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부부의 일상.
(69/92)
69. 부부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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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부부의 일상.
2022.07.28.
-아직도 큰 소리가 나와?
“당연하지. 내가 큰소리 못 칠 이유가 없거든.”
냉정히 쏘아붙인 해인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고는 전원 버튼을 눌러 핸드폰을 꺼버렸다. 사람이 어떤 생각으로 살면 안형준처럼 될 수 있는 건지 도무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면에서부터 깊은 분노가 차올랐지만 다 잘될 거라 생각하며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훈이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후였다.
지훈은 중문을 열고 들어오면서부터 해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해인아! 해인아!”
안방에 있던 해인이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부르는 목소리가 긴박해 빨리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해인의 얼굴을 확인한 지훈이 흐뭇하게 웃으며 다가가 해인을 안았다.
“뭐예요? 무슨 일 난 사람처럼 부르더니?”
“났지. 전화가 꺼져 있었잖아.”
아! 또 안형준 때문에 전화를 껐었지.
출발한다고 전화했으면서 그사이 전화를 또 한 모양이었다. 그는 답지 않게 갑자기 전화를 너무 자주 하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빨리 변하면 안 되는데…….
“안형준이 또 전화해서 꺼놨어요.”
“그 자식이 또 전화했어?”
“사과하면 용서해 주겠다나, 어쩐다나 하길래 그냥 끊었어요.”
“잘했어.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앞으로도 못 차릴 것 같아요. 그나저나 늦는다면서요. 그래도 빨리 왔네요?”
“할 말만 하고 왔어.”
지훈은 굳이 모친을 만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해인은 그랬냐는 듯 머리만 끄덕였다.
생사를 확인했으니 이제 그만 놔줘도 될 것 같은데 지훈은 한참이나 해인을 안고 있었다.
“나 답답한데…….”
“익숙해져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럼 숨 막혀 죽더라도 가만있으라는 말인가요?”
해인의 볼멘소리에 지훈이 안고 있는 팔을 조금 느슨하게 했다.
그것도 잠시, 베어 물듯 입술을 흡입하더니 이내 다시 꽉 끌어안았다.
“우리 재결합하는 기사 작성해서 언론사에 보낼까? 아니면 다정하게 안고 있는 사진, 뭐 그런 거라도 던져줄까?”
“네에? 아니요?”
“어제 수빈이랑 그렇고 그런 기사 났는데 정정기사만 내는 것보다는 좀 더 확신할 뭔가를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잠잠해질 건데요, 뭐. 난 시끄러운 거 별로예요.”
“그래도 괜찮겠어?”
“상관없어요. 난 지훈 씨만 내 옆에 있으면 돼요.”
“그래. 난 해인이 하자는 대로 할게. 그럼 이제 가자.”
“이 밤에 어디를요?”
“몰라서 물어?”
지훈의 얼굴에 번져가는 웃음이 짓궂었다.
정말 갈 곳이 있나 생각하던 해인이 금세 깨닫고는 눈을 흘겼다.
지훈은 억울했다. 소중한 우리 보물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제 의도를 곡해하는 것 같아서.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난 숭고하다고.”
“숭고하다고 하기엔 눈동자가 너무 붉게 타오르네요.”
“붉게 타오르는 게 숭고하지 않다는 건 누가 결정하는 거야?”
부러 해인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지훈으로 인해 해인은 그냥 웃고 말았다.
솔직히 귓가가 너무 뜨겁고 간지러워 어쩔 수가 없었다.
“허브차 마시고 있었어? 나도 한잔 마시고 싶은데.”
“기다려요.”
지훈을 위해 허브차를 준비하며 해인은 새삼 진짜 부부의 일상을 나누는 감회에 빠져들었다.
다시 서류정리를 한 것도 아니었고 시부모님들의 허락을 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해인은 그가 제 남편으로서 곁에 있어 주는 사실이 못내 감격스러웠다.
표절에 이어 지훈과 수빈의 사진이 기사에 오르내리자 사내 분위기는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몇몇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안긴 사진이라며 고의성이 다분하다는 말들을 했지만, 사진의 진위가 궁금하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부사장님과 재결합해서 우리 회사도 잘되는 거 아니었어?”
“부사장님 어머님이 수빈 씨와의 결혼을 응원하면 끝난 거 아냐?”
