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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날뛰는 사자. (64/92)


64. 날뛰는 사자.
2022.07.10.


푸른 하늘에 먹구름이라도 드리운 건가.

햇빛은 여전히 제 얼굴을 내리쬐고 있건만 해인은 사방이 어두워진 기분이었다.


“뭐……, 라고?”

아마 잘못 들었을 것이다.


“안 들려? 나 너 한번 안아 보고 싶다고.”

잘못 들은 줄 알았던 말이 다시 들려오자 해인의 마음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혹시 힘들어 보여서 위로해 주고 싶은 거라면, 만약 그렇다면 이해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 혼돈은 그 때문이 아닌 듯했다.

우영은 혼란스러워하는 해인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지그시 응시했다.

가슴 깊이 꾹꾹 내리눌렀던 말을 터트렸으면서도 속으로는 절망적이었다.

이제 앞으로는 너의 다정함을 볼 수 없겠구나. 이제 앞으로는 나를 편하게 대해 주는 너의 모습을 볼 수 없겠구나.

그런데도 이 무모한 고백을 던진 것은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감추는 것이 너무 지쳐 그만 터져 나왔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뭔가를 짐작해 버린 네가 언젠가는 알게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친구였던 해인에 대한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던 건 아마도 결혼 그즈음일 것이다.

결혼한다는 말을 들었을 땐 허전함을 느끼면서도 그저 친한 친구를 잃은 그런 허전함인 줄 알았다.

그러나 결혼식 당일. 하얀 드레스를 입은 너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네가 다른 남자를 향해 다가갔을 때, 네가 다른 남자의 손을 잡았을 때 나도 모르게 가슴이 울컥했었다.

세상이 캄캄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왔을 때야 비로소 내가 너를 여자로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네 연락을 피했다는 것을 너는 아마도 모르겠지.

이혼한다는 말을 듣고 한편으론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론 얼마나 기뻤던지. 하지만 그 기쁨이 무색하게도 네 옆엔 다시 그 남자가 있었다.

도무지 다가갈 틈이 없을 만큼 그 남자만 바라보면서 이혼은 왜 했을까.

그저 이대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떠나면 되는 것을 나는 왜 아직도 네 옆을 맴도는 걸까. 그리고 왜 또 이런 무의미한 말을 뱉어버린 건지…….

우영은 스스로가 한심했다.

해인을 안아 보고 싶다고 해도 이미 안을 수 있는 사이가 아닌 것을.


“그, 그냥 하는 말이지?”

떨림이 스며든 해인의 목소리가 안쓰러웠다.

그러나 그냥 한 말은 없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우영이 거침없이 내뱉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제 마음을 전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나 따라오면 편할 거야. 우리 엄마도 네가 며느리로 들어온다면 엄청 좋아하실 거고. 네가 우리 집에 들어와 살면 모두가 너를 환영해 주고 아무도 널 괴롭히지 않을 거야. 네가 무시당하지 않아도 되고, 위험하지 않아도 돼. 나도 최대한 널 지킬 거고. 그러니까 널 힘들게 하는 곳에 더는 있지 말라고.”

“너, 미쳤어?”

급기야 해인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우영은 작정이라도 한 듯 말을 이어갔다.


“힘들었잖아. 어렸을 때부터. 왜 여기서 아등바등하면서 살아? 네가 그랬잖아. 넌 환영받지 못하는 곳에서 살기 싫다고. 그래서 헤어진 거 아니었어? 근데 왜 또 그 길을 가냐고.”

울분, 혹은 성토, 그리고 또 어떤 면에서는 서러운 것 같기도 한 외침.

묵직하게 전해져오는 말들은 해인의 머리를 치고 가슴을 울렸다.

그 충격이 워낙 커 해인은 이제 다리마저 부들부들 떨리는 것만 같았다.

우영이 제게 그런 감정을 느꼈을 것이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허물없이 지내는 오랜 친구였고, 보통 이런 고백을 하게 되면 친구 관계는 끝장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그 위기감이 해인을 두렵게 했다.

그럴 수는 없다. 네가 내게 어떤 친구인데…….

게다가 은하 이모는 제겐 엄마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오랜 관계를 눈앞의 친구가 다 포기하려 하고 있었다.

기가 막힌 해인이 곧장 우영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우영을 때리기 시작했다.


“미쳤어. 미쳐. 이게 아주 제정신이 아니네. 내가 술 좀 작작 마시라고 했냐, 안 했냐.”

“…….”

“대체 술을 얼마나 처 마셨길래 아직도 술이 덜 깼냐고. 아니면 벌써 죽을 때가 된 거야? 이 시끼가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퍽! 퍽!

