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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개싸움. (70/92)


70. 개싸움.
2022.07.31.


내내 기세등등했던 수빈의 낯빛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어……, 어머니. 아, 사실은 이게, 그냥 하는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진심은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음……, 제가 어머님 좋아하는 거 아시죠?”

횡설수설하던 수빈은 결국 애교로 마무리하며 한껏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가식적 웃음에도 애란은 마주 화답해 주며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알아. 알아. 내가 그런 걸 오해하고 그러겠니.”

“역시 어머님은 쿨하세요. 그래서 제가 어머님을 좋아하고요.”

수빈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두 손을 꼭 모으던 그때였다. 등을 지고 있던 애란이 피식 웃으며 들고 있던 회의록을 책상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탁, 하는 그 소리가 시발점을 알리듯 분위기를 차갑게 식혔다.

돌아선 애란의 얼굴에 웃음기는 여전했다.


“근데 참 너도 너다.”

“예에?”

“여기 내 사무실이고, 언제든 내가 들어올 수 있다는 걸 알고 말조심했어야지.”

미소를 머금은 말은 충고인 듯하면서도 묘한 날이 서 있었다.

수빈뿐만 아니라 해인조차도 아직은 애란의 의도를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 비서가 회의가 늦을 것 같다고 해서 늦게 오시는 줄 알았어요.”

물론 수빈은 여전히 애란의 호의를 믿었다. 돈으로 연결된 끈끈함이니 쉽게 무너지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래. 그럼 가 봐.”

“네에?”

“가 보라고.”

“저, 이제 왔는데…….”

“그래서?”

되묻는 얼굴엔 여전한 미소가 남아 있었다. 말투 역시 크게 냉랭하진 않았지만, 말의 의미만큼은 칼처럼 단호했다.

수빈은 당황하면서도 설마 애란이 자신을 문전박대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머님하고 저녁 식사 같이하려고 왔어요. 오늘 아침에 난 기사 때문에 신온의 주가도 오르고 했으니까 기분 좋으실 것 같아서. 저, 맛있는 것 좀 사 주세요.”

수빈은 최대한 미소를 끌어올리며 여전한 애교를 발산했다. 그리고 그 애교는 남의 비위를 맞추면서 살아본 적이 없는 애란의 마음을 뒤틀리게 하기 충분했다.


“나 오늘 해인이랑 약속 있는데? 오려면 미리 약속을 하고 왔어야지. 너는 그런 에티켓도 없니? 내가 그렇게 아무나 와서 쉽게 만날 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닌데…….”

거절을 예상 못 한 수빈은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예에? 하지만…….”

“너 정말 눈치가 없구나? 귀하게 커서 버릇없는 것 정도야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버릇도 없고 눈치도 없으면 어쩌라는 거니?”

“그 무슨…….”

“아직도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니? 심지어 멍청하기까지 하네.”

애란이 쐐기를 박듯 말했다. 딱히 참을 생각도 없었지만 곱게 가 주었다면 이런 말까지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모욕을 받았으니 모욕으로 갚아주기는 하겠지만 오늘은 해인이 손님으로 와 있으니 적당히 보내려고 했었다.

하지만 역시 참고 넘어가는 것은 성정에 맞지 않는 일이었나 싶어 절로 쓴웃음이 터졌다.


“마, 말씀이 너무 심하신 것 아닌가요?”

충격에 빠진 수빈의 낯빛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입술이 덜덜 떨리는데 머리가 하얗게 되어 그저 조금 전 해인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하고 말 뿐이었다.


“너도 내 뒤에서 뒷담화 했잖아. 나는 대놓고 하는 중인데, 아직 모르겠니? 나도 너 별로야. 네가 가진 배경 빼면 네가 뭐가 있어? 나도 너 좋아서 오냐오냐했겠니? 네 서민적이고 친근한 이미지가 다 가짜라는 거 내가 몰랐을 것 같아?”

점점 높아지는 애란의 언성으로 인해 분위기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그 와중에 철저히 제삼자가 된 해인은 애란과 수빈의 가운데서 어쩔 줄을 몰랐다.


“네 말대로 나 돈 좋아해. 그렇다고 뒷말하는 며느리 비위 맞추며 살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아.”

“아까는 오해 안 하신다고 하셨잖아요.”

“너는 오해라는 뜻을 모르니? 오해를 안 한다고 했지. 네 진심을 모른 척한다고는 안 했는데?”

“제 진심이라면…….”

