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죄인은 손을 더 높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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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죄인은 손을 더 높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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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죄인은 손을 더 높이 든다.
2022.07.21.
“가, 같은 양 씨여도 가족은 아닐 거 같은데…….”
“가족일 수도 있지. 그걸 왜 네가 결정해. 시끄럽고 대답이나 해. 들어봤어?”
“양자, 물리학이라면 드……, 들어는 봤지. 근데 왜? 아니, 왜요?”
해인이 반말을 하니 지훈은 자연스럽게 존대를 했다.
분위기상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설명해 봐.”
명령처럼 흘러나온 한마디가 거실로 향하는 통로를 묵직하게 채웠다.
카리스마를 장착한 내 여자, 완전 여전사 같네.
지훈은 그 와중에도 우리 해인이 진짜 멋있다고 생각하며 홀로 짜릿해졌다.
“그게, 그러니까 물리학은 물체 사이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그러니까 양자 물리학이라 함은 여기저기 떨어진 질량으로 있는 것이 이런저런 힘을 받으면서 하게 되는 운동을 밝히는 이론이랄까.”
“잘 아네.”
“감사합니다. 근데 그게 왜요?”
다다다다!
순식간에 총알이 발사되었다. 지훈의 복부를 맞고 튕겨 나온 총알들이 바닥을 굴렀다.
지훈은 두 번 놀랐다.
총알이 발사되는 소리에, 실제로 총알이 제 복부로 날아왔다는 사실에.
비비탄도 주제에 총알이라고 은근 복부를 강타하는 맛이 있었다. 슈트를 입었으니 다행이지.
제법 명중률도 높았다.
“지금부터 질문은 나만 한다.”
“네. 알겠습니다.”
지훈은 슬며시 피어오르려는 미소를 꾹 참아 누르며 해인을 지그시 응시했다.
“여기저기 떨어져 있던 질량, 그게 우리 사이에선 뭘 의미할까.”
“글쎄……요.”
다다다다.
또 총알이 발사되었다. 뭔 말인지 감이 와야 말이지.
으윽. 지훈은 그 총알을 피하지 않고 맞으며 나름 리액션을 잊지 않았다.
“수빈 씨는 공항에서도 네 팔짱을 끼었고 나에게 딱 걸렸지. 그래서 우리가 진짜 헤어지는 계기가 됐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넌 모르겠지만 나한테 와서 심심찮게 너와 결혼이라도 하는 척 얼마나 으스대던지…….”
“죄송……합니다.”
“안형준까지 어느 날 그러더군. 너와 수빈 씨 가족들이 만나서 결혼이야기를 하고 있을 거라고.”
“그건…….”
“심지어 얼마 전엔 수빈 씨가 널 보러 회사에 찾아오기도 했어. 그때도 내 속을 뒤집는 소리를 하더라고. 너야 외부 일정이 있어서 만나진 못했겠지만.”
지훈은 점점 할 말이 없어졌다.
그렇기만 했나. 그런 여자와 화보 촬영까지 하게 만들었으니 이 죄를 어찌할까.
“드문드문 떨어져서 일어난 일이지만 그때마다 내 감정 소모가 꽤 심했거든. 질량으로 따지면 양다리만큼은 아니어도 그 이상의 스트레스를 안 받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
“죄송…….”
“이래저래 일어났던 그 사소한 일들이 결국 이제는 안고 안기는 것까지 이어졌어. 이러쿵저러쿵하다 보니 서로 당기는 상호작용을 통해 결국은 안기고 안아 주고 했을 것 같아.”
“또 죄송, 합니다.”
“양자 물리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나중에 둘이 결혼도 하겠다? 아낌없이 지원해 주는 분도 계시던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결혼이라는 말이 나옴과 동시에 지훈의 언성이 높아졌다.
“저기, 절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난 이미 결혼했거든요.”
“이혼을 했겠지.”
확인사살과도 같은 한마디에 지훈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듣고 보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죄인은 손을 더 높이 든다. 실시.”
손을 더 높이 들어서 속죄할 수 있다면 정말 그러고 싶었다.
“실시. 말씀 안 하셔도 알아서 들려고 했어요.”
지훈은 최대한 높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해인의 명령을 받을 때마다 뭔가 희열이 느껴지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은근 멋지고 그러면서도 사랑스럽고 귀엽고. 그러니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나. 물론 지은 죄가 너무 커서 아직은 용서라는 말 자체가 나오지 않았다.
“죄인은 죄인이 며칠 전 스스로 했던 말을 기억하나. 절대 그럴 일 없다며 호언장담도 한 것 같은데…….”
“합……니다.”
“복창한다. 실시.”
그 부끄러운 말을 그대로 하기엔 너무 수치스러웠다.
