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다시는 안 돌아옵니다.
(68/92)
68. 다시는 안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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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다시는 안 돌아옵니다.
2022.07.24.
열감이 차오르는 해인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지훈의 입가로 미소가 어렸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지만 그 의미가 주는 깊이로 인해 가슴이 벅차올랐다.
지훈은 뜨겁게 해인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끈적한 열기가 순식간에 두 사람을 휩싸고 돌았다.
어느새 다시 눕혀진 해인은 건장한 지훈의 두 팔에 갇혀 버렸다.
해인의 귓불에 입을 맞춘 지훈이 귀에서 입을 떼지 않고 속삭였다.
“오늘은 더 분발해야겠네.”
색기에 가득 찬 속삭임.
귓가에 닿는 뜨거운 열기만큼이나 가슴도 뜨거워졌다.
“기대할게요.”
.
.
.
내일 출근해야 하니 피차 일찍 자라면서도 잠은 이미 저 멀리 달아나 있었다.
특히나 지훈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해인의 고백에 가슴이 널을 뛸 지경이었다.
제 가슴 안으로 해인을 푹 파묻어 놓는 것도 부족해 연신 이마에 뽀뽀 세례를 하며 같은 말을 계속 되풀이하고 있었다.
“정말 첫눈에 반했어?”
“…….”
“그래서 완벽하다고 한 거였어?”
“괜히 말했나 봐요.”
“역시 나는 오래전부터 완벽해.”
“지훈 씨?”
“진즉에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 이혼도 안 하고. 생각할수록 내가 죽일 놈이야.”
죽지도 않을 거면서 말은 잘한다.
갑자기 소통이 안 되기 시작했다. 감정에 북받쳐서 했던 고백이 결국 이런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함부로 속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데…….
부끄러움은 온전히 저만의 몫이었다.
“나 미국 갔을 때 보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어?”
“…….”
“내가 돌아왔을 때 솔직히 좋았겠다?”
“총을 덜 맞았어.”
“많이 울지는 않았어?”
“총알 많이 남았는데 좀 더 맞아볼래요?”
“그렇게 좋아했으면 좋아한다고 말을 했어야지. 바보같이 그냥 이혼하자고 하냐.”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지훈의 품에서 빠져나온 해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째려보았다. 하지만 지훈은 이제 그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눈이 쪽 찢어져도 예뻐.”
그리고 또 뽀뽀.
그렇게 지훈은 자신을 뜨겁게 사랑했던, 여기서 뜨겁게는 물론 지훈의 주관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어쨌든 그런 여자를 품에 안고 감격 아닌 감격을 마음껏 누렸다.
얼마 후 지훈은 그 모든 감격을 뒤로하고 다시 진지해졌다.
아이를 갖고 싶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 의미가 주는 무거움 때문에 깊은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뭐든 해인이 원한다면 자신은 기꺼이 그 길을 가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아이 갖는 거 무섭지 않아?”
“걱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갖고 싶어요.”
“그럼 아빠, 엄마가 되는 거네. 우리가.”
“그렇죠. 우리가 같이 부모가 되는 거예요.”
“감격이다.”
또한, 행복하고.
지훈이 다시 해인의 몸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고운 살결에 닿는 촉감이 좋아 터치만으로도 심장이 타오르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제 피곤한데…….”
“앞으로 분발한다고 했잖아.”
그랬구나.
해인은 꼼짝없이 그의 손길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 밤을 지나며 해인은 분발한다는 남자가 두려워졌다.
피할 길을 만들지 않으면 밤마다 힘들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옥상에서의 고백 이후 우영은 사무실에서도 해인을 모른 척했다.
어색한 것은 해인도 마찬가지였기에 두 사람이 사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일은 거의 없었다.
은진과 승윤은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지만, 딱히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사무실에 단둘이 있게 되었을 때였다. 더는 우영과 서먹한 관계로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한 해인이 먼저 말을 걸었다.
무작정 우영의 책상 앞으로 다가간 해인이 다짜고짜 말했다.
“저번에 옥상에서 들었던 말은 못 들은 거로 할게.”
“…….”
“그냥 예전처럼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우리 친구니까.”
“못해.”
그럴 수 있었으면 처음부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영은 제 실수임을 알면서도 해인에게 날을 세웠다. 단 한 번도 자신을 남자로 봐주지 않은 친구에 대한 서운함 때문이기도 했다.
“뭐?”
“넌 그게 되냐? 난 이미 네가 친구로 안 보여.”
“다시 친구로 보면 되잖아.”
