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 명백한 고의. (74/92)


74. 명백한 고의.
2022.08.14.


마지막 순간 속도를 줄인 검은색 세단은 지훈의 다리 쪽을 들이받고 아무런 구호 조치도 없이 그대로 사라졌다.

케이크 상자는 바닥에 처박혔고 가방도 차 바퀴에 짓이겨졌다. 세단이 사라진 쪽을 노려보던 지훈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이건 명백한 고의였다.

누구일까.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의 통증으로 인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차에 치이며 기둥에 머리를 박은 탓에 머리에도 통증이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며 안정을 취한 지훈이 슈트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 * *

지훈을 기다리던 해인은 애란으로부터 사고 소식을 전해 들었다.

케이크를 사서 오고 있다는 연락을 받은 후, 다시 급한 일이 생겼다며 좀 늦을 거라는 전화를 받았었는데 느닷없이 사고라니.

병원으로 가는 내내 가슴이 조이고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작은 사고이며 다친 곳도 없다고 들었지만 그래도 사고는 사고였다.

병원에 도착한 해인은 곧장 VIP 병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침대에 누운 지훈의 모습이 보였다.

잠이 든 것인지 그는 눈을 감고 있었고 애란이 의자에 앉아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근심의 표정이 없었음에도 심장은 덜컥 내려앉았다. 해인이 애란을 향해 인사를 하고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겉으로 보는 지훈의 모습은 괜찮아 보였다. 다행이었다.

들은 대로 큰 사고는 아닌 듯했다. 정말 큰 사고였으면 지금쯤 어딘가 들어가서 검사를 받거나 응급 수술을 하고 있겠지.

자세히 보니 이마 위쪽으로 반창고가 붙여진 정도라고나 할까.

그래. 괜찮다. 저 정도 상처 즈음은.

해인은 그렇게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떡하니. 아가. 네 남편, 다리를 못 쓰게 됐단다. 평생 걸을 수가 없다는구나.”

“예?”

하지만 들려오는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이건 갑자기 무슨 소리일까.


“다리를 다쳤는데, 앞으로 다시는 두 발로 걸을 수 없다고 의사가…….”

아들이 평생 걸을 수 없다는 말을 하는 애란의 표정에는 어떤 동요도 없었다.

심지어 곧 웃음이 터질 사람처럼 애써 참고 있는 듯했다.


“수술도 불가능할 만큼 다리 상태가 안 좋아서 아예 포기했어. 힘들지만 어쩌겠니. 그래도 해인이 너라면 우리 지훈이 평생 책임져 줄 거지?”

세계 최고의 의료기술을 자랑하는 우리나라에서 수술도 안 하고 다리를 포기한다고?

그리고 제대로 된 진료도 해 보지 않고 다리를 포기하는 게 말이 돼? 명색이 재벌 집인데. 의사들이 서로 찾아와서 내가 한번 고쳐보겠다고 해도 시원찮을 판에.

해인이 뭔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미동도 없이 꼭 감고 있는 눈을 바라본 그 순간 지훈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확실치는 않지만 은밀한 뭔가가 있는 건 분명했다. 조금도 심각해 보이지 않는 시어머니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해인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이 상황에 가장 합당할 것 같은 말을 꺼냈다.


“저, 죄송합니다. 제가 지훈 씨 사랑하기는 하지만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무슨 말이니?”

“어쩌면 제 사랑이 부족할지 모르겠어요. 나름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그러니까 불구의 몸을 평생 책임져 줄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전 박애주의자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지훈이를 버리기라도 하겠다는 거니?”

애란의 입가로 묘한 웃음이 감돌았다. 기꺼워하는 듯한 그 표정을 보며 해인은 더욱 시어머니의 기대에 부합해야 함을 느낄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애란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한 해인이 지훈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병실을 나왔다.

