있는 거 맞지?”
“맞습니다.”
“으이그. 미친놈.”
“죄송……합니다.”
해인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네가 왜?”
“그게…….”
“네가 무슨 죄겠니. 다 내 자식이 못난 탓이지.”
애란이 신경질적으로 파스타를 휘저었다. 아들 생각을 하면 시원하게 등짝이라도 몇 대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나저나 너희들 피임은 하고 있니?”
“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나마 다행이구나.”
“…….”
“남자들 사랑 같은 거 너무 믿지 마. 한순간에도 변하고 그러는 것이 남자들 마음이란다. 특히나 야심이 강한 사람들은 더욱 그렇지. 지금은 재결합할 생각으로 널 찾는다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잖니. 네가 지훈이를 싫어하면 더 좋은 일이겠지만.”
거리낌 없이 내뱉는 말에는 가시가 가득했다. 하고 싶은 말을 가감 없이 하는 애란을 보며 해인은 그녀가 여전하다고 느꼈다.
실상 그녀 역시 정략결혼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유명 건설 회사의 딸이었던 애란은 신온 그룹의 주가를 더욱 상승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무작정 사랑을 찾아 움직이는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었다.
“넌 우리 지훈이가 어디가 그렇게 좋니?”
“…….”
“매번 싫다고 네가 먼저 떠났으면서 왜 자꾸 돌아오는 건지 솔직히 난 이해하기 힘들구나.”
물론 두 번째 헤어졌을 땐 해인에게도 어쩔 수 없었던 이유가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도 남음이었다.
하지만 애란은 부러 그 사정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그것을 인정하게 되면 결국 한강을 원하는 제 욕심과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해인은 애란의 질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어떤 사정이 있었든 간에 지훈을 버리고 떠난 것은 사실이었으니 제 잘못이 컸다.
“내가 너무 나 하고 싶은 말만 했구나. 네가 만나자고 했으면 이유가 있을 텐데, 그래. 집까지 찾아온다고 했으면 나한테 할 말도 있었을 건데,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거야?”
해인이 심호흡을 했다.
이제 가장 중요한 말을 해야 했다.
“지훈 씨와 다시 재결합하고 싶어서 찾아뵈려고 했어요.”
“내가 싫어할 거라는 건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습니다.”
“내가 안 된다고 하면 안 하는 거야? 내가 헤어져 달라고 하면 그렇게 할 거니?”
해인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 다시 지훈과 헤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곤혹스러웠지만 어차피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기도 했다. 결국,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 합니다.”
자못 놀란 표정의 애란의 두 눈동자가 지그시 해인을 향했다. 예상을 했으면서도 늘 고분고분하던 해인이 제 주장을 펼치는 것이 낯설었다.
“너도 이제 보통은 아니구나.”
그녀는 면을 말던 포크를 차분히 내려놓으며 냅킨을 들어 입술을 닦아냈다.
별말 없는 동작이었지만 분위기는 순식간에 서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