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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또 하나의 즐거움. (72/92)


72. 또 하나의 즐거움.
2022.08.07.


상진은 다소 피로하다는 듯 의자 뒤로 몸을 느슨히 기댔다. 눈앞의 여자를 또 상대하고 있자니 속에서 역한 무언가가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가지가지 했던데.”

“무슨 말이에요?”

“하! 돈만 주면 뭐든 다 하는 것들은 머리가 나쁜 건지. 뒷일이 어떻게 될지 전혀 생각 못 한다는 거잖아. 눈앞의 돈 때문에.”

“본론을 말해요. 무슨 일인지.”

한 차장 역시 또다시 부사장의 비서를 상대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이 못마땅했다.

고작 비서에게 조롱이나 듣고 있자니 어쩌다 이런 일에 개입을 했을까 싶어 후회막심이었다.


“설마 정말 무슨 일인지 몰라서 물어보는 건 아니지?”

지난번 일도 그렇지만 범죄나 다름없는 이번 일은 정말 용서가 안 되는 일이었다. 남의 이미지를 몰래 빼내고서도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것 같은 한 차장의 모습에 치가 떨렸다.

상진이 경멸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한 차장을 쏘아보았다.


“우리 형수님 이미지 빼돌려서 안형준에게 준 거, 당신이지?”

“뭐, 뭐라고요? 내가 왜 그런 일을, 나 아니거든요?”

“형수님이 봤다던데? 당신이 회의실 들어와서 이미지 사진 찍어간 거.”

그날을 떠올린 한 차장은 이를 악물었다. 물론 그때 해인이 뒤늦게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것은 맞지만 그건 이미지 사진을 다 찍은 다음이었다.

그러므로 해인이 그 장면을 봤을 리는 만무했다. 절대 저런 유도신문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말도 안 돼요. 그런 일은 하지도 않았는데 도대체 뭘 봤다는 건가요?”

“발뺌해봐야 소용없어. 내일 안형준 그놈이랑 당신도 함께 나란히 고소 들어갈 예정이라고 들었으니까 당신도 그렇게 알고 있어.”

“무, 무슨…….”

한 차장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사실 해인의 표절 사건이 터지고 내내 불안했었다.

난영이 그 이미지를 찍어서 보여 달라고 했을 땐 그 이미지를 그렇게 쓸 줄은 차마 몰랐었다.

그 일이 혹시나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그러잖아도 걱정이었는데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난영과는 이미 모르는 일로 하기로 입을 맞췄지만 무작정 그녀의 말만 믿고 있어도 되는지 혼란스러웠다.


“솔직히 말해. 누가 시켰는지. 뭐, 이미 알고 있으니까 자백만 해도 상관없고. 그렇게 하면 참작의 여지는 있다고 형수님이 전해 주라더군. 난 절대 그러기 싫은데.”

“도대체 무슨 증거로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증거?”

픽 웃은 상진은 지훈이 건네준 자료를 테이블 위로 밀어 주었다.

해인이 정리한 이미지 파일을 출력한 것으로 하나하나 날짜별로 기록된 것들이었다.

자료를 살핀 한 차장은 애써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뭔데요?”

“그 증거를 내밀면 이제 역으로 안형준이 안성모직이 엘브를 표절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할 텐데, 과연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래도 아니라고 버티겠지. 그렇게 해서 재판에 가면 누가 이길까. 안형준은 우리 형수님에 대한 개인적 감정으로 음성 파일도 조작한 이력이 있어. 그것까지 다 엮어서 고소할 거라던데, 그럼 당신도 피해 가지는 못할 거야. 현명하게 판단해. 아, 그리고 당신 핸드폰으로 이미지 찍었을 건데, 그거 포렌식 하면 밝혀지는 것은 순식간이야. 핸드폰 없앤다고? 그렇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증거인멸이고.”

한 차장은 본능적으로 가방을 움켜잡았다. 다 떠나서 포렌식이라는 말 자체로 두려움이 밀려왔다.

뉴스에서 보면 포렌식 하면 뭐든 다 밝혀내던데 설마…….

순식간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돈 받고 이런 일을 했다는 게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다들 저를 뭐라 할까.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나, 나는요. 정말 몰랐어요. 사모님이 정말 이미지만 찍어서 보내 달라고 했거든요. 내가 한 일은 그게 전부라고요. 나는 안성 모직과는 아무 상관이 없단 말이에요.”