마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는 한 간호사를 따라 얼른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급한 마음에 그냥 왔는데 밤새 있으려면 편의점에서 간식거리라도 사 와야 할 것 같았다.


“VIP 병실에 남자 환자 한 명 들어왔는데 엄청 잘생긴 거 있지.”

마침 해인과 함께 들어온 간호사가 먼저 타고 있던 간호사에게 하는 말이었다.

VIP 병실이라면 혹시 지훈인가?

해인은 바닥만 내려다보며 두 사람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잘생겼어? 근데 어디가 아파서 왔는데?”

“차에 치였다던데 많이 다친 건 아니고 다리에 살짝 금 갔다더라고. 와! 근데 얼굴이 무슨 영화배우 같이 잘생겼어. 몸도 엄청 좋고.”

“진짜 VIP가 맞네. 근데 다리에 금 간 거로 입원했어? 그럼 금방 퇴원하겠네?”

“사고 날 때 기둥에 머리도 박았다더라고. 이마 윗부분이 살짝 찢어졌는데 혹시 몰라서 뇌 MRI 찍기로 했나 봐. 자세한 건 말 안 하는데 재벌 집 아들이래. 와이프도 있다던데?”

“그랬구나. 그런 남자의 와이프로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가끔 어이없을 때가 있답니다.

한쪽 구석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해인이 픽 웃었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먼저 내리는 간호사들의 뒤를 따라 내리는데 가방에서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려왔다.

액정을 보니 역시나 지훈이었다.

정황상 아까 한 대답만으로도 시어머니의 승리로 끝날 가능성이 컸으니 제 할 일은 거기까지였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그런 장난을 치면 되겠냐고.

시어머니는 몰라도 지훈은 혼 좀 내야겠다 싶어 전화를 받지 않고 그대로 편의점으로 향했다.

지훈이 사 온다던 아이스크림 케이크는 어떻게 됐을까. 대신 아이스크림이나 함께 먹을까.

편의점을 둘러보며 작은 바구니 안에 이것저것을 담아 넣었다. 우유와 샌드위치와 샐러드 등등 배를 채울 수 있는 것과 콜라를 고른 후 마지막으로 겨울에 즐겨 먹었던 아이스크림을 골라 담았다.

막상 냉정하게 내려왔으면서도 해인은 마음이 급했다.

다리에 금이 갔으면 어쨌든 많이 아플 것이다. 이마 위쪽도 찢어졌다는데 혹시 그 고운 얼굴에 흉지는 건 아니겠지.

대충 먹을 것을 산 해인이 서둘러 다시 병실로 향했다.

* * *

해인이 도착하기 얼마 전.


“치료받고 바로 집으로 갈 건데 해인이에겐 왜 전화하셨어요.”

“네가 그럴 것 같아서 연락했다. 그래도 차 사고인데 입원해서 경과를 지켜봐야 하지 않겠니? 검사도 더 하고.”

“많이 다친 건 아니라고 하셨죠?”

사고를 당한 후 해인에게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다시 회사로 가 봐야겠다고만 했었다. 혹시나 현장을 보게 된 해인이 놀랄 것 같아서였다.

대충 치료만 받고 서둘러 집으로 가면 될 일이었는데 하 비서가 모친에게까지 연락을 해서 또 일이 커져 버렸다.

입원까지 한다고 하면 해인이 더 걱정할 텐데…….


“놀라지 않게 잘 말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하 비서의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온 애란은 적잖이 놀랐었다.

그나마 다행히 많이 다친 곳은 없어서 한시름을 놓았다. 그런데 하 비서에게 들으니 지훈이 응급치료만 받고 집으로 간다고 했다는 것이다.

일단 병실을 잡고 해인에게도 연락을 했다. 처음엔 놀라겠지만 그래도 해인이 있어야 지훈이 퇴원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만 들어가 보세요.”

“해인이 온다고 이제 나는 가라는 거니?”

“그게 아니라…….”

“아니면?”