해인은 고작 술 핑계를 대며 우영의 고백을 외면하는 게 최선이었다. 물론 우영의 마음에 놀라기도 했고, 이 관계를 잃게 될 것에 대한 원망도 섞여 있었다.


“아, 아얏.”

가차 없는 손길이었지만 우영은 굳이 해인의 손을 피하지는 않았다.

거의 난타라고 볼 수 있었다.

몸을 돌리면 옆구리에 주먹이 날아왔고 허리를 굽히면 등으로, 허리를 펴면 배를 얻어맞았다.

우영은 이렇게 맞을 바엔 하고 싶은 말이라도 제대로 해야겠다 싶었다.


“야! 나는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도 못 하냐?”

“응. 말하지 마! 한마디도 하지 마. 네가 아직 매를 덜 맞아서 그래.”

“억. 아, 아앗.”

“앓는 소리도 내지 말고, 닥치고 맞기나 해.”

“내 말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은 안 하, 으윽, 냐? 우리 엄마도 널 예뻐하…….”

“닥치라고 했지.”

해인은 쉬지 않고 우영을 몰아붙였다.

그 무자비한 주먹질을 피해 뒤로 물러나던 우영의 스텝이 꼬여 결국 넘어지고 말았다.

해인은 기회는 이때다 싶어 시커먼 머리통을 정조준했다.

저 동그란 머리통을 정타로 한 대 맞으면 정신이 돌아올 것이다.

주먹은 심하니까 손바닥으로 갈겨버리자 생각하고 손을 들어 올릴 때였다.


“그만, 그만. 해인아!”

손목이 잡힘과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달갑지 않은 해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제 손을 잡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역시 지훈이었다.

이 어이없는 순간에 이 남자는 왜 여기 있을까. 지금 가장 불필요하고 해로운 남자인데…….


“여길 어떻게…….”

“사무실 갔더니 옥상에 갔다고 해서 왔지. 근데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인데 사람을 때리고 있어?”

지훈으로 인해 끊긴 흐름은 그의 친절한 물음으로 다시 이어졌다.

해인은 붙잡힌 손을 비틀며 다시 우영을 노려보았다.


“이거 놔요. 저 자식은 좀 맞아야 해요.”

“말로 해. 말로.”

“말로 해서 될 일이 있고 안 될 일이 있거든요.”

해인이 빠져나오려 했으나 지훈은 꽉 잡은 해인의 손을 놔주지 않았다.

아, 진짜. 무슨 남자가 끄덕을 안 하네.

한참 지훈과 실랑이를 벌이던 해인은 급격한 체력 저하로 본의 아니게 잠잠해졌다.

여전히 숨을 씩씩거리며 우영을 쏘아보고 있었지만 더는 공격의 의사가 없어 보였다. 상황이 진정될 기미를 보이자 지훈이 해인을 잡은 손을 놓고 우영에게로 다가갔다.


“괜찮나?”

“…….”

지훈의 근심 어린 물음에 우영은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얼마나 맞은 건지 머리도 헝클어지고 옷이 구겨진 정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지훈이 혀를 내두르며 우영과 해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와! 우리 해인이 싸우면 주먹부터 나간다는 말이 진짜일 줄이야.”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있기나 해요.”

해인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지훈을 노려보았다.

가해자가 노려보든 말든 지훈은 이제 피해자 쪽으로 마음이 완전히 기울었다.


“아니, 사람을 왜 개 패듯이 패냐고. 너무한 거 아니야?”

“이봐요. 나는 개는 안 때리거든요?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해요?”

“마, 말이 심한 건 해인이 같은데…….”

괜스레 민망해진 지훈이 몸을 굽혀 우영의 어깨를 잡아 주었다.

어쩌다 보니 제 말로 인해 우영을 개보다 못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두들겨 맞기까지 했는데 심리적 타격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아 미안해졌다.


“동생. 많이 아픈 것 같은데 일어날 수 있겠어?”

“아파 죽을 것 같습니다. 형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호칭이 바뀌었다. 두 남자 모두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이 상황을 끝내기 위해서는 그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해인은 실소를 금할 길이 없었다.

놀고들 있네.


“너, 한 번만 더 헛소리했다가는 아주 내가 패 죽일 줄 알아.”

해인의 입에서 나오는 거친 소리에 놀라는 것은 역시 지훈이었다.

와! 진짜 살벌하네. 우리 해인이 입에서 사람을 패 죽인다는 말이 나올 줄이야.

지훈은 놀라움을 뒤로하고 우영을 향해 물었다.


“헛소리? 동생. 무슨 헛소리 했어?”

“그게…….”

“설마…….”

“…….”

“혹시 돈 빌려 달라고 했어? 우리 해인이 돈에 엄청 예민한데.”

