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난 꼬리를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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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난 꼬리를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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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난 꼬리를 좋아해.
2022.08.18.
지훈은 그제야 해인이 화가 난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니의 꼬임에 넘어가 하지 말아야 할 거짓 연기를 했으니 사실 할 말이 없었다. 순간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라고 변명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이상하게도 해인의 앞에만 서면 그냥 죄인이 되어 버렸다. 그나마 병원에 총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병원 앞에서 문구점을 봤어요.”
“어?”
“문구점에서 비비탄 총을 팔던데, 아! 아니다. 집에 가서 금 거북이라도 들고 올까요?”
“봉지에 든 거 뭐야? 혹시 맥주도 사 왔어?”
지훈은 부러 딴소리를 하며 침대 위에서 내려왔다.
많이 아픈 척 다리를 절며 낑낑거리듯 소파 옆으로 다가갔다.
“아! 다리가 왜 이렇게 아프지? 뼈가 부러지면 이렇게 아프구나.”
“부러진 건 아니고 살짝 금만 갔다던데…….”
아프다고 하면 혹시나 부드러워질까 싶었는데 어림도 없었다.
“그랬나? 아! 그랬구나. 근데 금 갔어도 왜 이렇게 아프지?”
“진통제 안 맞았어요?”
“아까 맞기는 했지.”
“그럼 괜찮을 텐데…….”
“그래. 이제 괜찮은 것 같아.”
도저히 말로는 안 되겠다. 지훈은 빠른 포기로 현실을 인정했다.
진통제를 맞았어도 미약한 통증은 남아 있었다. 물론 그것을 아프다고 표현할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냥 있기는 민망해서 비닐봉지에 든 것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샌드위치 사 왔네? 마침 배고팠는데 어떻게 알고.”
“내가 먹을 거예요.”
“어? 우유랑 과자도 있다.”
“그것도 나 혼자 먹을 건데…….”
“어? 이건 아이스크림?”
봉지를 뒤적이던 지훈이 붕어가 그려져 있는 아이스크림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 보니 119에 타기 전에 부서진 케이크 상자를 하 비서에게 넘겼었다. 그 아이스크림은 어떻게 됐으려나.
“이건 나랑 같이 먹으려고 산 거지?”
아이처럼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해인을 향했다. 이 붕어 아이스크림이 제 아이스크림 케이크 대신이라는 것을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천진한 눈망울도 오래가지 못했다.
레이저빔처럼 날아온 해인의 매서운 눈빛에 지훈은 제풀에 고개를 숙였다. 기어코 반성의 시간이 찾아 왔다.
“잘못했어.”
“또 그럴 거예요?”
“다신 안 그럴게.”
“누가 먼저…….”
“어머니가.”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러다 내가 정말 놀라서 기절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전혀 안 놀란 것 같던데? 사람 서운……하게.”
마치 모든 것을 꿰뚫는 사람처럼 얼마나 태연한 그녀였던가. 놀란 것으로 치자면 바로 저였었다.
혹시나 진짜 가 버린 줄 알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서운하고 놀라고 당황스러웠던 이 마음을 우리 해인이가 알기나 할까.
“미안하다는 사람의 태도가 진심이라곤 하나도 없어.”
“미안. 진심으로 미안.”
하지만 그 생각도 곧바로 반성했다.
어쨌든 잘못한 것은 저였으니까. 공손히 무릎에 두 손을 모으고 눈은 내리깔고 입은 꾹 다물고 다음 처분을 기다렸다.
“난 머리가 좋아요. 지훈 씨는요?”
“어?”
“난 머리가 좋은데 지훈 씨는 어디가 좋냐고요.”
머리? 갑자기 무슨 머리?
지훈은 이 심각한 상황에 나온 질문을 깊이 심사숙고했다. 심오한 뜻이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집안의 머리이니 앞으로 말 잘 듣고 똑바로 살아라, 이런 말인가.
현명하게 대처해야겠다.
“그럼 난 꼬리. 난 꼬리가 좋아.”
지은 죄가 여러모로 크니 평생 강아지처럼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어가며 충성을 다할 것이다.
“그래요? 다행이다.”
“그럼. 앞으로 잘할게.”
“네? 뭘요?”
“뭐를? 그러니까 뭐든 머리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겠다고.”
“으음? 아! 좋은 자세네요.”
고개를 갸웃하던 해인의 얼굴에 이내 웃음이 피어올랐다. 다행이다 싶은 그 순간 지훈의 눈앞으로 붕어가 그려진 아이스크림이 훅 들어왔다.
비닐 뜯어달란 말인가. 당연히 그런 건 꼬리가 해야지.