“사실은 어머니께도 연락 안 하려고 했는데…….”

“그래. 넌 안 하려고 했는데 하 비서가 전화해서 알았지. 네가 사고 났다는 사실을. 근데 하 비서가 옳다는 생각은 안 하니? 너한테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나나 해인이가 가장 먼저 알아야지.”

맞는 말인데 그게 어머니 입에서 나오니 조금 어색했다.

지훈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시선을 피했다. 늘 잔정 없는 어머니라 생각했기에 이런 상황이 불편했다.


“왜? 인정머리 없는 엄마가 뭔 걱정인가 싶어서?”

“아, 네, 뭐…….”

“아, 네, 뭐?”

“…….”

“저런 인정머리 없는 놈 같으니라고. 너야말로 다행인 줄 알아.”

“무슨 말씀이세요?”

“너희 아직 서류 정리 다시 안 한 거로 아는데, 혹시나 사고 나서 크게 다쳤으면 해인이가 뭐, 네 옆에 남아 줄 것 같아? 해인이 아직 젊고 예쁜데 누워 있는 너한테 젊음을 다 바치기엔 너무 아깝잖아. 내가 미안해서라도 그렇게는 못 하지.”

“못 하면요?”

“가서 제 인생 살라고 해야지. 그게 양심적인 거 아냐?”

“양심적이긴 한데, 그래도 우리 해인이는 절대 저 못 떠납니다. 해인이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사랑 같은 소리 한다. 그것도 네 몸이 건강할 때 하는 말이지. 늙고 병든 거랑, 젊을 때 병든 거랑 같은 줄 알아?”

“우리 해인이는 어머니하고 다릅니다.”

“퍽이나 그럴까.”

“정말이라니까요. 어머니는 아버지 버리셨을지 몰라도 우리 해인이는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어.”

“있습니다.”

“시험해 볼까?”

일의 발단은 이랬다.

애란의 도발에 지훈이 홀라당 넘어가 버리고 만 것이었다.

물론 지훈은 자신감이 넘쳐 흘렀고 해인이 마음 아파할 그 순간 빛의 속도로 일어나 꼭 안아 줄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 빛의 속도로 해인이 도망을 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도 자신은 박애주의자가 아니라는 명료한 의사를 밝힌 채 말이다.

해인이 나가는 모습을 본 애란이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어디서 저렇게 눈치 빠르고 똑똑한 며느리가 굴러들어왔을까. 정말 금 거북이가 아깝지 않은 며느리였다.

놀란 지훈이 급히 전화를 해 보았지만, 해인은 전화도 받지 않았다.

지훈이 원망의 눈빛으로 애란을 바라보았다.


“이게 다 어머니 때문입니다.”

“자신 있다더니 이제 와서 내 탓이니?”

“진짜 어머니는 저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내가 뭘. 나는 그냥 네가 인생이 얼마나 험한지 알았으면 해서 한 것뿐이야. 이제 꿈에서 좀 깨어났니?”

“꿈꾼 적 없습니다.”

“버림받은 기분은 어때? 생각보다 더 비참한 거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짜증스럽게 내뱉은 지훈이 이불을 걷어냈다.

곧장 침대 아래로 내려오는데 하필이면 습관대로 하다 다친 오른발을 먼저 짚고 말았다.

깁스를 했으니 조심해야 하는데 급한 마음에 생각 없이 발을 내디디고 말았다.


“으윽.”

“그러다 뼈까지 부러지고 싶니? 가만 누워서 기다려 봐.”

“……예?”

“기다려 보라고. 네 말대로 해인이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그거야 그렇죠.”

모친의 말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아직 목발이 도착하지 않아 발을 끌 듯 절뚝거리며 문까지 걸었다.

그러고는 목을 내밀고 좌우 복도를 살펴보았다.

혹시나 했던 해인은 역시나 가고 없었다.


“아주 가 버렸니? 정말 널 버리려나 보다.”

