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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양다리 물리학. (66/92)


66. 양다리 물리학.
2022.07.17.


지훈이 한참 전화할 그 시각 해인은 사장실에서 부친을 만나고 있었다.

표절 사건이 터지고 회사의 분위기는 다시 안 좋아졌다.

주 사장은 하루가 멀다고 터지는 일들로 인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번 일은 신온과도 관계가 있어 일이 커질 것 같은 염려가 들어 즉시 해인을 불러들인 것이다.


“네가 그랬을 리가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아마도 새엄마의 지시를 받은 한 차장이 이미지 파일을 안형준에게 넘긴 것 같아요.”

결국, 또 난영의 짓이었다. 주 사장은 끄응, 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예상을 아예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해인의 입으로 들으니 면목이 없었다.

아무리 해인이 밉다고 어떻게 이런 일까지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살갑게 대해주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극단으로 치닫는 난영의 모습이 기가 막힐 뿐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저를 흠집 내서 회사에서 쫓아내고 싶으신가 봐요.”

“한심하기는. 도대체 안형준 이놈과는 왜 자꾸 엮이는 건지 모르겠구나. 아직 그놈이 정신을 못 차렸어.”

“정신을 못 차린 건 새엄마도 마찬가지죠.”

진실을 살짝 비켜 가는 부친을 향해 해인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주 사장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낮게 혀를 찼다. 제 딸이 이 정도로 날을 세우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안 사장을 만나서 내가 해결하마. 단순 해프닝이었다고.”

“그 정도로 될 일이 아니에요. 이번 일은 저뿐만이 아니라 지훈 씨의 회사에도 피해를 준 거예요. 제가 아니래도 지훈 씨가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그건…….”

“어떤 식으로든 진실은 드러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번엔 새엄마도 책임을 면하기 힘들겠죠. 그렇더라도 저를 원망하진 마세요.”

“방법이 있는 거냐.”

“찾아봐야죠.”

증거가 있다는 말은 부러 하지 않았다.

어차피 부친은 진실보다는 이익을 좇아 움직이실 것이다. 가는 길이 다른데 굳이 제 계획을 알릴 이유는 없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번엔 해인도 그냥 넘어갈 수만은 없었다.

타협이 가능한 시기는 이미 지났고 용서 또한 그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안형준에겐 그 용서마저도 무가치한 일이겠지만.

해인이 지훈의 부재중 전화를 확인한 것은 부친과의 이야기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였다.

핸드폰을 확인한 해인이 곧장 지훈에게로 전화를 하려던 찰나였다.

어느새 책상 옆으로 다가온 심 대리가 보란 듯이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녀는 수빈이 화보 촬영을 한 시점부터 그녀의 SNS 계정을 팔로우하고 있었다.

심 대리가 보여준 이미지를 확인한 해인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 * *

오늘따라 노을이 짙게 깔렸다.

지훈은 붉은 노을이 비치는 창문 너머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그런 상황에서 사진이 찍혀서는.

붉은빛이 스며든 룸의 정적을 깨는 것은 탄식이 섞인 지훈의 한숨 소리뿐이었다.

한숨 소리가 지루하게 이어지던 그때 상진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룸으로 돌아왔다. 아직 비행기 시간이 남아서 함께 커피나 마시며 기다릴 참이었다.


“커피 한잔 마시고 좀 쉬시다 나가시면 얼추 비행기 시간에 맞출 것 같습니다.”

“상진아. 내가 좀 많이 아파.”

아직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기도 전이었다.

자리에 앉으려던 상진은 갑자기 이게 무슨 생뚱맞은 소리인가 싶었다.

아프긴커녕 종일 너무 건강했었다. 공격적으로 일하는 모습에 제주도를 씹어먹으러 왔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멀쩡하신데요?”

“아냐. 진짜 아파.”

“아무리 봐도 멀쩡하십니다만…….”

“아프다니까?”

지훈이 툭 쏘아붙이며 상진을 노려보았다.

아프다는 사람이 목소리 하나는 우렁차다. 무슨 일이 있나?

몸은 멀쩡한 것 같은데 표정이 별로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프다고 하기엔…….

뭐, 꾀병인 것 같지만 일단 분위기는 맞춰줘야 할 듯했다.


