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73/92)


73.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2022.08.11.


뭔지 모를 연민이 해인의 가슴을 휩싸고 돌았다.

매정하게 뿌리치기엔 그의 사연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 순간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엄마가 떠오른 까닭에 차마 지오를 거절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해인은 선을 지키고 싶었다.


“그럼 우리 같이 만나요.”

-같이……라니요?

“둘이 만나는 건 좀 그렇고, 남편과 같이 나갈게요. 셋이 만나요.”

-…….

“지오 씨의 우울증 증세에 도움이 된다면 지오 씨를 만날 수는 있어요. 근데 저 혼자는 나갈 수 없으니까 아무래도 그게 제일 좋겠어요.”

-전남편께서 혹시 나 만나는 거 싫어하시나요?

“그렇기는 한데, 솔직히 혼자 지오 씨를 만나는 건 부담스럽거든요. 그리고 이젠 전남편이 아니고 그냥 남편이에요.”

-그래요. 나는 해인 씨가 원하는 대로 할게요. 언제가 좋을까요?

“지오 씨 편한 시간으로 잡아서 연락해 줘요. 나도 일단 남편에게 의사를 물어봐야 하니까. 그리고 미안하지만, 남편이 싫다고 하면 저도 나가기 힘들 거예요.”

-그래요. 내가 다시 연락할게요. 고마워요. 누나.

왠지 처량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몇 번 만난 것도 인연이라고 차마 모질게 끊어내지는 못하고 말았다.

지훈이 이해해 줄까.

그가 거절한다면 차라리 저도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았다. 그렇게 깊어지던 갈등을 멈추게 하는 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인이도 전화 왔었어?”

핸드폰을 손에 쥔 해인이 고개만 돌려 지훈을 바라보았다.


“지오 씨가…….”

“지오 놈이 또?”

지오의 이름만 듣고도 지훈의 입에선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해인이 진정하라는 듯 두 손을 그의 가슴에 얹으며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만나자고 해서 지훈 씨랑 같이 간다고 했어요.”

“나랑? 그래? 그랬더니?”

“좋다고 하던데요? 그래서 다시 시간 맞춰서 연락 주기로 했어요.”

“안 만날 수는 없는 거야?”

지훈이 내키지 않는 듯 되물었다. 저와 재결합을 한다고 했음에도 지오는 우리 해인이를 친구로서 만나고 싶은 듯했다.

어려서부터 알았던 사이도 아니고 다 큰 성인으로 만난 남녀인데, 친구가 가당키나 할까. 지훈이 듣기엔 뻔한 수작질에 지나지 않았다.


“그게……, 좀 불쌍한 면이 있어서. 그때 말했잖아요. 우울증 때문에 많이 힘든가 봐요. 그래서 혼자 나가기는 그러니까 셋이 같이 만나기로 했어요. 나를 친구로 생각해서 엄마 이야기도 하고 그랬었는데 아무래도 그냥 모른 척하기는 좀 그랬어요.”

“그렇긴 한데…….”

“셋이 만나는 것도 싫어요?”

“아냐. 그렇게 해.”

지훈이 이해한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지난번 그를 만나고 온 해인이 우울증 이야기를 하며 해 준 이야기가 있었다.

살짝 꺼림칙하긴 했지만, 스타들이 무대 뒤에서 느끼는 허무함에 대해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더구나 엄마로 인한 상실감과 아픔은 해인도 같이 공감하는 부분이었기에 무작정 못 만나게 할 수도 없었다.


“일단 같이 가는데, 무조건 내 옆에 앉아야 해.”

“당연하죠. 근데 지훈 씨는 누구랑 통화했어요?”

“하 비서. 내일 보도자료 보냈으니까 검토해 보라고.”

“우리 재결합 기사도 같이 냈으면 해요.”

“으음? 그건 저번에 싫다고 했었잖아.”

“생각이 바뀌었어요. 보도자료도 내고 같이 찍은 사진도 올리면 헛소문도 잠잠해질 것 같은데, 어때요?”

“나야 좋지. 해프닝이라고 정정기사를 냈는데도 아직 이러쿵저러쿵 말은 나오는 것 같더라고. 이참에 확실히 보여주는 게 나을 것 같아. 지금 사진 찍을까?”

“그래요. 근데 일단 옷은 좀 입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도 괜찮은데…….”

해인이 가볍게 눈을 흘기자 지훈이 타월을 한 손으로 잡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해인이 강제로 몸을 돌려 그를 방 밖으로 내보냈다.

가서 옷 입고 오라는 듯.

지훈을 서재 옆 드레스 룸으로 보낸 해인은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살짝 덧발랐다.

화장을 지운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홍보용 사진이니 신경을 쓰긴 해야 할 것 같았다. 지난번 쇼핑 때 친구와 함께 샀던 립스틱을 바르는 사이 지훈이 돌아왔다.

평소에도 자주 입고 다니는 검은색 티를 입고 있었다. 옷이 몸에 달라붙어서 울퉁불퉁한 근육들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소파에 앉아서 찍을까?”

“좋아요.”

