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나, 너 한번 안아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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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나, 너 한번 안아보고 싶어.
2022.07.07.
“너도 알다시피 난 아직 한강 그룹이 아쉬워. 그래서 수빈이랑 지훈이랑 결혼하길 바라고 있거든. 솔직히 포기가 잘 안 되는구나.”
“이해합니다.”
“이해하면 내 말을 들어야 하지 않겠니? 너를 탓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너는 내 아들보다는 내 말을 알아들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짜증이 섞인 애란의 말이 식탁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해인은 담담히 그 아픈 말을 받아냈다. 두 번의 이별 모두 자신이 저지른 일이었으니 그 책임도 온전히 제 몫이었다.
무작정 환영을 바란 것이 아니었으니 이 또한 당연한 질책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더더욱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저 죄인처럼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애란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막상 모진 말을 뱉고 나니 남편이 했던 충고가 생각났다.
더 이상 둘 사이의 일에 끼어들지 말고 욕심부리지 말라고 했던.
해인이 어떤 아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지훈이 막무가내로 들이대지 않았다면 결코 먼저 제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말이 심했다면 미안하구나. 부모라고 결혼까지 이래라저래라할 수는 없는데 아무래도 내가 너무 심했던 것 같다.”
“아니에요. 당연히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해해 줘서 고맙구나.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는 뜻이야. 그러니 이 문제는 너무 서두르지 말고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자꾸나. 일단 식사나 계속하자.”
이익을 따라 움직이고픈 마음은 여전했지만, 애란은 더는 선을 넘지 않았다.
거절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선뜻 환영의 뜻을 내비치지 않았으니 이쯤에서 되었다 싶었다.
해인이 사려 깊은 아이이니 알아서 처신해 주면 좋을 것이었다. 사실 오늘의 만남은 그것을 계산했던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애란이 막상 해인과 대화를 나누며 마주한 감정은 의외였다.
거래로 따지자면 딱히 이윤을 남기지 않아도 큰 미련이 남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물론 그 기분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엔 아직 이윤에 대한 미련도 많이 남아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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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은 착잡하면서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환영을 받을 거란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냉정히 거절당하지 않은 자체만으로도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씻지도 않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잠깐 쉬려 했을 뿐인데 며칠 피곤이 누적된 탓에 눕자마자 잠이 들어 버렸던 같다.
비몽사몽 간에 누군가 얼굴을 만지는 느낌이 들었다.
게슴츠레 눈을 뜨는데 붉은 무언가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잘못 봤으려니 생각하고 다시 눈을 감는데 또다시 얼굴이 간지럽다.
다시 눈을 뜨고 뭔가 싶어 보는데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해인이 눈을 비비고 다시 집중해서 보자 그 붉은 것이 좀 더 선명하게 보였다.
붉은 천과 반짝이는 큐빅과 보석.
아! 오늘 여러모로 번쩍이네.
얼핏 그게 뭔지 짐작해 낸 해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머리 바로 위에서 잔잔히 웃고 있는 지훈의 얼굴과 마주했다.
큰 대자로 뻗어서 잔 것 같은데 지금은 옆으로 누워 있고 바로 앞엔 턱을 괴고 모로 누운 지훈이 있었다.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아주 깊은 잠을 자고 있었나 보다.
그건 그렇고, 정말 이 옷을 입은 거야?
꿀꺽. 저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일어났어?”
“언제, 왔어요?”
“아까?”
“나는 얼마나 잔 거예요?”
“내 품에서는 한 삼십 분. 그전엔 모르겠고.”
와! 그 반짝이 의상을 입고 내 앞에 삼십 분이나 있었다고?
“인증샷 보냈는데 답장이 없더라?”
“설마…….”
“왜?”
“기념회 때도 입은 건 아니죠?”
“입었는데?”
입었다고?
아니, 아닐 것이다. 이 남자 성격에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웃기지 말아요. 집에 와서 갈아입은 거죠? 나 자는 사이에.”
“사랑하는 남자를 엿 먹인 기분이 어때?”
“엿이 얼마나 맛있는데. 일어서 봐요. 제대로 한번 보게.”
해인이 먼저 누운 몸을 일으켰다.
마치 자신이 만든 작품을 감상이라도 하려는 듯.
지훈이 마음껏 보라는 듯 침대에서 내려가 허리에 손을 올리는 포즈를 취했다.
“마음에 들어?”
전화했던 쇼퍼에게 박수라도 쳐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저런 옷을 구했을까.
비닐 바지는 주름이 잡히는 곳마다 빛으로 반짝이고 상의는 브이자 모양으로 큐빅이 박혀 있고 어깨 쪽엔 큼지막한 보랏빛 보석들도 박혀 있었다.