“아까 그랬잖아. 내가 아들을 팔 만큼이나 돈, 돈 한다며. 근데 말이야. 나도 내 자존심 지킬 정도의 돈은 있거든. 그래서 오늘부터는 네가 매우 싫어질 것 같은데, 어쩌지? 그리고 우리 지훈이? 지금 생각해 보니 언감생심 너 같은 게 우리 지훈이를 넘봤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어머니? 누가 네 어머니니? 나, 네 어머니 아니고 앞으로도 그런 사이 될 생각 없으니까 앞으로는 그렇게 부르지 말아라.”

 

 
쏟아지는 노골적인 말들을 들으며 수빈은 비로소 상황을 파악했다.

제 말로 인해 애란이 단단히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아무리 그렇다고 말 한마디에 사람이 저렇게 변한다는 것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피차 목적이 있어서 서로를 이용했을 뿐인데 저만 이렇게 당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였다.


“저한테 이렇게 함부로 하시면 안 될 텐데요?”

“뭐가 어째? 저게 아주 눈에 뵈는 게 없네. 네가 뭔데, 네가 한강 회장이야? 설사 네가 한강 회장이라고 해서 내가 눈 하나 깜짝할 줄 알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어디서 까불고 있어.”

애란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는 모두 사라졌다.

대신 노골적인 적의와 경멸이 가득 찬 말투가 오롯이 수빈을 향해 날아갔다.


“너,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겨우 이 정도로? 좀 더 할 건데? 막말로 네가 한강 딸이란 것 빼고 해인이보다 나은 게 뭐가 있어? S대 나온 우리 해인이한테는 머리로는 비비지도 못해, 그렇다고 네가 얼굴이 더 예뻐, 몸매가 더 낫니. 우리 해인이 키 크고 선도 예쁜데, 넌 모델이라면서 키도 별로잖아.”

그 살벌한 상황에서 해인이 참지 못하고 피식 웃어 버렸다.

속으로 파이팅을 외치다 갑작스러운 칭찬에 승자라도 된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아! 그렇다고 웃으면 안 되는데…….

민망해진 해인이 애란을 향해 죄송하다는 듯 머리를 살짝 숙였다. 그런 해인을 향해서는 애란도 함께 웃어 주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수빈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사실 167cm인 수빈의 키는 해인과 같았다. 일반인으로 치면 작지는 않지만, 모델로는 크다고 할 수 없었다. 더구나 해인은 비율이 좋은 탓에 같이 있어도 해인이 훨씬 커 보이기도 했다.

수빈이 질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그걸 다 합해도 우리 한강에 비빌 정도는 아니란 것 아시죠? 그래서 나를 더 좋아하셨으면서 왜 이제 와서 딴소리세요?”

“하!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이제 본색을 드러내네.”

애란이 보란 듯이 두 손을 허리에 걸쳤다.

오랜만에 개싸움이란 것을 진짜 제대로 하게 생겼다.


“야! 너 지금 나하고 해 보자는 거지? 어디서 별 같잖은 게 진짜. 한강? 그래. 아주 한강 미래가 훤히 보이네. 오 회장이 오죽하면 그렇게 우리 지훈이 탐을 냈을까. 우리 지훈이가 회사 이어받으면 몇 년 안에 너희 한강 넘어서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세요? 우리 아빠가 들으시면 어쩌려고.”

“내 말이 왜! 내가 네 아버지 앞에서 이런 말 못 할 줄 알아? 솔직히 지금 나는 오 회장한테 전화해서 네가 여기서 한 짓 그대로 다 말하고 자식 교육 똑바로 하라고 한마디 하고 싶은데…….”

애란이 뒤를 돌아 책상 위에 있던 핸드폰을 들어 당장 전화라도 하려는 듯 주소록을 터치해 나갔다.

그때였다. 지켜보던 해인이 그녀를 잡아 만류했다. 아무래도 상황이 너무 커지는 것은 막아야 할 것 같았다.


“어머니! 진정, 진정하세요.”

일단 애란을 먼저 만류한 해인이 수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쪽도 이제 그만 가 봐요. 어른께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수빈이 감히 누구를 가르치냐는 듯 해인을 쏘아보았다. 그 순간 애란이 그녀를 불러서 왔다는 말이 떠올랐다.

분명 헤어지라고 하려고 부른 것 같았는데…….


“그럼 오늘 저 여자는 왜 불렀어요?”