“하든 말든 우리랑 상관없지, 뭐.”
“상관이 없긴, 물주가 날아간다는 소린데.”
“이제 우리 회사 정도면 자생할 수 있지 않을까?”
“아직은 아닐걸?”
점심을 먹는 사내 식당에선 이런 이야기들이 가감 없이 흘러나왔다.
들으라고 하는 건지 아니면 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건지…….
괜히 사내 식당으로 왔다 싶은 해인이 팀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식당을 나섰다.
밥도 다 먹지 못했으니 달달한 커피나 한잔 마셔야겠다 싶어 사무실 옆에 있는 탕비실로 향했다.
하지만 코너를 돌기도 전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해인은 또다시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우리 같은 개미들이 열심히 일해도 저렇게 위에서 문제가 터지면 대체 어쩌라는 거냐고.”
“하루라도 조용할 날이 없긴 하지.”
“그나저나 부사장님 잘생겼다고 난리 났더라. 원래는 알 만한 사람들만 알았는데 이제 전 국민이 다 알게 생겼어. 우리만 알아야 하는데.”
“솔직히 잘생긴 건 인정. 근데 난 오수빈은 별로야.”
먼저 말한 사람은 몰라도 오수빈을 별로라고 하는 사람은 기획팀의 민서인 듯했다.
이래저래 좋은 이야기는 아닌 듯해 그냥 사무실로 향했다.
하지만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전 국민이 다 알게 생겼다고? 우리만 알아야 해?
해인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지훈은 내 남편인데…….
그 순간 지난 밤 지훈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정말 다정한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 정도는 던져야 하나. 복잡하거나 떠들썩해지는 것을 싫어하지만 지훈과 함께 산다는 것은 결국 그 모든 것도 함께 감당해야 할 일인 듯했다.
수빈이 기어이 그런 사진을 터트렸으니 이대로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렇게 뭔가를 결심한 해인이 부사장실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였다.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해인이 서둘러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발신인은 시어머니인 애란이었고 전화의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퇴근 후 자신의 백화점 사무실로 오라는…….
특별히 지훈에게는 알리지 말라는 당부도 함께였다.
기사가 나자마자 불러들인다는 것은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팀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퇴근 시간보다 먼저 회사를 나섰다.
초조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막상 택시를 타고 신온 백화점으로 가면서는 오히려 편안해졌다.
딱히 무리한 요구를 하는 분은 아니시니 미리부터 초조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퇴근을 서두른 탓에 약속 시각보다 30분이나 먼저 와 버렸다. 해인이 도착했을 때 애란은 회의 중이라서 사무실은 비어 있었다.
미리 언질을 받았는지 비서가 차와 케이크 한 조각을 건네며 잠시만 기다리라고 전해 주었다.
그렇게 소파에 앉아 가볍게 차를 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을 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들어왔다.
해인은 당연히 애란이 들어오는 줄 알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정작 그녀 앞에 나타난 사람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오수빈.
저 여자가 여긴 왜 왔을까.
“어머! 그쪽이 여기 왜 있어요?”
못 올 곳을 온 것도 아닌데 수빈은 마치 자신을 불청객이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보았다.
말투에서 묻어난 짜증이 수빈의 눈동자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해인은 동요하지 않고 담담히 그 눈을 마주했다.
“어머님이 오라고 하셨어요.”
“어머님이라뇨?”
굳이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수빈이 정색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표정을 고치고는 생글생글 웃는 것이 아닌가.
“지훈 오빠랑 헤어지라고 할 것 같은데…….”
“…….”
“오늘 기사 봤죠? 결혼 기사 때문에 신온의 주가도 오르고 지훈 오빠랑 내 결혼설도 모락모락 피어나고. 이래저래 어머님이 기분 좋으실 것 같아 찾아왔어요. 어머님이 내가 며느리 되는 걸 엄청 기대하고 있거든요.”
수빈의 얼굴로 자신감 넘치는 웃음이 가득 흘렀다.
음, 그 결혼을 할 사람이 아무런 생각도 없는데 어떻게 저렇게 해맑을 수가 있을까. 해인은 이제 그녀가 가엾기까지 했다.
“그래서요?”
“어머. 그래서라뇨?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예요?”