검정 바지는 그런 붉은 셔츠를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고 선명한 이목구비를 가진 지훈을 열정적이고 강렬한 남자처럼 보이게 했다.
화산이 타오르듯 용암을 품어내는 듯한 기운까지 느껴진다면 너무 오버일까.
저 남자가 왕으로 태어났다면 군림하고 지배하려는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독재 군주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원더풀!”
해인이 엄지 척을 하며 감탄을 했다.
“자! 이렇게 입힌 이유를 들어볼까?”
“지훈 씨는 정열적인 사람이니까. 차가워 보이지만 숨겨진 본능은 아주 강렬하고 전투적이고 욕망에 충실하달까, 그래서 입혀 보고 싶었어요.”
“내가 그렇게 보였어? 나에 대해 얼마나 많은 고찰을 한 거야?”
“그냥 직업병이라고 생각해요.”
어느새 다시 침대 위로 올라온 지훈이 해인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아닌 것 같은데?”
아무래도 욕망에 충실하다는 말은 괜히 한 것 같다.
해인은 맹렬히 타오르는 그의 눈동자를 피해 가슴에 있는 큐빅을 만지작거렸다.
“이거 입으면 노래해야 하는데…….”
“솔직히 말해. 욕망에 충실한 나를 보고 싶은 거야, 노래가 듣고 싶은 거야?”
정확히는 둘 다이겠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모습이 너무나 관능적이고 섹시해서 노래만 듣기는 힘들 것 같았다.
해인은 대답 대신 눈에 초점을 풀고 나른히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큐빅을 만지던 손은 어느새 그의 단추를 풀고 있었다.
“난 그냥 노래가 듣고 싶은 것뿐이에요.”
행동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며 해인은 열심히 지훈의 단추를 풀어냈다.
가슴이 훤히 드러날 때까지 지훈은 꼼짝도 하지 않고 꼼지락거리는 그 자극을 온전히 견디었다.
물론 그다음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지만.
* * *
해인이 인증샷을 확인한 것은 다음날 출근을 한 이후였다.
책상에 앉아 사진을 본 해인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뒷배경이 드레스 룸인 것을 보니 집에 와서 갈아입은 것이 분명했다.
원하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는 남자가 나름 귀여웠다.
해인의 얼굴엔 오전 내내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그렇게 평화가 찾아온 것도 잠시, 사무실은 또 다른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다른 부서원들과 커피를 마신다고 나갔던 심 대리가 허둥지둥 사무실로 들어왔다.
재빨리 해인의 곁으로 온 그녀가 핸드폰으로 기사 하나를 보여 주었다.
그 기사를 읽은 해인의 얼굴이 차게 식었다.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 그렇죠. 해인 씨.”
“그럼요.”
기사의 내용은 이러했다.
안성 모직에서 발간한 여름호 매거진 특별판에 실린 화보와 해인이 스타일링한 라임트리의 화보가 거의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대놓고 표절이란 단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표절로 몰고 가는 그런 기사였다. 비교 분석한 이미지를 보니 모델들의 옷과 포즈가 라임트리에 실린 것과 거의 일치하기도 했다.
해인이 보기에도 기이한 일이었다.
일정이 늦어져 신온에서 발간한 라임트리가 더 늦게 나왔으니 충분히 의심을 살 만했다.
게다가 화보의 모델이었던 수빈은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표절인 줄 알았으면 모델로 참여하지 않았을 거라며 은근 안성 모직에 유리한 인터뷰를 해 주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온 승윤이 상황을 파악하고는 고심 끝에 말했다.
“우리도 반박을 해야 할 텐데, 보도자료는 어떡할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해인이 별일 아니라는 듯 차분히 웃으며 말했다.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이미지 컷을 보여주고 전담 포토그래퍼와 사전 조율을 한 후 점심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울 때가 있었다. 그때 한 차장이 아무도 없는 회의실에 먼저 와 있었다.
그땐 그러려니 했었다.
하지만 그 후 그녀는 난영과 자신을 감시하는 것에 대해 통화를 했었다.
아마도 이미지 유출은 그때였을 가능성이 있었다.
‘안형준. 네가 기어이 무덤을 파는구나.’
담담하던 해인의 눈빛이 어느새 서늘해졌다.
책상에 앉아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던 우영이 작심한 듯 해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나 좀 보자. 옥상으로 와.”
“너는 사람을 왜 자꾸 옥상으로 오라 가라 그래? 여기서 해.”
“따라와.”
친구란 녀석이 팀장님과 대리님 앞에서 나쁜 남자를 시전했다.
해인은 민망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승윤과 은진이 저러다 정분나겠어,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럴 땐 재빨리 사라지는 것이 좋겠지.