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해인의 어깨에 팔을 두른 지훈이 핸드폰을 셀카 모드로 바꾸었다.

표정을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며 입꼬리를 조금 올려보았다.


“생각해 보니 우리 같이 찍은 사진 한 장 없는 거 있죠.”

“그러네. 오늘 원 없이 찍자.”

찰칵. 예고도 없이 무조건 찍기부터 했다.

사진을 확인한 해인의 표정이 별로였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이쁜데?”

“지훈 씨가 너무 잘 나왔잖아요. 난 별론데.”

“내가 잘 나온 게 싫어?”

“그럼요. 그러잖아도 여기저기 눈독 들이는 여자들 많던데…….”

“나를? 그런가? 그럼 얼굴을 좀 구겨볼게.”

그렇게 또 찰칵.

다시 사진을 확인했는데 이번엔 지훈의 표정이 별로였다.


“이것도 안 되겠다.”

“이건 좋은데요?”

“안 돼. 해인이가 너무 예뻐.”

“내가 예쁜 게 싫어요?”

“응. 지오 놈도 볼 거 아냐.”

그렇게 다시 찍은 사진이 무려 서른 컷을 넘어갔다. 오늘 원 없이 찍자는 말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 사진 중 대충 적당히 나온 사진을 상진에게 보낸 시간은 무려 밤 10시였다. 상황을 설명하고 보도자료에 쓸 기사는 네가 알아서 대충 작성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한참 후 답신이 왔다.

노동청에 신고하려다 형수님이 너무 아름다워서 참았다는…….

그러든지 말든지 지훈은 해인과 찍은 사진들을 감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잘 나온 사진들은 따로 저장해 두며 두고두고 볼 작정이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지훈은 기업간 상생 혁신 포럼에 참석했다. 초대장이 왔으나 가지 않으려 했는데 이 행사에 안형준이 참석한다는 것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설명회가 끝나고 가벼운 다과와 함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지훈은 안면 있는 인사들과 악수를 주고받으며 포럼이 끝나길 기다렸다.

안형준과는 굳이 아는 척을 하지 않았고, 그 역시 지훈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하나둘씩 컨벤션 홀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제 되었다는 듯 지훈이 상진에게 손을 내밀었고, 상진은 기다렸다는 듯 서류 가방에서 한 움큼의 종이를 꺼내 건네주었다.

종이를 받아 든 지훈이 형준이 있는 부스를 향해 걸어갔다. 형준은 지훈이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야 그를 발견했다.

이미 그가 여기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피할 이유도, 굳이 부딪힐 이유도 없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친히 납시어 주시었다.

지금쯤 해인의 표절로 인해 전전긍긍하고 있을 텐데 겉으로는 태평해 보였다. 혹시라도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라며 기사라도 내 주길 부탁하러 온 것인지도 몰랐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형준이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물었다.


“혼자 보기 아까운 장면일 것 같아서.”

지훈의 여유로운 대답과 함께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그중에는 지훈이 특종을 주겠다며 섭외한 기자도 있었다. 카메라를 든 그는 기대감을 잔뜩 담은 얼굴로 금방이라도 터질 특종을 노리고 있었다.

지훈은 지체하지 않고 그 기대감에 응답해 주었다.

지훈이 들고 있던 종이를 들고 포커 카드를 뿌리듯 형준에게 휙 던졌다. 하얀 종이들이 형준의 눈앞으로 휘날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당황한 형준이 기가 찬 듯 지훈을 노려보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직접 확인해 봐. 그게 뭔지.”

형준의 시선이 바닥에 흩어진 종이로 향했다. 홀을 떠나려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멈췄고 포럼장을 취재하던 기자들도 저마다 플래시를 터트리며 이어질 상황을 주시했다.

형준이 바닥에 떨어진 종이 몇 장을 주워 훑어보았다. 모델의 포즈와 의상 이미지들이 시간별로 정리된 자료인 듯했다.

그제야 증거가 있는 것 같다는 수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허를 찔린 것 같았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은 척했다.


“이게 뭔데?”

“보면 알았을 것 같은데…….”

모른 척하고 싶을 것이다.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죄를 인정할 수는 없을 테니까.

지훈이 픽 웃으며 상진에게 방금 건네받은 마지막 종이 한 장을 펼쳐 보였다.


“그리고 이건 네가 피고인 고소장 복사본.”

형준보다 기자들이 먼저 달려들었다. 지훈은 부러 종이를 던지지 않고 기자들이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도록 한동안 종이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지훈은 그 고소장을 형준의 얼굴 쪽으로 던져 버렸다. 종이를 낚아챈 형준은 적잖은 모멸감을 느꼈다. 하필이면 또 저놈과 엮여서 일이 꼬이는구나 싶었다.

불끈, 주먹을 쥐어 고소장을 구기던 그 순간 지훈이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는 것이 보였다.


“이건 우리 기자님들을 위한 것.”

지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한 차장이 자백한 음성 파일이 재생되었다. 자신이 사주를 받아서 해인의 이미지를 빼돌렸다는 내용이었다.