“그래서요?”

“우리 해인이에게 전화 좀 해 줘. 내가 아프다고.”

“자신 없습니다.”

딱 잘라 거절하는 상진의 목소리가 축 처졌다.

매몰차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형수님을 속이는 건 세상에서 가장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왜?”

“그 홀리한 목소리를 들으면 저도 모르게 진실을 말하게 됩니다.”

“그래. 진실. 내가 아프다는 거.”

지훈은 끝까지 자신의 아픔을 관철하려 했다.

비서란 놈이 상사가 아프다면 걱정부터 할 것이지, 뭔 말이 저렇게 많은지.


“아프시다라……!”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상진이 지훈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아프다는 사람의 고고한 자태 좀 보소. 저 상사는 아파도 아플 것 같지가 않아서 문제였다. 아프다기보다는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혹시 제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오늘 내가 죽을지도 모르겠어.”

“장지는 어디로 해드릴까요?”

기다렸다는 듯 장지부터 묻는 상진을 지훈은 또 째려보았다.

그러다 문득 테이블에 있는 커피를 바라보았다.

던져버릴까. 위기감을 느낀 상진이 얼른 커피를 제 쪽으로 당기며 이어 말했다.


“아! 관부터 짜야겠네요.”

그래도 할 말은 한다는 것이 상진의 신념이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지훈이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움은커녕 죽음을 재촉하는 비서에게 무슨 기대를 할까.

눈을 감은 지훈의 머릿속으로 며칠 전의 어떤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라도 그런 일이 있으면 그냥 총으로 쏴 버려! 살려 둘 필요도 없어.’

그 좋은 가을날, 왜 그런 철없는 고백을 했던가.

정말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생인 모양이다.

아니, 이런 절망적인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 이건 해인이 말하는 그런 일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은가.

나름 변명할 뭔가를 찾던 지훈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안위하기엔 수빈이 달려들어 안긴 사진이 너무 선명하게 나와버렸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나라는 총기 소지가 불법이니까 총에 맞아 죽지는 않겠지?”

“그렇겠죠? 근데 혹시 어디서 살해 협박이라도 받으셨어요?”

되묻는 상진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혹시 안형준 그 미친 자식이 또 뭔 일을 꾸몄습니까? 혹시 그놈이 죽여 버린다고, 협박이라도 했습니까?”

“상진아! 내가 누군데 고작 안형준이 두렵겠냐. 그리고 그놈이면 협박받자마자 내가 먼저 요절내겠지.”

여름 더위에 늘어진 강아지처럼 풀 죽어 있던 지훈이 눈을 부릅뜨고는 상진을 노려보았다.

그 눈초리가 매서운지라 상진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분명 안 아픈데…….


“그렇죠. 그렇죠. 당연히 그렇죠.”

그래. 제 상사는 죽이면 죽였지 죽임을 당할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뭘까. 도대체 누가…….


“그럼 이렇게 부사장님을 벌벌 떨게 하실 분이 대체 누구냔 말입니까. 갑자기 더위 먹은 강아지마냥 축 늘어진 이유가 대체 뭐냐고요.”

속사포처럼 질문을 던진 상진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이내 두 눈을 크게 뜨고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형수님입니까?”

지훈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한숨만 푹 내쉬었다.

그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상진의 눈이 탁구공만 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놀라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기 위해 상진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히익.”

진정. 진정하자. 형수님의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상진에겐 상사의 죽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장렬히 전사하시는 것으로, 부사장님의 죽음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미리 사망 선고를 받은 지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유도 안 물어보냐?”

“형수님이 결정하신 거라면, 아마도 합당하실 것입니다.”

“진짜 살기 싫은 거지?”

“명복을 빕니다. 가시는 길 평안하십시오.”

비서란 작자가 상사의 죽음에 일말의 동정심도 없었다.

그동안 맺힌 거라도 있었나. 인생 헛살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지 함께 의논해 보면 뭔가 다르지 않을까.

지훈은 핸드폰을 꺼내 수혁이 보내준 이미지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이미지를 확인한 상진이 입을 쩍 벌리며 기함을 했다.