“아주 즐거워 보이십니다.”

“당연하지.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나와는 다르다며 큰소리치더니 꼴좋구나.”

그동안 얄미웠던 아들에게 모처럼 패배를 안겨 준 애란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웃음이 아들의 가슴팍을 바늘처럼 콕콕 찔러댔다. 지훈은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겨우 침대로 다시 돌아와 앉았다.


“어머니는 이제 들어가세요.”

“알았으니까 재촉하지 마.”

아들이 괜찮은 것도 보았고 며느리의 영특함도 만족스럽고. 이쯤이면 되었다 싶은 애란이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찰나였다.

지훈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혹시나 해인인가 싶어 재빨리 액정을 확인했지만 하 비서였다.

지훈이 힘없이 전화를 받았다.


-그래. 알아봤어?

-CCTV 확인 결과 차는 일단 도난 차량으로 나옵니다. 운전자는 남자인 것 같은데 정확히 얼굴은 나오지 않았고요.

“도난 차량이면…….”

-범죄라는 말이죠. 고의로 형님을 노리고.

지훈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해인이 이 사실을 알면 놀랄 텐데…….


“더 조사해 봐야겠네.”

-그 근처 CCTV 다 수거해서 추적하면 조만간 나올 겁니다. 그 차량이 어디로 갔는지, 범인이 누구인지. 그러니 걱정 마시고 몸조리나 잘하세요.

“알았어.”

지훈이 전화를 끊자 애란이 다시 의자에 앉았다.

짐짓 놀랐으나 애란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게 덤덤히 말했다.


“그냥 뺑소니가 아니었니?”

“아직은 잘 모릅니다.”

“조사해 본다는 게 혹시…….”

“아직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걱정 마시고 들어가세요. 아버지께는 알리지 마시고.”

애란은 걱정스럽게 지훈을 바라보았다. 그냥 뺑소니가 아니라면 아들이 많이 위험했다는 뜻이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누가 그런 짓을 벌였는지 범인을 꼭 잡아야 했다. 내내 여유를 부리더니 정작 중요한 일은 감추는 아들의 모습에 애란은 혀를 내둘렀다.

걱정하지 않게 해 주려는 마음은 고맙지만 그래도 이렇게 중요한 일을 모르게 하는 것이 말이 되나 싶다.

명색이 부모인데…….

그게 좀 서운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는 혼란스러운 그 순간 문이 열리고 해인이 다시 들어왔다.

한 손에 먹을 것이 잔뜩 들어 있는 비닐봉지를 들고서.

애란은 속으로 역시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도 시큰둥하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간 거 아니었어?”

“아, 그러려고 했는데 지훈 씨 인생이 불쌍해서 다시 왔습니다.”

“그래서, 거둬 주게?”

“아뇨. 그건 좀 힘들 것 같아요. 그래도 이별주는 마셔야 할 것 같아서…….”

해인이 손에 들고 있는 하얀 비닐봉지를 흔들었다.

픽 웃은 애란이 미련 없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래. 그럼 난 가 보마. 둘이 이별주 잘 마셔라.”

그렇게 애란이 문 너머로 사라지자마자 지훈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무해.”

“뭐가요?”

“아무리 그렇다고 그냥 가냐.”

“박애 정신 넘치는 여자 만나서 잘 사시라고.”

툭 쏘아붙인 해인이 비닐봉지를 들고 소파로 가서 앉았다.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지 않은 건 괜스레 얄미워서였다.

아무리 그렇다고 그런 장난을 치는 건 안 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지금 너무한 건 자신이 아니라 바로 지훈이었다.

근데 뭘 잘했다고 저러는지…….


“진심이야?”

“네.”

“진짜 불구가 됐으면 큰일 났겠네.”

“가짜여도 큰일 난 것 같은데…….”

해인이 짐짓 화난 표정을 지으며 빤히 지훈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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