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내가 또 뭘 잘못했어?
(71/92)
71. 내가 또 뭘 잘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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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내가 또 뭘 잘못했어?
2022.08.04.
본의 아니게 죄인이 되어 버린 해인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틀 전 분위기가 나름 비장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네가 왜? 너한테 푹 빠진 내 아들놈이 문제지. 됐다. 가자. 너랑 밥 먹고 싶어서 레스토랑 예약해 놨어. 일단 일어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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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란이 예약한 레스토랑은 백화점 근처에 있었다.
고급 한우로 만드는 스테이크가 유명한 레스토랑이었다. 애란은 시종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즐겁게 식사를 했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일은 이미 기억에서 지웠다는 듯.
“여기 스테이크 맛있지?”
“네. 맛있어요.”
해인이 고개까지 끄덕이며 격한 동의를 표했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고기가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식사를 마친 애란이 의자 위에 두었던 명품 백을 집어 들었다. 그 안에서 큼지막한 금 거북이 하나를 꺼내서는 해인의 테이블 쪽으로 밀어 주었다.
영문을 모른 해인이 고기를 우물거리며 두 눈을 깜박거렸다.
“받아. 내가 아끼는 건데 그냥 너 줄게.”
“예에?”
“아깝긴 한데, 부부싸움 할 때마다 내가 그걸로 네 시아버지 머리를 때리는 상상을 하거든. 혹시나 진짜 그럴까 봐 주는 거야. 네가 이뻐서가 아니라.”
갑작스레 금 거북이를 받게 된 해인은 내심 당황스러웠다.
선물은 고마운데 이유가 시아버지 때문이라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거 팔면 꽤 될 거야. 네가 알아서 팔든지 그냥 집에 두든지 그건 너 알아서 하고.”
“감사합니다.”
호의로 주신 것이니 일단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가벼운 뉘앙스로 보아서 진실로 시아버지가 미우신 것은 아닌 듯했다.
“받아 줘서 고맙구나. 근데 혹시 너도 금이나 돈 이런 거, 싫어하니?”
“돈을 싫어하다뇨? 저 돈 좋아하는데요?”
“그렇지? 지훈이는 내가 늙어서도 돈, 돈 한다고 얼마나 나를 구박하는지 아니? 웃기는 놈이야. 내 돈으로 호의호식했으면서.”
“아직 철이 없어서 그래요. 어머님이 이해해 주세요.”
“내 말이 그 말이다. 그래도 네가 내 비위를 맞춰 주니까 마음이 누그러지네. 사실 솔직히 좀 서운하긴 했거든. 근데 내가 뭐 잘한 게 없으니까 나도 할 말은 없지. 그건 그렇고, 너희들 그 사진 때문에 무슨 일 있었니? 혹시 싸웠어? 지훈이가 그 정도로 사생결단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거든. 싸웠다면 네가 마음 풀어. 수빈이 그게 여우 짓을 했겠지, 설마 마음도 없는 지훈이가 그것을 덥석 안았겠니. 사진도 작정하고 찍은 것 같던데.”
“이제 다 풀렸어요.”
“싸우긴 한 거야?”
“싸웠다기보다는…….”
해인이 잠시 머뭇거리며 망설였다. 귀한 아들을 총으로 쐈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감이 오지 않았다.
금 거북이로 머리를 찍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어 용기를 내 사실을 전했다.
“제가 총으로 쏴 버렸어요.”
“으응? 무슨 총? 근데 어떻게 살아 있어?”
“비비탄 총으로 쐈어요. 앞으로 행동 똑바로 하라고. 죄송……합니다. 귀하신 아드님께.”
“네가 총을 쏜다고 우리 지훈이 그대로 맞고 있었어?”
“손까지 들던데요? 한 번만 살려 달라고.”
그 누구에게도 구겨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녀석이 비비탄 총에 손을 들었다고?
애란은 그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하. 내가 미친다 미쳐. 임자 만났네. 우리 지훈이.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와서 화풀이했네. 뭐.”
“죄송해요.”
“너희들 진짜 재밌게 사는구나. 나는 그렇게 살아 본 적이 없는데…….”
애란의 눈빛이 아련히 젖어 들었다. 산다는 게 뭔지 저런 소소한 재미를 느껴 본 적이 언제인가 싶다.
제 아들은 그래도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고, 그 여자와 즐겁게 사는 듯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여자와 헤어지길 원했으니 얼마나 서운했을까. 모든 것이 원만하게 해결되어서 이제라도 다행이었다.
“그 총 나도 좀 빌려 줄래?”
“설마 아드님을 쏘시게요?”
“아무리 미워도 내가 내 아들은 안 되지.”