“우와! 이건 아프다 하신다고 살아남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닌 것 같은데요? 어쩌자고, 대체 어쩌자고 이러셨습니까.”

“내가 그런 거 아니야. 갑자기 달려와서 안겼어. 무방비상태에서. 수빈이가 혼자 쇼한 거라고. 나는 진짜 결백하다고.”

“그럼 일단 전화부터 하셔서 오해를 풀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 받아.”

“그래도 계속해야죠.”

“지금은 폰이 꺼져 있더라고.”

“진심…….”

“…….”

“명복을 빕니다.”

기어이 죽을 때인가.

지훈은 더 말할 기운도 없었다.

멀리 저물어 가는 하늘엔 이제 붉은 노을도 보이지 않았다.

* * *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는 것을 보았지만 전화를 걸지 않고 핸드폰을 꺼 버렸다.

지훈이 자의로 수빈을 안았을 리는 없을 것이다.

갑자기, 혹은 부지불식간에 수빈이 달려와 안겼을 것으로 추측은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건 아니다.

지오와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수빈은 늘 지훈의 곁에 맴돌며 여러모로 제 감정을 흐트러뜨렸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그녀는 시어머니의 지원까지 받고 있었다.

입만 열면 완벽하다며, 절대 그럴 일 없다며 호언장담했던 남자는 이런 감정 소모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 것이다.

이런 것들이 얼마나 사람을 기운 빠지게 하고 자괴감이 들게 하는지.

생각해 보니 서운하네.


‘혹시라도 그런 일이 있으면 그냥 총으로 쏴 버려! 살려 둘 필요도 없어.’

무릇 사람은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질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결의가 대단했으니 후회는 없겠지. 해인은 문구점에서 5만 원에 판매하는 비비탄 총을 사서 집으로 왔다.

비비탄 총이라고 하지만 드라마에서 특전사들이 들고 다니는 총과 거의 흡사해서 마음에 쏙 들었다. 스나이퍼 건처럼 크고 묵직했고 한번 쏠 때마다 다다다, 10발이 발사되는 총이었다.

총알을 장전하고 쏘는 방법도 쉬웠고 무엇보다 총알이 나갈 때 들리는 소리가 경쾌한 것이 해인을 흡족하게 했다.

옷은 지훈이 좋아할 것 같은 빨간 슬립으로 갈아입었다. 이렇게 갈아입고 총을 들면 좀 더 섹시해 보이려나.

총 맞으면서 몸이 달아오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중문 앞에 의자를 반대로 두고 앉아 지훈이 오기를 기다렸다.

늦지 않는다고 했으니 지금 즈음 올 때가 됐을 것이다. 기다리다 지치면 잠시 벽에 기대고 앉아 쉬기도 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흐르고, 드디어 도어락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던 해인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의자에 한쪽 다리를 올려 지지대로 삼고는 총을 겨누었다.

드디어 현관문에 이어 중문까지 열리고 지훈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인은 완벽한 저격수의 자세를 취하며 지훈의 배에 총구를 겨누었다. 놀란 지훈이 버벅거리며 들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해, 해인아! 그건…….”

“입 다물고 손이나 들어!”

“흐읍.”

입을 다물고 두 손이 번쩍 들리는 것은 거의 자동 반사와도 같았다.

기어이 총을 구해왔구나.

꼭 진짜 같은데, 설마 진짜 총은 아니겠지.

미안하다는 말부터 해야 하나 오해라는 말부터 해야 하나. 입을 다물라고 했으니 일단 다무는 것이 맞겠지. 살얼음 같은 긴장감이 흐르는 그 순간에도 지훈은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그 와중에도 시선은 빨간 슬립이 가리지 못한 우윳빛 살결을 따라 움직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관능미가 넘쳐 흐르는지라 저절로 몸이 뜨거워졌다.


“양자 물리학이라고 들어보셨나?”

“양다리 물리학?”

얼떨결에 되물은 지훈은 제 혀를 깨물고 싶었다.

양자가 왜 양다리로 들렸을까.

어쩌다 보니 제 죄를 스스로 인정한 꼴이 되어 버렸다. 해인의 카리스마에 눌려 귀까지 이상해진 것이다.

그런 지훈을 보는 해인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하! 둘이 같은 양 씨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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