“네가 멋대로 사진 올렸잖아. 그걸 본 우리 지훈이가 당장 사과하라고 해서 불렀다. 한 번만 더 해인이 상처 주면 회사도 포기하고 미국으로 떠난다기에 지훈이 마음 좀 잡아 달라고 사정하려고.”

넋두리처럼 터진 애란의 말을 듣고서야 수빈은 비로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들이 그런 식으로 나오면 잘 설득해서 저와 이어 줄 생각을 해야지, 어떻게 한순간에 저렇게 돌아설 수가 있을까.

제게 그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수빈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정말 사과라도 하시게요? 자존심도 없으세요?”

“자존심이 있으니까 너같이 새파란 것하고 목에 핏대 세워가며 이러고 있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네. 해인이가 맘에 들지 않으면 내가 사과를 하겠니. 너는 별로 보고 싶지 않으니까 이렇게 자존심 걸고 난리 치는 거고.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우리 지훈이가 여자 보는 눈 하나는 타고났네. 수빈이 너한테 눈길도 주지 않은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어, 어떻게 그런 말을…….”

“어떻게 그런 말을? 너야말로 이제 네 시어머니 아니다 싶으니까 감히 너한테 이러면 안 된다며 기어오른 건 괜찮고? 더 이상 너랑 말 섞고 싶지 않으니까 상황 파악 끝났으면 이제 그만 좀 가 줄래?”

애란의 결정타가 날아오자 수빈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고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울컥 치밀어오르는 분한 마음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나한테 이러고도 정말 괜찮을 줄 아세요?”

“너야말로 조용히 있어. 내 말 한마디면 내일 인터넷이 네 이름으로 도배가 될 수도 있으니까. 친근하고 서민적인 모델 오수빈, 사실은 개념도 없고 버릇도 없다고. 그런 네 모습을 전 국민이 다 알게 해 줄까?”

어느새 흥분을 가라앉힌 애란이 고저 없이 내뱉었다. 그러나 분명한 경고와도 같은 그 말에 수빈은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결국, 수빈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쏘아보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수빈이 나간 후 애란은 비서가 가져다 준 물을 마시며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 사이 해인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말없이 기다렸다.

애란이 긴 한숨을 내뱉고는 해인을 바라보았다.


“넌 왜 아무 말 안 하니?”

“진정하실 때까지 기다리려고…….”

“쌈 구경이 재밌긴 하지?”

“네. 네? 아닌……데요?”

“됐어. 나도 쌈 구경 좋아해. 어떤 면에서는 쌤통이지 싶지? 그렇게 한강 그룹, 한강 그룹 하더니 아주 제대로 당했다고.”

“그런 거 아니에요.”

“나이 먹은 내가 참아야 하는데 네 앞에서 이게 무슨 꼴인가 싶다. 돈 좋아하는 속물의 말로려니 해.”

“저는 어머님이 대단하게 보이는데요?”

진심이었다.

해인은 그녀가 평생의 숙적을 물리쳐 준 위대한 장수처럼 보였다.


“뭐가?”

“최고였어요. 그동안 수빈 씨 얄미웠는데 제 속이 다 후련했어요.”

“너도 수빈이 그거한테 한마디 하지 그랬니. 맺힌 게 있으면 풀어야지.”

“이제 없어요.”

“너도 참.”

애란이 싱겁다는 듯 웃으며 남은 물을 마저 들이켰다.

이십 대 청춘이랑 싸우며 너무 진심으로 했나 싶어 살짝 민망했지만, 해인의 마음이 풀렸다 하니 나름 통쾌하기도 했다.


“하여튼 있는 집 자식들이 간혹 저렇게 본데없이 자란 티를 꼭 내던데, 혹시 우리 지훈이도 저렇게 재수 없었니?”

“아니요. 전혀요. 지훈 씨는 신사답고 매너 좋고 멋있고…….”

칭찬을 이어가던 해인이 쑥스럽게 웃었다. 속없이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낸 건 아닌가 싶었지만 정작 애란은 아들을 향한 칭찬이 고마웠다.


“말이라도 고맙다.”

“저도 감사합니다. 근데 혹시 지훈 씨가 어제……, 어머님 만난 거예요?”

“응. 거의 연을 끊겠다는 식으로 말했어. 너 스트레스 받게 하지 말고 환영해 주라고. 다시는 네 앞에서 한강 이야기 하지 말라고. 그렇지 않으면 너 데리고 유학 가서 다시는 안 온다고 엄포를 놓더라. 내가 진짜 아들놈들 키워놓아 봐야 소용없다는 말은 많은 들어봤지만 내 아들도 그럴 줄은 미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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