“그럼요?”
“네 시아버지.”
애란의 대답은 담백했다. 난처해지는 해인의 표정을 보면서도 그녀는 어느 때보다도 비장하게 제 의사를 전했다.
“너는 내가 금 거북이 줬잖아. 이제 네 남편이니까 그걸로 머리통 때려도 난 모른 척할게. 대신 그 총은 나한테 넘겨.”
* * *
어느 날부터인가 안방의 욕실마저 점령당했다.
하체에 수건을 두르고 자신의 방인 양 스킨을 바르고 있는 지훈을 보니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오는 거야?”
방문 소리에 돌아본 지훈이 해인을 보자마자 반갑게 다가왔다. 한 손으로 능숙하게 해인의 허리를 휘감고는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지금 왔다. 근데 여기가 너희 집 안방이니, 라고 묻고 싶었던 해인은 제 발등을 찍는 심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어머님의 허락까지 받았으니 이제 더 이상의 장애물은 없었다.
“왜 아무 말이 없어?”
히죽거리는 남자가 자랑스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어이가 없다. 어쩌면 이것이 자연스러운 부부의 모습일 테니 낯설어도 적응해야 할 부분이기는 했다.
“멋있어서요.”
형식적인 찬사를 건넨 해인이 그의 가슴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슴엔 미처 닦지 않은 물방울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탄탄한 근육을 더 광적으로 만들려고 일부러 닦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내가 언제 올지 알고. 아니, 오는 것을 알고 일부러 물을 묻혔을 수도 있었다.
해인은 탐나는 근육을 못 본 척하며 가볍게 그의 몸을 빠져나와 곧장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나 혼자 먼저 와 있으니까 허전하더라. 이제 혼자 못 있겠어. 근데 누구 만난 거야?”
“어머님이요.”
“어?”
어머니, 그 한마디에 따라오던 지훈이 문 앞에서 흠칫 굳어 버린다.
부러 문을 닫아걸고 서둘러 홈웨어로 갈아입은 해인이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때까지도 지훈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벌리고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요?”
“아,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바짝 쫄았으면서.
문지기처럼 서 있는 그를 가볍게 밀어내고 안방을 나와 거실로 향했다.
여전히 하체에 수건만 두른 지훈이 종종걸음으로 따라 나왔다.
“어, 어머니를 왜?”
갑자기 왜 말은 더듬고 저러실까.
대답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 앞에 세워둔 총을 집어 들었다. 지훈의 통렬한 반성을 위해 며칠 동안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총을 두었었다.
해인이 그 총을 다시 들자마자 지훈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내가 뭘 또 잘못했어?”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아니면 학습의 위대함인가.
“잘 생각해 봐요. 혹시 무슨 잘못, 했어요?”
“아니, 없는데?”
“그런데 손은 왜 들까요?”
“그건, 그러니까…….”
“그러니까?”
“호, 혹시 어머니 만난 거?”
“그게 왜요?”
“그게 그러니까 내 멋대로 만나서 어머니께…….”
“나랑 헤어지기 싫어서 한 건데 그게 왜 잘못이죠?”
“그렇지?”
비로소 안심한 지훈이 냉큼 손을 내렸다.
얼굴엔 다시 화색이 돌았다.
“그럼 그건 왜 들고 있는 거야?”
“어머님이 빌려 달라고 하셔서.”
“왜?”
“이걸로 아버님 쏘고 싶다고 하시네요.”
“뭐? 그래서 갖다 주려고?”
두 분 사이가 언제 그렇게 됐을까.
화기애애하지는 않아도 그 정도는 아닐 텐데…….
“그럴 수는 없죠. 얼른 버리고 없다고 하려고요.”
“좋은 생각이야. 역시 우리 해인이는 현명해.”
지훈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가 두 팔로 해인을 안았다.
짐작건대 어머니와의 만남은 좋은 분위기 속에 이루어진 듯했다.
“어머니 만나서 뭐 했어? 혹시 뭐라 하시지는 않았어?”
“밥도 사 주시고 지훈 씨 주먹만 한 금 거북이도 주시던데요?”
“금 거북이?”
주먹만 한 금 거북이라면 어머니가 침대 곁에 두고 아끼시던 거였는데, 크게 비싼 건 아니고 천만 원 정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거북이를 내어줄 정도면 해인이와 잘 지내보고자 하는 의도인 것 같은데…….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셨으면서 하루 만에 해인이를 불러서 이런 대접을 해 주셨다고?
역시 우리 어머니시다.
지훈의 얼굴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줄려면 억대의 다이아를 줄 것이지, 너무 소소한 거 아닌가 싶었지만 일단 출발이 좋았다.