“네. 몰라서 묻는 거예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죠?”
뾰족한 가시가 달린 물음엔 비웃음도 섞여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인정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은 바로 수빈이었다.
지훈이 한 번도 마음을 준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매달리고 있지 않은가.
“뭐든지 그렇게 모르는 척만 하고 있을 건가요?”
“무슨 말이신지?”
“라임 트리 표지 화보까지 표절했으면서 무슨 낯으로 여길 와요?”
“이봐요. 그게 표절이 아니라는 것은 같이 작업한 수빈 씨가 가장 잘 알지 않나요?”
“난 모르는데요?”
“수빈 씨야말로 모르고 싶은 것 같네요. 뭐, 상관없어요. 증명할 방법은 아주 많으니까. 안성 매거진이 일찍 나오긴 했지만 우린 이미 작업 들어가서 이미지 다 나와 있었고 촬영만 하면 되는 시기였다고요. 시기적으로 너무 가까워서 내가 잠입이라도 해서 이미지 훔친 게 아니면 그럴 수가 없는 사안이거든요.”
“그랬나 보죠.”
확신하듯 말한 수빈이 코웃음을 흘렸다.
해인이 보기에 그녀는 이미 그 일에 대해 모종의 이야기를 한 듯했다. 그렇지않았다면 그런 인터뷰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수빈 씨가 잘못 알고 있네요.”
“그런 식으로 말만 할 게 아니라 증명을 하라고요. 증명은 안 하고 말로만 아니라고 하면 되나요? 그리고 어떻게 나를 그런 표절 잡지에 쓸 생각을 해요? 진짜 그런 허접한 잡지에?”
“지금 그 말, 지훈 씨가 들어도 되나요?”
“지훈 오빠 잡지를 말하는 게 아니라 표절을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솔직히 지훈 오빠가 나한테 관심 없다는 거 잘 알아요. 하지만 결혼은 어차피 정략이니까 난 어머님께 잘 보이기만 하면 되거든요.”
“어머님이 들어도 별로인 말 같은데…….”
“이미 나한테 푹 빠져 있는 거 모르세요? 여기 고애란 사장님이 돈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아세요? 그분은 오로지 돈으로 통하거든요.”
다분히 원색적인 말은 조롱과도 같이 느껴졌다.
친서민적이고 상큼한 이미지의 수빈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실상 돈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고, 그 돈의 힘도 적절히 이용할 줄도 아는 사람인 듯 보였다.
상대의 민낯을 본 해인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아무리 그렇다고 말이 좀 심하시네요.”
“사실을 말한 것뿐이에요. 어머님도 나를 이용하고, 나도 어머님을 이용하는, 우린 그런 관계거든요. 사랑?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지훈 오빠도 야심이 있으니까 해인 씨랑 지내다 보면 생각이 달라지겠죠. 한 번 이혼했는데 두 번을 못 할까요? 뭐, 기다리다 보면 기회는 오겠죠.”
“헛된 기다림이 될 거예요. 그 남자가 은근 사랑에 죽고 못 살더라고요.”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을 담담히 전하는 해인의 표정은 한없이 평화로웠다.
그 모습을 보는 수빈은 뭔지 모를 위기감에 휩싸였다.
기사가 나자마자 애란이 그녀를 불렀다면 분명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지훈만 믿고 저렇게 여유를 부리는 모습이 한편으론 한심해 보이기도 했다.
“장담하나요?”
“네. 장담해요. 난 지훈 씨를 믿거든요.”
“난 돈을 믿어요. 여기 고애란 사장님도 우리 아빠가 지훈 오빠 좋아하는 거 잘 아시거든요. 그래서 아들을 팔아서 우리 한강 그룹을 얻겠다는 그런 계산을 하신 거죠.”
“말이 갈수록 심하네요. 수빈 씨 말대로라면 그래도 시어머니 되실 분인데…….”
“사실이 그렇다는 거예요. 솔직히 좋아서 어머니, 어머니 했겠어요? 나도 얻을 게 있으니까 적당히 동안이다, 피부 좋으시다 하면서 비위 맞춰주는 거죠.”
그때였다.
수빈이 미처 닫지 않았던 문이 활짝 열리고 애란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 그랬었니?”
화사하게 웃으며 수빈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말투 또한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극히 부드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