지훈은 차라리 모른 척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음, 생각해 보니까 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
모른 척 시치미를 떼던 그때였다.
다다다다!
또다시 경쾌한 총소리가 울렸다.
“움직이면 잘못해서 하체에 맞을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라!”
히익. 놀란 지훈이 손을 내려 제 아랫도리를 감쌌다.
“여긴 안 됩니다.”
“그게 뭔데.”
“이건 아주 소중한…….”
“잔말 말고 손이나 똑바로 든다.”
“이건 절대 안 됩니다.”
“거긴 내가 알아서 안 쏠 거니까 손이나 똑바로 들라고!”
급기야 해인이 악을 버럭 질렀다.
이 상황에 꼭 이런 말까지 해야겠냐 싶어 열이 뻗쳤지만 해인은 일단 침착하고 화를 가라앉혔다.
“이제 네가 했던 말 그대로 복창한다. 실시.”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꾸역꾸역 손을 들어 올린 지훈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호, 혹시라도, 그런 일이 있……으면 그냥 총으로 쏴…… 버려! 살려 둘 필요도 없……어.”
다다다다!
다시 총알이 난사되었다.
지훈은 몸을 배배 꼬며 아픈 시늉을 했다. 아예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슈트 사이의 와이셔츠 부분으로 날아온 총알들은 은근 따끔거렸다.
“이제 쏠 만큼 쐈으니까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죽어야 하는데 아직 살아 있어서 문제다.”
그렇구나.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는 노릇.
지훈은 호기롭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저기, 제가 웬만해서는 죽지 않거든요. 그냥 죄인은 바지를 벗는다, 뭐 그런 거 시키면 안 될까요?”
“죄인은 입을 닥친다.”
흐읍, 지훈은 부러 소리까지 내며 입을 다물었다.
빠져나갈 틈이 없네.
그렇게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대치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 침묵을 깨고 지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총알은 얼마나 있어요?”
“내일 아침까지 쏘고도 남을 만큼 있다.”
망했다. 설마 내일 아침까지 이러고 있진 않겠지.
그럼 우리 해인이도 힘들잖아. 저번에 옥상에서 보니까 체력이 별로던데.
그리고 아무리 사형수라도 최후진술은 들어주는 법이다.
“근데 자초지종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변명의 기회라도 주셔야…….”
“들을 필요 없다.”
“그럼 저도 빨강 옷으로 갈아입고 올까요? 우리 해인이 보는 재미라도 있게. 그러고 보니 커플룩 같은데…….”
그냥 웃자고 한 말이었는데 다다다, 또 총성이 울렸다.
“시끄러워. 조용히 해. 질문하지 말라고 했지.”
“넵.”
지훈은 눈앞이 캄캄했다.
어떻게 해야 해인의 화가 풀릴까. 뭐라도 해 봐야 할 것 같은데 말도 못 하게 하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안아 버리기엔 너무 뻔한 스토리이지 않은가.
일단 화라는 것은 내고 싶을 만큼 내야 뒤끝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더 이러고 있어야겠다.
하지만 총알보다는 들고 있는 손이 더 힘들었다.
어렸을 때도 이런 벌은 받아본 적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완벽했는데 해인이 앞에서는 자꾸만 부족한 남자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해인은 뻘쭘하니 손을 번쩍 들고 서 있는 남자를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총으로 쏴 버리라고 해서 분한 만큼 쏘고는 있는데 계속 이렇게 총만 쏴대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총으로 쏘는데 죽지도 않고 외려 입만 살아서 더 나불거리고 있었다.
진짜 얄미운 남자.
그 와중에 저 멋들어진 자태를 어찌할까. 볼수록 멋있어서 괜스레 가슴은 뛰고 점점 팔도 아파서 더 이상 총을 들고 있기는 무리일 것 같았다.
“거기서 그렇게 꼼짝도 하지 말고 밤새 손 들고 반성이나 해.”
결국, 체력이 약한 해인이 먼저 총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하지만 몇 걸음도 가지 못해 붙들리고 말았다.
총알 같은 속도로 달려온 지훈이 어느새 뒤에서 해인을 감싸 안았다.
“미안해. 해인아.”
“밤새 반성하랬더니…….”
“나는 거기에 수빈이가 오는 줄도 몰랐어. 갑자기 달려와서 안겼고, 그걸 친구들이 찍은 모양이야. 그래도 어쨌든 내가 잘못했어.”
지훈의 사과는 묵직하고 진실했으며 또한 공손하리만치 정중했다.
그의 진심이 충분히 전해져왔지만, 처음부터 해인은 그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지훈을 둘러싼 주변의 상황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를 괴롭힐 것이다.
“내일은 열애설 기사가 터질 거예요. 그리고 신온의 주가 상승으로 이어지겠죠? 물론 우리 사이엔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는 것도 알아요. 근데 나는…….”