“안 돼.”
“그럼 어쩌려고.”
“몰라.”
“너 진짜, 어릴 때 네 궁둥이 본 여자한테 이러고 싶어?”
“커서는 안 봤잖아.”
“다시는 보기 싫거든?”
해인은 자신이 뱉은 말이면서도 난감했다. 왜 이런 말들이 오고 가야 하는지…….
우영은 우영대로 어이가 없었다. 좀 더 그럴듯한 핑계를 대든지 할 것이지 맨날 그놈의 궁둥이 핑계였다.
어릴 때 좀 본 게 뭐 대수라고.
앉아서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가던 우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내가 회사 그만두면 돼? 그게 네가 원하는 거야?”
“뭐가 어째? 내가 말했잖아. 전처럼 아무 일 없이 지내자고.”
“난 안 된다고 했잖아.”
“너 진짜 이럴 거야?”
급기야 해인의 눈이 촉촉이 젖어 들었다.
순간적으로 우영의 엄마인 은하 이모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자 마음이 격해져 버린 것이다.
우영이와 잘못되면 그분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못내 가슴 아팠다.
우영은 젖어 드는 해인의 눈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굳이 누군가를 탓해야 한다면 그건 해인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쓸데없이 해인을 좋아한 것도,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 고백까지 한 것도 바로 저였으니까.
좋아하는 여자를 아프게 하는 못난 남자였었나.
특히나 그게 해인이라면 절대 그래서는 안 되었다.
“너 때문에 그만두는 거 아냐. 나 아직 변호사 되는 거 포기 안 했어.”
“그래서, 정말 그만둘 거야?”
“봐서. 생각 중이야.”
우영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만 가. 나 일해야 해. 그리고 네가 행복하면 난 그걸로 됐어. 이제부터 너 불편하게 안 할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한 번쯤은 제 마음을 고백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결국은 헛된 일이었다.
이럴 줄 몰랐던 것도 아닌데 막상 해인과 서먹해지니 우영은 옥상에서의 모든 일이 후회스러웠다.
* * *
허전하던 식탁 위로 하나씩 둘씩 반찬이 늘어갔다.
혼자 있으니 간단히 샐러드만으로 저녁을 때우려 했는데 갑작스럽게 지훈이 집으로 온 것이다. 애란은 기분이 좋으면서도 무뚝뚝하게 아들을 대했다.
“네 아버지는 오늘 저녁 모임 있으셔서 늦는단다. 아버지 있을 때 왔으면 좀 좋았니.”
“오늘은 어머니 뵈러 왔어요.”
“별일이구나. 네가 그런 말을 다 하고. 정말 나 보러 온 거야?”
지훈이 피식 웃으며 금방 나온 버섯전을 집어 올렸다.
“그런 말이 듣고 싶으셨어요? 예의상 그냥 한 말인데.”
“말이라도 이쁘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제가 말을 이쁘게 하면 우리 해인이도 예뻐해 주시는 겁니까.”
별일 아닌 듯 훅 들어오는 질문에 애란은 난처한 듯 표정을 구겼다.
“갑자기 해인이가 왜?”
“아시잖아요. 내가 해인이 집에 다시 얹혀사는 거.”
“적당히 살고 나와. 수빈이 집안에서 알면 좋을 거 없다.”
내내 아들의 얼굴만 보고 있던 애란이 무심히 숟가락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탁, 하는 소리가 진동처럼 식탁을 울렸다. 지훈이 들고 있던 젓가락을 과감히 내려놓은 것이었다.
이로써 해인을 거부하고 있는 모친의 의사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제 의사를 더 분명히 해야 했다.
“해인이 공부하고 싶어 하는데, 같이 떠날까 해요.”
“뭐라고?”
놀란 애란이 다시 고개를 들어 지훈을 마주 보았다.
“다시 말해봐.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입니다. 해인이랑 유학 간다고요.”
“미쳤니? 회사는 어떡하고. 네 아버지 이제 다 늙으셔서 이제 힘도 없으셔.”
“그러니까요.”
“…….”
“제가 여기 남는 방법은 딱 하나뿐입니다.”
“무슨 말이니?”
“해인이 환영해 주세요. 스트레스받게 하지 마시고.”
갑자기 찾아온 지훈이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그 중요한 이야기가 해인과의 재결합일 것도 예상했다.
그래서 먼저 선수를 친 면도 없잖아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떠난다는 협박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줄은 몰랐다.
“해인이가 나 만났다는 말한 거야?”