플래시를 터트리던 기자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우연히 특종을 접한 기자들이 흥분하기 시작했고 포럼을 마치고 홀을 나가려던 이들도 걸음을 멈추고 지훈과 형준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신온그룹 윤지훈 아니야?”

“그러게. 저긴 안성 모직 아들인 것 같고.”

“근데 무슨 일이지?”

“얼마 전에 표절사건 있었는데 그 일 같아.”

“들어보니 안성 모직의 안형준이 이미지 빼돌리고 덮어씌웠나 봐.”

“안성 모직이 요즘 자금 사정도 안 좋다던데.”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형준의 귀에도 고스란히 들려왔다. 형준은 일그러진 얼굴로 지훈을 노려보며 비소를 흘렸다.

이 사태에 장모가 엮이는 것이 윤지훈의 약점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고소까지 하다니,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도대체 그걸 왜 나한테 들려주는 거지? 사주를 한 당사자에게 직접 가야 하지 않나?”

“당사자도 물론 고소할 거야. 넌 공모자가 될 것이고. 안형준, 너는 좀 극적으로 드러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내가 직접 왔다. 네가 그동안 얼마나 비열한 짓을 했는지 더 많은 사람이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지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포켓에 두 손을 찔러넣었다.

난영의 사주를 받았다는 부분은 편집했다. 그건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터트릴 내용이 아니었다.


“너 따위가 뭐라고.”

안형준은 지훈을 향한 증오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고소를 당했다는 사실보다 해인이 선택한 윤지훈이라는 남자에 대한 열등감에 더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너, 이 바닥에서 얼굴 들고 살지는 못하게 할 거니까 기대하고 있어. 곧 경찰에서 연락이 갈 거니까 피고인으로 조사받을 준비도 하고.”

지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수많은 플래시가 터졌다.

이내 돌아선 지훈은 엄지 척을 하며 서 있던 상진과 함께 유유히 포럼장을 떠났다.

* * *

해인은 지훈이 형준을 만나러 가기 전, 그를 역표절과 음성법 위반으로 고소했다. 한 차장의 증언 파일과 핸드폰을 증거물로 제출했고 변호인단은 신온을 담당하는 법무법인이 맡았다.

대중적인 이슈는 아니었지만, 동종 업계에 관련된 사람들은 깊은 관심을 보였고 저마다 갑론을박을 이어갔다.

증거가 있었기에 안형준이 궁지에 몰렸으나 그렇다고 죄를 인정하지는 않았다.

고소장이 날아가던 순간의 굴욕적인 사진이 공개되며 두문불출하게 되었고, 이후 그를 봤다는 사람은 없었다.

지훈과 해인의 재결합이라는 또 한 가지 이슈와 함께 신온의 주가는 계속 상승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바로 다음 날 한강의 주가가 하락하는 일도 발생했다.

처음엔 안성모직도 변호인단을 꾸렸고 적극적으로 대응한다며 공세를 퍼부었다.

하지만 부친인 안 사장 쪽에서는 주 사장에게 은밀한 접촉을 시도했고 적당한 선에서 소송을 무마시키기 위한 로비를 펼치기 시작했다.

물론 해인은 그 모든 접촉을 거부했고 예정대로 법적 싸움을 이어갈 작정이었다.

그렇게 회사 내의 해인의 평판은 나날이 좋아졌고 회사의 인지도도 다시 상승기류를 타기 시작했다.

평화롭던 하루하루가 이어지며 어느덧 계절은 겨울이 되었다.

어둑해진 거리에 간혹 진눈깨비가 날리는 흐린 날씨였다.

잿빛 코트를 입은 지훈의 손에 상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바쁜 손놀림으로 차 문을 열고 상자를 조수석에 내려놓고는 서둘러 시동을 켰다.

핸들을 잡자마자 벨 소리가 울렸다. 블루투스로 전화를 받은 지훈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귓가로 들려오는 해인의 목소리가 너무 사랑스러운 탓이었다.


-오고 있어요?

“벌써 보고 싶은 거야?”

-대답이나 해요.

“금방 도착할 거야.”

-지금 어딘데요?

“거의 집에 도착했어. 아이스크림 케이크 사느라 시간이 좀 지체됐네.”

-아이스크림 케이크요?

“응. 신호대기 중이었는데 아이스크림 가게가 보여서 샀어. 하 비서가 겨울에 아이스크림 먹으면 더 맛있다고 했거든. 저번에 보니까 아이스크림 맛있게 먹던데.”

-알았어요. 얼른 와요.

전화를 끊은 지훈이 천천히 액셀을 밟았다. 해인과 같이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먹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들떴다.

해인이 한 입, 나 한 입.

그렇게 먹고 먹여 주며 오늘 하루도 즐겁게.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벌렁거리는 탓에 지훈은 운전을 하면서도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이 좋은 것을 왜 모르고 살았을까.

이제라도 알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온 지훈이 주차를 한 후 가방과 케이크 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기 위해 앞쪽으로 나올 때였다.

뒤따라 오던 검은색 세단이 갑자기 속도를 높이며 달려왔다.

뭔가 이상했지만 설마 싶어 멍하니 보는데 세단이 더 속도를 높이는 것이 아닌가.

지훈은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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