“어머니가 우리 해인이와 잘 지내고 싶으신가 보네. 그런 거 누구에게 주실 분이 아닌데.”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나 기분 엄청 좋았어요.”
금 거북이 보다는 수빈에게 포화처럼 날려 주신 말들로 인해 기분이 더 좋았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아껴두었다가 침대 속에서 해야겠다.
기분이 좋다는 해인을 보는 지훈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어머니를 만났어야 했는데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이제 같이 가서 어머님이랑 아버님과 식사도 하고 그래요.”
“그래.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고맙긴요. 나 때문에 지훈 씨가 어머니 서운하게 한 거 생각하면 내가 더 미안해요.”
“괜찮아. 우리 어머니, 그런 건 금방 잊어 버리실 거야. 마음에 담아 둘 거였으면 오늘 해인이를 만났겠어?”
“그건 그래요. 그리고 앞으로 내가 더 잘하면 되죠.”
“그래. 근데 뭐, 다른 말씀은 안 하시고?”
“다른 말씀이요? 아, 있다. 그걸로 지훈 씨 말 안 들으면 머리통 날려 버리라고 하시던데요?”
내내 미소를 머금고 있던 지훈의 얼굴이 일시에 굳었다.
그걸로라니? 그리고 그걸로 내 머리통을 왜?
“무슨 말이야?”
“못 들었어요? 정확히 말해줄 테니까 잘 들어요. 금 거북이로 지훈 씨 머리통 날려 버리라고, 하셨어요.”
“설마. 어머니가 그럴 리가 없어.”
“진짜로요. 내가 지훈 씨 머리통 날려도 어머님이 모른 척해 주시기로 했어요.”
“그냥 저 총을 버리지 않는 것으로 할게. 차라리 총이 낫겠어.”
평소 잔정이 없던 어머니께서 끝내 자신을 버렸구나 싶은 지훈의 표정이 침통해졌다.
차라리 비비탄 총알을 맞고 말지. 금 거북이로 머리통 맞는 거는 잘못하면 진짜 골로 가는 거잖아.
우리 해인이 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사람 일은 또 모르는 거니까.
***
백화점을 나온 수빈은 곧장 안형준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는 약속을 잡았다.
그가 알려 준 와인바에 먼저 도착한 그녀는 벌써 석 잔째 와인을 들이켜는 중이었다.
한참 후 도착한 형준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야?”
“나 참, 기가 막혀서.”
피차 인사를 나누지는 않았다. 친하지도 그렇다고 친하지 않은 것도 아닌, 피차 이익을 위해 맺어진 관계에 그런 가식적인 여유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갑자기 왜.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주해인 그 여자, 어떻게 할 거예요? 자긴 표절 아니라고 밝힐 자신 있는 것처럼 말하던데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수빈은 직전 백화점에서 있던 이야기를 형준에게 해 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형준의 낯빛이 차갑게 식었다.
결국, 두 사람의 재결합이 공식화되는 순간이었다.
뭔지 모를 패배감이 밀려옴과 동시에 속이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기어이 윤지훈 그놈과 재결합을 한단 말이지.
씁쓸하게 웃은 형준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아무리 그렇다고 나중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그렇게 싸우면 돼? 차라리 잘못했다고 빌었으면 기회는 또 올 텐데.”
“그럴 상황이 아니었어요. 지훈 오빠가 그 여자랑 떠난다고 협박을 해서 이미 마음이 기울었더라고요.”
“그래도 나중 일은 모르는 거잖아. 그리고 백화점에서 그렇게 싸우면 모델 이미지에 타격 있지 않아? 네 이미지 엄청 좋던데. 지나가는 기자가 봤으면 이미지가 과대포장 됐다고 난리가 아니었겠네. 저번에 밥 먹는 프로 나온 것도 반응 좋던데…….”
“이미지 과장된 연예인이 어디 한둘인가. 지오도 다 만들어진 이미지나 마찬가진데.”
“지오? 그 대단하다는 지오?”
“네. 그 지오. 돌아가신 엄마 이야기하면서 여자들 홀리는 수준이 장난 아니거든요.”
내내 침울해 있던 수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요즘 지오가 엄청 공들이는 여자가 있는데……, 그 여자한테는 진심인 것 같기도 해요.”
“공들이는 여자?”
형준이 관심을 보였지만 수빈은 답을 해 주지 않고 은근한 미소만 지었다. 저 남자는 주해인을 좋아해서 저러니 차라리 비밀로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수빈은 간절한 마음으로 지오가 성공하길 바라고 있었다.
입을 무겁게 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지오가 진심이든 아니든 그건 알 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