“예? 우리 해인이 만났어요? 언제요?”
되묻는 지훈의 표정에 놀라움과 실망이 뒤섞였다. 혹시라도 해인에게 험한 말이라도 했을까 염려부터 되었다.
애란은 그제야 자신이 실언을 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 해인이가 그렇게 입이 가벼운 애가 아니지.”
“혹시 헤어지라고 하셨어요?”
“그런 건 아니야. 나는 그냥 한강 그룹이 아쉽다고, 그래서 쉽게 포기가 안 된다는 말만 했다. 당장 헤어지라는 식의 노골적인 말 같은 건 절대 안 했다?”
“한강이 포기가 안 된다고 한 말 자체가 거절이란 걸 모르세요?”
지훈이 경악스럽다는 듯 애란을 바라보았다.
저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까. 이제야 그간에 해인이 당했던 고통을 제대로 보는 것만 같아 가슴이 쓰라렸다.
“SNS에 올라온 사진 때문에 그러니? 그건 그냥 수빈이가 예전에 찍자고 해서 찍어둔 거야. 나도 그 사진을 그렇게 쓸 줄은 몰랐어. 그래도 그 사진만으로 우리 주가 엄청 오른 거 너도 알잖아. 그룹을 위해서라도 한강의 딸이 더 좋지 않겠니?”
애란은 끝내 자신의 욕심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었다.
이런 어머니 밑에서 해인이 받았을 스트레스를 생각하니 지훈은 제 무능함에 발등이라도 찍고 싶었다
더 이상의 타협은 의미가 없었다.
“저 해인이 데리고 나가면 다시는 안 돌아옵니다.”
“……뭐?”
“가끔 아버지 뵈러 오기는 하겠지만 어머니는 안 봅니다.”
“저런 인정머리 없는 놈.”
“제가 그런 줄 아시면서, 대체 왜 그러십니까.”
“너, 무슨 일 있니? 오늘따라 말이 심하다?”
“선택하세요. 해인이 받아들이시던지, 이대로 아들이 떠나는 모습을 보시던지.”
차갑게 내려진 선고와도 같은 말에 애란은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누구보다도 제 아들을 잘 알았다. 저런 식으로 나온다는 것은 이미 결심을 굳혔다는 소리였다.
결국, 한강은 이렇게 물 건너가는구나.
긴 한숨을 내쉬는 애란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아들 키워놔 봐야 소용없다더니.”
“옛말 틀린 거 없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게 해드릴게요. 선택하세요. 기회는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너, 진짜…….”
“이대로 일어날까요?”
“아, 알았어. 대신 시간을 줘. 나도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니?”
급해진 애란은 입술까지 버벅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지훈이 이미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까닭이었다.
“더 이상은 한강 이야기 하지 마세요. 해인이 앞에서 한강 이야기 한 번만 더 하시면 정말 데리고 떠날 겁니다. 저, 잘 아시죠?”
“알았으니까 일단 오늘은 앉아서 밥 먹어. 나도 자존심이 있으니까 더 밀어붙이지 말고.”
애란이 볼멘소리를 하며 지훈을 달랬다.
어쩌다 저런 놈을 낳았을까.
하면 한다는 놈. 그게 바로 제 아들이었다.
* * *
전날 하지 못했던 파일들을 정리해 USB에 저장한 해인은 느긋이 허브차를 마셨다.
일이 있다며 늦는다던 지훈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집에 가는 중이라며.
이제 꼬박꼬박 전화를 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더불어 퇴근도 꼼짝없이 같이 하게 생겼다. 아이를 가지려면 무리하면 안 된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행복하기도 하면서 아직은 뭔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벌써 아이를 가진 것도 아닌데 준비과정부터 이러면 대체 어쩌라는 말인지.
그렇게 혼자 쑥스러운 미소를 지을 때였다.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려 지훈인가 싶어 액정을 보는데 낯선 번호였다.
낯선 번호였지만 얼핏 그 번호를 본 기억을 떠올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형준이 또 뭐라 지껄이는지 들어는 보자 싶은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한테 사과해. 그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적당히 넘겨줄게. 해프닝이라고.
그럼 그렇지. 또 헛소리였다.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고도, 아니, 우리 지훈 씨에게 그렇게 얻어맞고도 전화할 용기가 생기세요?“
“당장 사과해.”
기가 막혀서.
해인은 코웃음을 치며 냉정히 쏘아붙였다.
“너는 사과하지 마. 너 따위한테는 사과도 받기 싫으니까. 대신 내가 너 시궁창으로 던져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