“찍어서 빼돌린 사실은 인정한다는 거네?”

“정말 참작의 여지는 있는 거죠? 난 정말 그 일이 그렇게 커질 줄 몰랐다고요.”

“지금부터 녹음할 거니까 사실대로만 말해. 그리고 가방에 있는 핸드폰은 나한테 넘겨야 할 거야. 그럼 오늘은 곱게 보내 주지.”

“꼭 넘길 필요까지 있나요? 어차피 사실대로 말할 건데…….”

“나는 당신 같은 부류는 절대 안 믿거든. 뭐, 지금 여기서 112 불러서 같이 경찰서로 가는 방법도 있고. 선택은 당신이 해. 이게 내 마지막 자비니까.”

상진이 마지막 경고를 하듯 매섭게 내뱉었다. 한 차장은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결국,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상진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 * *

세나와 난영을 불러 앉힌 석현은 이야기에 앞서 긴 한숨부터 내쉬었다.

가족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이 못 견디게 싫었지만 이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 표절 논란이 터졌을 땐 왜 그런 일을 했냐며 난영에게 고함부터 질렀다.

난영은 처음엔 모르는 일이라 우기더니 나중엔 그 모든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했다.

그 후 석현은 진지하게 고민을 했고 적절히 타협점을 찾아보았다. 일단 난영을 잘 달래서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제 다 끝났으니까 그만해. 난 더 이상의 분란은 원치 않으니까.”

“뭘요?”

난영은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표절 사건이 터진 후 며칠 동안 냉전이 지속되었다.

남편이 그 모든 일의 전말에 대해 알고 있더라도 난영은 물러설 수 없었다. 왜 그런 짓까지 했는지는 남편이 가장 잘 알 것이다.


“해인이 화보 이미지 빼돌린 것 인정하고 사과해.”

“증거도 없는데 사과를 왜 해요?”

“증거가 있어. 한 차장도 돌아선 것 같고.”

“그럴 리가 없어요.”

한 차장이 돌아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녀가 그 일을 자백하면 그녀 또한 그 죄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전화 통화를 하며 피차 모르는 일이라 우기기로 했는데 그렇게 쉽게 돌아설 리가 없다.

설령 한 차장이 돌아섰다 하더라도 자신은 끝까지 모르는 일이라 버티면 될 일이었다. 한 차장이야 버리면 그만이니까.


“가서 해인이에게 사과해. 그럼 용서해 줄 수도 있잖아. 내가 해인이에게 회사 물려준다 해서 이런 일을 벌인 것 같은데, 설령 해인이가 아니더라도 세나가 회사를 이끌 재목은 아니야.”

“우리 세나가 왜요?”

“회사 이끄는 게 뭐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세나는 그냥 편하게 건물주나 하면서 살 수 있게 해 주면 되잖아.”

내내 두 사람의 눈치를 보던 세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동안은 엄마가 시키는 대로 회사의 주인이 되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겼었다.

하지만 아빠 말대로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복잡하게 회사 일하며 골치 아프느니 차라리 그게 낫겠다 싶었다.

세나가 냉큼 대답했다.


“엄마. 나 그러고 싶어.”

“시끄럿.”

난영이 두 눈을 부라리며 세나에게 눈치를 주었다. 기껏 건물주나 시키려고 애지중지 키운 것이 아니었다.

딸이야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다 쳐도 아빠란 사람이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당신 말은 그깟 건물이나 받고 회사 근처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소리잖아요.”

“내 말 들어. 세나는 이 회사 감당 못 해. 그러니 더는 욕심부리지 마. 해인이가 안 하면 윤 서방이 알아서 전문 경영인에게 넘기든 할 거니까.”

“당신은 무슨…….”

“그렇게 알고 더 이상은 해인이 괴롭히지 말라고. 내가 알아서 세나 몫 잘 챙겨 줄 거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고. 세나도 내 딸이야. 내가 내 딸 잘못되길 바라겠어? 내가 다 알아서 한다고. 그리고 당신에게 휘둘려서 해인이랑 사이 나빠지는 거 더는 못 봐.”

단호히 말한 석현이 소파를 박차고 일어섰다. 세나는 그런 아버지를 한 번, 황망히 앉아 있는 엄마를 한 번 바라보다 입을 꾹 다물었다.