지훈은 두 손으로 공손히 아이스크림을 받아 정성을 다해 아이스크림 비닐을 벗겨냈다. 아주 잠깐 환자라며 대접받고 싶은 마음이 살짝 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비닐을 벗겨내니 붕어 모양의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하나 더 없나. 왜 하나만 사 왔지, 생각하는 그 순간 해인이 아이스크림을 가져가서 반으로 나눴다.
아! 나눠 먹으려는구나. 지훈은 또 두 손으로 해인이 주는 반쪽을 받았다.
꼬리였다. 안에는 단팥도 들어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먹어본 적이 없지만 어릴 때 먹어본 기억은 있었다.
아! 잠깐, 근데 꼬리? 지훈이 두 눈을 크게 뜨고 해인이 들고 있는 반쪽을 바라보았다.
머리였다. 설마 그 머리인가 싶어 해인을 보는데 그 머리가 해인의 입으로 쏘옥 들어갔다. 요염한 표정을 지으며 맛있게도 냠냠 먹는 모습이 마치 뭔가를 즐기는 듯했다.
“나는 항상 머리가 더 맛있더라. 역시 난 머리가 더 좋아.”
그래. 그런 거였어. 요즘 들어 제 무덤을 많이 파서 딱히 민망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붕어에게까지 기만당할 줄이야.
어차피 머리든 꼬리든 입으로 들어가는 거야 똑같지 않은가. 아무거나 먹으면 그만이었다.
“난 꼬리를 좋아해. 어렸을 때도 그랬던 것 같아.”
기억에도 없지만, 꼭 그래야 했다. 지훈은 고기라도 씹듯이 붕어 아이스크림을 거칠게 깨물어 먹었다.
귓가로 해인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허파에 바람이 드는 체질인가 보다.
지훈은 아직 붕어에게 화가 덜 풀렸다. 오늘 만난 모든 것 중에 그래도 가장 만만한 상대라 생각하니 화가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지훈은 무지막지하게 붕어를 씹어 삼켰다. 붕어 한 마리가 순식간에 두 사람의 입으로 사라졌다.
“붕어가 맛이 별로야.”
지훈은 끝까지 붕어에게 남은 감정을 쏟아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해인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잠시 후 티슈로 입을 닦은 해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어머님께 대충 듣기는 했는데 이해가 좀 안 되는 게 있어요. 주차장에서 사고를 냈으면 아파트 사람일 건데, 그냥 갔다는 게 좀 이상해요. CCTV도 다 있는데, 뻔히 잡힐 거잖아요.”
“그게…….”
지훈은 잠깐 말을 멈추고 해인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놀라고 걱정할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감출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아파트 주민이 아닌 것 같아.”
“그럼요?”
“조사를 해 봐야 알겠는데, 고의로 그런 것 같아.”
“네에?”
고의라는 말을 듣자마자 해인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런 생각을 전혀 안 한 것은 아니었다.
최근 들어 안 좋은 일에 얽혔기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나쁜 짓을 벌인 당사자가 오히려 원한까지 가진 건가 싶어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설마, 안형준 그놈이…….”
“지금으로선 가장 유력하지. 근데 일단 모르는 거니까.”
“만약 그놈이면 이번엔 감옥에 처넣을 수 있나요?”
달려오는 차를 제대로 피하지 못했다면 더 큰 사고가 났을 것이다.
놀란 가슴이 불안정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건 일단 사실 확인을 좀 더 해 봐야 알 수 있겠지. 너무 흥분하지는 마. 건강에 해로우니까.”
안심하라는 듯 해인을 끌어안는 지훈의 두 팔에 단단한 힘이 실렸다.
이러니까 더 불안하네.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해인은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내려 마음을 다잡았다.
“나 놀라는 거 안 좋아해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아까 같은 장난은 치지 말아요.”
“알았어. 다시는 안 그럴게.”
“입장 바꿔서 지훈 씨는 내가 불구가 됐다고 하면 기분이 어땠을 것 같아요? 책임은 둘째치고 가슴이 미어지겠죠?”
“당연히 그렇지. 그런 일은 없어야지.”
“그래요. 우리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지훈의 품에서 빠져나온 해인이 지그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 새삼 이마의 하얀 붕대가 더 잘 보였다. 짱구 같은 그 모습에 픽 웃음이 터졌다.
“이마는 괜찮아요? 열 바늘 정도 꿰맸다던데 흉터 남으면 어떡해요?”
“괜찮을 거야. 남아도 상관없고. 어차피 흉터가 있다고 해서 해인이가 내 얼굴을 싫어할 리는 없잖아.”
“그건, 그렇죠.”
“그래. 그건 그렇고 우리 빨리 서류 정리 다시 하자.”
“왜요?”
“그래야 해인이가 도망 못 가지.”
“나 도망갈 생각 없는데?”
“그래도 빨리하자.”
“그래요. 그럼.”
“그래. 고마워, 그리고 사실은 나 지금 몸이 엄청 뜨거워.”
“갑자기요? 진짜 미쳤나 봐.”