“아, 예, 뭐, 조……금.”

우영이 픽 웃으며 동정심 많은 남자의 헛소리에 동조해 주었다.

지훈이 역시 그랬냐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여기나 저기나 돈이 문제네. 아무리 그렇다고 친구를 이렇게 때리는 게 말이 되냐고.”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무슨 핵 주먹도 아니고, 아파 죽겠습니다.”

“병원 가서 진단서 끊어 버려. 손버릇 나쁜 사람들은 꼭 콩밥을 먹어야 해. 그리고 돈은 내가 빌려줄게. 앞으론 나한테 말해. 계좌번호랑 액수 찍어서 내 폰으로 보내.”

“감사……합니다.”

위로자와 피해자는 쿵짝이 아주 잘 맞았다.

누가 보면 두 사람이 꽤 오랫동안 절친했던 사이라고 착각할 만큼.

그러나 진실을 알고 있는 해인에겐 눈 뜨고는 봐주기 힘든 풍경이었다.

지훈이 우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잘 일어설 수 있도록 부축해 주었다.

혼자 일어나도 되었지만, 우영은 굳이 지훈의 팔을 의지해 힘겹게 일어서는 척했다. 부러 해인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바닥만 내려다보면서.


“먼저 내려가! 나는 저 날뛰는 사자 좀 진정시키고 갈게.”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담담히 말한 우영이 해인을 지나쳐 문 쪽으로 걸어갔다.

지훈은 그가 무사히 지나갈 수 있도록 가림막처럼 함께 움직이며 두 손을 쫙 펼쳐 해인을 막아섰다. 마치 신변 보호를 하는 것처럼.

해인은 뚫어지도록 우영을 째려보았으나 더 이상은 다가서지 않았다.


 
그렇게 우영이 내려가고 옥상엔 둘만 남았다.

늦가을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지만 열기를 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해인은 쉼 없이 손부채질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 해인의 곁으로 지훈이 바짝 다가오며 말했다.


“큰일이다. 큰일.”

“왜요. 내가 너무 폭력적이라서 놀랐나요?”

“때린 건 잘했어.”

“뭐라고요?”

내내 폭력이 어쩌고 저쩌고 했으면서 뭘 잘했다는 걸까.

해인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쳐다보았다.


“네가 안 때리면 내가 때려야 하잖아. 좋은 친구 같은데 나한테 맞으면 아픈 건 둘째치고, 얼마나 수치스럽겠어.”

“……!”

“우리 해인이 인기가 너무 많아서 진짜 큰일이야. 지오 놈 간신히 치웠더니 이제 저 친구까지 좋다 그랬나 봐?”

“알고……, 있었어요?”

다 들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오래전부터?”

“으응?”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겠던데.”

처음이라면…….

지훈이 미국에서 돌아온 그 날 밤이었다.

그때 우영이 집에 안 가겠다고 버티며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긴 했었지.

그런데 그때 알았다는 사실이 해인에겐 의외였다.


“지훈 씨 그렇게 눈치 있는 사람 아니잖아요.”

“없긴. 내가 눈치 하나는 백 단이다. 나는 그날 딱 감이 오더라고.”

백 단 같은 소리한다. 그렇게 눈치 빠른 사람이 자신이 삼 년이나 좋아했던 건 왜 몰랐을까.

해인은 목구멍으로 넘어오려는 그 말을 꾹 내리눌렀다.


“알아서 잘 정리할 거 같으니까 난 신경 안 쓸게.”

“그래요.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해요. 지금처럼 그냥 모른 척해 줘요.”

“그래. 난 평화를 사랑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람에게 폭력을 써본 적이 없거든. 그렇다고 내 여자에게 접근하는 남자를 가만 보고만 있을 수도 없잖아. 그 친구도 사람은 좋은 것 같던데. 그러니까 내가 나설 일 없게 그 일은 우리 해인이가 알아서 잘 정리했으면 해.”

아! 안형준은 사람이 아니었구나. 그건 인정.

잠잠히 지훈을 바라보는 해인의 얼굴에 미소가 흘렀다. 지오의 이름만 나와도 불같이 화를 냈던 남자였던지라 지금의 이 모습이 낯설기는 했다.

우영의 마음을 알았으면서도 이렇게 자신을 믿어준 것이 고맙고 그가 얼마나 소중한 친구였는지 이해해주는 것 같아 마음도 편안해졌다.

능청스럽기도 하고 다정하기도 한 그의 면모로 인해 해인은 새삼 가슴이 설렜다.


“그래요. 고마워요.”

“그럼 이 일은 됐고, 이제 안형준 패 죽이러 갈까? 아까 보니까 누구 하나 때려 죽여야 직성이 풀릴 것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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