아빠의 말에 마음이 흔들리긴 했지만, 막상 엄마의 얼굴을 보니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냥 건물주가 딱이긴 한데…….

난영은 방으로 들어가는 남편의 등을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해인이랑 사이 나빠지는 것을 못 본다고?

해인이도 세나를 동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난영은 해인이 세나의 뺨을 후려치던 때를 생각하며 입술을 짓씹었다.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에서 불이 나는 것만 같았다.


 

* * *



“드디어 내일이 디데이네?”

“한 차장 일은 잘된 거예요?”

“응. 상진이가 자백 음성 받아놨어. 증거품으로 핸드폰도 압수했고. 별로 버티지도 못했다던데?”

“그 사람도 참 불쌍하네요.”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인과응보일 뿐이야. 안형준이 그놈도 마찬가지고.”

“그렇죠. 근데 그런 이야기를 옷을 벗으면서 하니까 실감은 안 나네요.”

“이 정도로 벗었다고 할 수는 없지.”

지훈이 하체를 감싸고 있는 큰 타월을 살짝 건드렸다.

저러다 풀어질라.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은데 어찌어찌 버티는 중이었다. 타월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며 해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지훈은 벌써 이틀째 저러고 집안을 활보하고 있었다. 그렇게 입는 이유를 물어보니 언제든 너를 위해 준비 중이란다.

오늘따라 차갑고 단것이 먹고 싶어서 냉동실에 있던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었다. 귀한 아이스크림을 지훈의 입에 받아버릴 뻔했다.

아니, 차라리 그랬어야 했나 싶다.


“춥지는 않아요?”

“전혀.”

아아, 그러세요, 라고 중얼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지훈이 뒤를 졸졸 따라왔다.

벗고 있는 남자를 피하기 위해 가는 건데 왜 따라오는지 모르겠다.

우유를 꺼내 컵에 따르고 거실 소파로 가서 앉았다. 헐벗은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저녁 먹은 게 부실했어? 아이스크림으로도 부족해?”

“유통기한 지날까 봐 먹는 거예요. 근데 왜 내 뒤만 졸졸 따라다녀요? 오늘은 일거리 없어요? 전엔 집에 와서도 항상 일했으면서.”

“항상 그런 건 아니야. 그냥 할 일 없이 앉아 있을 때도 있었어.”

“정말요?”

“그럼. 그러다 책 읽고 뭐, 그랬지. 그땐 어색해서 얼굴 마주하기도 그랬으니까.”

“그랬죠. 근데 지금은 다 벗고 다니고.”

“그건 아니지만, 혹시 원한다면 그럴 수도 있어.”

우유를 다 마셨기에 망정이지 이번엔 우유를 들이붓고 싶었다. 그 생각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건지 지훈이 다 마신 우유 잔을 얼른 받아들었다.

마치 시중드는 사람처럼 구는 그 모습에 웃음이 났다.

다채롭게 변모해가는 남자를 보는 것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해인의 웃는 모습을 보며 지훈이 가볍게 어깨를 감싸 안을 때였다. 서재 쪽에서 지훈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전화 왔어요.”

“전화 받고 금방 올게.”

지훈이 아쉽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와요.”

비로소 자유가 찾아온 것 같으니까.

몸이 찌뿌둥해서 스트레칭이나 해야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설 때였다. 이번엔 안방에서도 벨 소리가 들려왔다.

해인이 안방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확인했다.

번호가 낯이 익었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던 해인이 차분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누나. 아직 내 목소리 안 잊었죠?

역시 지오였다.

난처하네. 이제 만날 수도 없는데…….


“아, 네. 지오씨.”

-누나 목소리 들으니까 좋네요. 잘 지내셨죠?

“네. 잘 지냈어요? 지오씨도 잘 지냈죠?”

-아뇨. 잘 못 지냈어요.

“무슨 일 있나요?”

저번에 만났을 때 우울증 증세가 있다고 했었다.

설마 그게 더 안 좋아진 건가.


-네. 우울증이 좀 더 심해져서 많이 힘들었어요.

“그래도 기운 내셔야죠.”

-이렇게 누나 목소리 들으니까 힘이 나네요. 누나 얼굴 보면 더 힘이 날 것 같아요.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

-누나. 우리 친구 맞죠?

“그렇죠.”

-나, 누나 만나고 싶어요. 의사 선생님이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게 치료에 중요하다고 했거든요. 누나. 그냥 친구로서 편하게 만나는 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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