“그러니까.”
해인이 몸을 소파 뒤쪽으로 당기며 지훈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생각해 보니 뜨거운 이유가 있었다. 사실은 저도 지금 몸에서 땀이 날 지경이었다.
병실 온도가 너무 높은데 아직 코트도 벗지 않고 있어서 몸에 열이 나는 것 같았다.
해인은 얼른 코트를 벗어서 옆에 놓았다. 무슨 상상을 했는지 그것을 본 지훈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근데 이 남자는 달랑 환자복 하나 입었으면서 몸이 왜 뜨거워?
“저기요. 김칫국 마시지 말고 더우면 문 열고 환기 좀 시키죠?”
“안 더운데?”
“뜨겁다면서요.”
“그래. 난 뜨거울 뿐이야. 더운 거하고는 아주 다른 현상이지.”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한마디로 일축한 해인이 비닐봉지를 뒤졌다. 손이 봉지의 가장 안쪽에 있는 바나나 우유를 집어 나올 때였다.
어느새 잡힌 손목이 지훈의 옆구리에 안착하더니 입술이 뜨거워졌다.
“우읍.”
이 남자가 미쳤나 봐, 진짜. 간호사가 언제 올지 알고.
생각은 그랬지만 그렇다고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 입술에서 멀어지지는 못했다.
병원 소파에 앉아 이러고 있으니 뭔가 색다르다고나 할까. 몰래 먹는 떡이 맛있다고 키스도 몰래 하니 살짝 스릴이 있었다.
입술이 깊게 맞물리고 서로의 몸에 닿는 손길도 은근히 야해져 갔다.
여기서 이러면 안 되는데……. 알면서도 정신을 차리기는 힘들었다.
해인이 피하지 않으니 지훈은 브레이크 기능을 점점 상실해갔다.
급기야 손이 어딘가를 걷고 들어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해인이 지훈의 못된 손을 찰싹 때리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키스만 해도 좋은데, 지훈 씨는 왜 꼭 뭘 더 해야 해요?”
“그냥 나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여긴 병원이니까 적당히 해야죠.”
“적당히 하는 게 그건데.”
“네, 네. 그렇겠죠.”
“화났어?”
“…….”
“키스 더 못해서?”
능글맞은 질문을 받은 해인이 두 눈썹을 꿈틀거리며 그를 째려보았다. 지훈이 뭐가 문제냐는 듯 히죽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입술을 부딪쳐왔다. 이번엔 두 손을 곱게 해인의 허리에 휘감는다.
덕분에 다시 시작된 키스는 이전보다 훨씬 길게 이어졌다.
더워서 안 되겠다 싶을 정도로 병실 열기가 뜨거워질 때 즈음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너무 즐겼나. 민망해진 해인이 괜스레 투정을 부렸다.
“완벽한 남자치고는 병원 입원을 너무 자주 하죠?”
“병실에서 스릴 있게 하고 싶었나 보지.”
결국, 가슴을 한 대 얻어맞은 지훈이 비로소 해인에게서 멀어졌다.
“지오는 그 후 연락이 없네?”
“아! 맞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지훈과 같이 만나자고 했을 때 그는 큰 망설임 없이 그러자고 했었다.
하지만 그 후로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지오는 어떤 연락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그렇게 자주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었기에 어찌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나랑 같이 만나자니까 싫은 건가?”
“그럴지도 모르죠.”
“잘됐네. 연락이 안 오면 좋겠다.”
“그래요. 알아서 잘 살겠죠.”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해인은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빚진 사람처럼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지만 지금 상황에서 딱히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지오 스스로 우울증을 극복해내지 않으면 그 누구의 도움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것저것 많이 사 왔네?”
비닐봉지를 뒤적거리던 지훈이 아까 해인이 집었던 바나나 우유를 꺼냈다. 빨대를 가져오지 않아 위쪽을 오픈해서 먹어야 했다.
그런데 지훈이 힘을 너무 많이 주는 바람에 우유가 지훈의 상의로 튀어 버렸다.
지훈은 괜찮다 했지만 젖어서 고소한 냄새까지 풍기는 환자복을 그대로 입고 있게 할 수는 없었다.
일단 환자복을 벗겨서 옷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세탁실로 가면 환자복을 새로 주는 것 같던데…….
해인이 복도를 따라 몇 걸음을 걸었다.
그때였다. 반대쪽의 VIP 병실에서 누군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VIP 병실은 층에 두 개뿐인데, 저쪽도 환자가 있는 모양이었다.
베이지 코트를 입고 목도리로 얼굴의 반을 가린 여자는 어딘가 익숙했다. 그렇다고 아는 사람일 리가 없어 그냥 가려는데 그쪽에서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어머. 이게 누구야?”
“…….”
“해인 씨가 여긴 웬일이에요?”
반갑지 않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수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