울컥 목이 멘 해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자괴감으로 한동안 울적할 것이다.
물론 이 남자를 탓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이 남자를 너무 사랑한다는 것도.
“사랑해. 해인아.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할게.”
사랑한다는 한마디에 가슴이 떨려왔다.
내가 더 사랑하는 것 같은데……. 이젠 이 남자 없으면 절대 못살 것 같은데…….
“화 풀어. 화내니까 무섭다.”
사과할 때보다는 말투가 가벼워졌지만, 여전히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을 알았지만 해인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꽉 안고 있던 지훈이 팔을 살짝 느슨하게 하고는 허리를 감싸 주었다.
“이렇게 멋진 남자는 나만 알아야 하는데…….”
“…….”
“이젠 세상이 다 알게 생겼어. 진짜 짜증 나.”
갑작스러운 고백에 지훈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해인의 이런 말들은 들어도 들어도 늘 새롭고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정정할 거야. 아무 일도 아니라고.”
두 팔로 해인을 꼭 끌어안으며 지훈이 힘 있게 말해 주었다.
해인은 그의 품 안에서 잠시간 그의 따듯한 체온을 느꼈다.
오랫동안 품어왔던 그를 향한 마음들.
그 마음은 결실을 보았고 이젠 더 깊어져 헤어 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지훈이 해인을 번쩍 안아 올렸다. 다음을 예상하기는 아주 쉬웠다.
해인은 건장한 남자의 품에 안겨 그대로 안방 침대에 눕혀졌고 지훈은 늘 하던 대로 뭔가를 준비하기 위해 화장대 서랍장으로 향하려 했다.
그 순간 몸을 일으킨 해인이 지훈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냥 와요.”
“…….”
“그냥, 그냥 와요.”
“하지만…….”
“나, 지훈 씨 아이 갖고 싶어요.”
아이.
보물이를 기억하는 지훈은 어느새 애틋해졌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었던 가장 소중했던 보물.
혹시나 해인에게 아픔이 될까 봐 그냥 묻어두려 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좋아하냐면…….”
“…….”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그날 교수님이 인사시켜줄 때 첫눈에 반해서, 그래서 결혼했는데…….”
해인의 말끝이 떨리고 있었다.
놀란 지훈은 숨 쉬는 것조차 잊고 해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심장 박동이 평소보다 열 배는 더 빠르게 뛰는 것만 같았다.
“지훈 씨가 나를 3년이나 외면해서, 너무 외로워서 이혼까지 하게 됐죠. 이러다 내가 죽겠구나 싶어서.”
“나는……, 그러니까 나는…….”
아무것도 몰랐었다.
해인을 위해서 부러 늦게 들어왔고 혼자 있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것이 해인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던가.
“알아요. 지훈 씨가 나 편하라고 일부러 늦게 들어오고 없는 척 지냈다는 걸. 하지만 결과적으로…….”
“바보 같은 짓이었네. 내가 어리석었어.”
“꼭 그런 건 아니죠. 그때 알았더라면 오히려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잖아요.”
“무슨 소리. 나도 그날 너를 봤을 때 조금 특별해 보이기는 했어. 기억에 남았고.”
사실일까. 지훈을 바라보는 해인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몄다.
한순간이라도 그가 자신을 기억했다는 사실이 저를 설레게 했다.
“정말, 내가 조금이라도 특별했나요?”
“당연하지. 결혼도 사실 해인이, 너라서 거절하지 않은 거야. 다른 여자였다면 내가 형식적으로라도 결혼을 택할 일이 없지.”
“결혼하고도 한 번도 제대로 봐 주지 않았으면서…….”
“그건…….”
지훈은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그동안 정말 무슨 짓을 한 건지…….
“사실 너무 바빠서이기도 했어. 그래도 이 집은 널 위해 준비한 집이었어. 집을 직접 고르면서 귀찮다기보다는 즐거웠었지. 나 원래 일 외에 신경 쓸 일 생기는 거 싫어하는 사람인지 너도 알잖아. 그걸로 어떻게 용서가 안 될까?”
침대 끝에 걸터앉은 지훈이 해인을 제 품에 안으며 간절히 용서를 구했다.
또다시 지훈의 가슴에 갇힌 해인이 엷게 웃었다.
용서 같은 게 다 무슨 말인가.
그저 그 모든 것을 사랑했는데…….
“나 이제 당신 누구에게도 못 보내.”
“바라는 바야. 절대 보내지 마.”
건장하고 단단한 품에서 빠져나온 해인이 지훈을 마주 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해인의 눈동자가 열기로 이글거렸다.
‘당신 어머니께서 피임하라고 했는데 내가 어른들 말을 잘 안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