해인은 괜스레 머리를 매만지며 아무도 보이지 않는 척 시선을 문 쪽만 향하고 우영을 따라나섰다.
* * *
비슷한 시각 하 비서도 인터넷에 오르내리는 그 뉴스를 확인했고 곧장 지훈에게 보여주었다.
기사를 읽은 지훈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표절?”
“시기적으로 우리가 불리한데요?”
“발간된 지가 언젠데 이제 와서, 이게 말이 돼?”
“그러게요. 근데 그쪽에선 특별판으로 VIP 고객들에게만 증정했고 당시 그런 말들이 나왔으나 문제 삼기 싫어서 쉬쉬했는데, 결국 기자들 입에 오르내리다 터진 거라고 합니다.”
“안형준, 이 자식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그날 다리라도 부러뜨려야 했는데, 부사장님이 너무 살살 대해 줬나 봅니다.”
“반박 보도자료 준비하고, 각 신문사에 연락해. 함부로 기사 냈다가는 명예훼손으로 싹 다 고소할 거고, 광고도 다 접는다 엄포도 놓고. 그리고 그룹 전담 기자들 연락해서 우호적인 기사 낼 수 있도록 서둘러.”
“알겠습니다. 어제 창립 기념회 다녀온 동산 일보부터 연락하겠습니다.”
상진이 나간 후 초조한 듯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지훈이 급히 부사장실을 나섰다.
곧장 마케팅팀으로 갔는데 해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 내부를 눈으로 훑던 지훈이 자신을 발견하고 일어서는 심 대리를 향해 물었다.
“주해인 씨, 어디 갔습니까?”
“그게……, 우영 씨랑 옥상에 갔습니다.”
* * *
“도대체가 너는 바람 잘 날이 없냐. 아주 파란만장해서 지켜보는 내가 다 지친다.”
포켓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기다리던 우영은 해인이 가까이 오자마자 타박했다.
“그래서 나도 심란하니까 너까지 확인 사살할 필요 없어.”
해인은 우영과 나란히 서서 옥상에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영이 처음 옥상에 불렀던 그 날처럼 더없이 푸른 하늘이었다.
쌀쌀하긴 해도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 만큼.
근데 왜 저는 우영의 말처럼 한시도 편안할 날이 없을까.
“아까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처럼 말하던데, 정말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야? 어차피 이런 류의 문제는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진흙탕 싸움 그 자체가 피곤한 일이잖아. 뭐, 제대로 믿는 구석이라도 있어?”
“있어. 창작자로서의 나는 기본 중의 기본을 아주 잘 지키는 사람이거든. 안형준, 이 자식은 이제 용서의 가치가 없어. 한 차장도 마찬가지고.”
아울러 이미지를 빼내 오라 사주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새엄마까지 몽땅 엮여 들게 생겼다. 도저히 보호해 주려야 보호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한 차장이라니?”
“그런 게 있어. 근데 너는 왜 또 옥상으로 날 불렀어? 다른 할 말이라도 있어?”
“하늘이나 보면서 기분전환이나 하라고.”
“참나. 바람 잘 날 없다고 타박할 땐 언제고.”
그럼 처음부터 가볍게 부를 것이지 왜 그렇게 잔뜩 무게를 잡는 건데.
기왕 이렇게 올라왔으니 궁금한 거나 물어봐야겠다.
해인이 작심이라도 한 듯 우영과 마주 보았다.
“근데, 너 있잖아.”
“…….”
“그때 좋아했다는 여자, 혹시…….”
“…….”
“그러니까…….”
“말해. 뭐가 궁금한지.”
해인은 쉽사리 이야기의 본론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친구에게 혹시 나 좋아했냐고 묻는 것이 왠지 꺼림칙했다.
아니라고 하면 그 부끄러움은 온전히 제 몫이지 않은가.
게다가 우영의 태도는 당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조금이라도 제게 그런 마음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묻는데 눈빛 정도는 흔들릴 것이 아닌가.
해인은 이내 자신이 내렸던 판단을 수정했다.
“아니야. 그냥 내가 착각했나 봐. 그럴 리가 없지.”
“혹시 너 아니냐고?”
묻어 두려 했던 질문이 기어이 우영의 입에서 뱉어졌다.
저 녀석은 갑자기 왜 눈치가 빨라졌을까.
저렇게 대놓고 묻는 것을 보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나 보다.
“아, 그게 아니……라, 네가 바보……라고, 그때 그래서 혹시나 해서. 근데 그럴 리가 없잖아. 방금 내가 한 말은 그냥 잊어버려.”
“왜 아니라고 생각해?”
“어?”
“나, 너 한번 안아 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