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그 여자 포기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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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그 여자 포기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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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그 여자 포기한 거야?
2022.08.21.
원수는 아니지만 만날 때마다 외나무다리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이곳은 VIP 전용 키나 신분 확인을 거쳐서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다. 아는 사람이 입원이라도 했나.
해인이 아무 말도 없이 바라보자 수빈의 시선이 해인이 들고 있는 환자복으로 향했다.
“해인 씨가 여기 왜 있어요? 혹시 지훈 오빠가 아픈가요?”
넘겨짚는 것도 잘하네. 오빠, 라고 부르는 입술이 묘하게 얄미웠다.
어머님께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오빠 소리가 나오나 보다. 대답도 하기 싫고 말도 섞기 싫어서 부러 다른 말을 했다.
“사적인 일이에요. 가시는 길인 것 같은데, 그럼 안녕히.”
그렇게 수빈을 지나쳐 가려 할 때, 마침 간호사 한 명이 다가왔다.
간호사의 시선이 해인이 들고 있는 환자복으로 향했다.
“뭐가 필요하신가요?”
“환자복이 젖어서…….”
“이리 오세요. VIP 병동은 간호사실에서 직접 관리합니다. 콜 하셨으면 가져다드렸을 텐데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몰라서 그런 건데요.”
간호사를 따라가 환자복을 새로 받아 복도로 나왔을 때 수빈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갔으려니 생각하고 병실로 향하는데 문 너머로 호들갑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어디 아파? 어디가 아파서 입원까지 했어?”
“알 것 없으니까 신경 꺼. 근데 네가 왜 갑자기 나타나냐?”
“친구가 아파서 입원했거든. 오빠는 모르나? 세진 그룹 막내딸. 아무튼, 그래서 잠깐 다녀가는데 이 앞에서 해인 씨를 만났어. 그래서 얼른 와봤지. 근데 다리 깁스했네? 다리 다쳤어?”
“신경 끄고, 너 가던 길이나 가.”
지훈의 말이 끝나자마자 해인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허락도 없이 대뜸 남의 병실 문부터 열어젖히는 수빈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불쾌해진 해인이 환자복을 들고 지훈에게로 향했다. 제 코트로 상체를 가리고 있는 그는 여러모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옷 입어요.”
일단 가져온 환자복을 지훈에게 건네주며 그가 옷 입는 모습을 차분히 지켜보았다. 단추까지 꼼꼼히 채우는 것을 확인한 해인이 비로소 돌아섰다.
그런데 수빈이 거북이처럼 고개를 쭈욱 내밀며 지훈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와! 오빠, 어깨 진짜 짱이다. 벗은 몸 처음 보는 것 같아.”
감탄이 섞인 수빈의 목소리에 해인의 미간이 구겨졌다.
남의 남자 벗은 몸을 저렇게 대놓고 좋아해도 되는 건가.
“이봐요. 남의 병실을 허락도 없이 이렇게 들어오면 어쩌자는 거예요?”
“남이라뇨? 지훈 오빠와 내가 얼마나 가까운 사인데…….”
“아니야. 해인아! 그냥 말 섞지 말고 당장 쫓아내.”
해인의 등 뒤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자 하니 상대하기조차 싫은 것 같았다. 이쯤 되면 수빈도 제 처지를 깨달아야 할 텐데 얼굴을 보니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해인이 한심하다는 듯 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쫓아내라는데요?”
“칫. 너무해.”
“실례라는 생각이 아직도 없나 봐요?”
“내가 뭘요?”
“허락도 없이 함부로 들어왔고, 가라고 하는데도 아직 버티고 있는 거.”
“충분히 그럴 만한 사이거든요? 해인 씨가 앞에 있으니까 오빠가 예민하게 구는 거예요. 우리끼리 있으면 안 그래요.”
“우리끼리?”
뇌가 비어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이 여자는 정말 머리가 비었나 싶을 정도로 개념이 없었다.
해인이 한심하게 수빈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자신이 하는 말에 전혀 문제의식이 없어 보였다.
“뭐, 문제 있나요?”
“있는데 당사자가 모르니 소귀에 경을 읽을 수도 없는 노릇이네요. 환자가 거부하고 있어요. 그만 나가 주세요.”
“거부가 아니라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데요?”
수빈의 얼굴에 또다시 미묘한 웃음이 흐르고 있었다. 저 정도면 정신승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싶어 한마디 해 주려던 찰나였다. 뒤에서 발소리가 나더니 어느새 손이 잡히고 말았다. 이미 곁으로 다가온 지훈이 제 손을 잡고 옆으로 비켜 세웠다.
차갑게 굳은 얼굴에 매서운 눈동자.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정면에 있는 수빈이었다.
“부모님끼리도 서로 알고, 수혁이 동생이라고 예의를 갖춰 대해 줬더니 이제 아주 막 나가네?”
지훈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낮고 싸늘했다. 듣고 있는 해인조차도 일순 소름이 돋을 만큼.
수빈 역시나 가슴이 서늘해졌지만,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지훈에게 귀여운 동생일 것이라 믿었다.
“오빠까지 왜 그래? 그냥 부끄러워하는 게 귀여워서 한 말이야.”
“부끄러운 게 아니라 짜증이겠지. 하아. 이렇게까지 천박할 줄은 미처 몰랐다.”
“뭐? 천박? 우리 사이에 꼭 그렇게 심하게 말해야겠어?”
자존심이 상한 수빈의 낯빛도 점점 굳어졌다. 주해인 저 여자와 같이 있는 지훈은 말 그대로 남의 남자에 지나지 않았다.
애란은 그렇다 치더라도 지훈까지 자신을 이렇게 대할지는 상상도 못 했다. 그동안 알고 지냈던 정도 있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럴 수가 있을까.
“우리 사이? 빌어먹을. 너, 어머니가 조용히 있으라고 했다며.”
“그 일을 들었어?”
수빈이 미간을 찡그리며 해인을 곁눈질했다. 그 일을 시시콜콜 다 일러바친 모양이었다.
“입이 참 가볍네요. 여자끼리 있었던 일인데…….”
힐난하듯 내뱉은 그때였다. 지훈이 한 손으로 수빈의 코트 깃을 잡아끌었다.
순식간에 지훈의 코앞까지 끌려온 수빈의 눈동자에 당황의 빛이 역력했다.
“왜, 왜 이래? 오빠?”
“오빠? 누가 네 오빠야. 내가 안 보이는 데서는 늘 이랬었구나. 안하무인에 버릇없고 개념 없고 함부로 말하고. 네가 이뻐서 봐준 적 단 한 번도 없어. 늘 거북스럽게 웃는 것도 싫었고.”
“어떻게 그런 말을…….”
“말을 안 하니까 모르는 것 같아서 해 주는 말이야. 그나마 수혁이 때문에 참고 있었는데 이젠 그나마도 못 하겠다. 역겨워서.”
지훈이 수빈의 코트 깃을 잡은 채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다리를 살짝 절룩이기는 했지만 수빈을 병실 바깥으로 이끄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지훈은 수빈을 문 너머로 팽개치듯 내보내고 재빨리 문을 닫아 버렸다.
수빈은 맞은편 벽에 팔을 짚고서야 겨우 제 몸을 지탱해 냈다. 충격을 머금은 두 눈동자가 거침없이 흔들렸다.
지훈은 그동안 달라붙는 저를 귀찮아하기는 했지만 크게 다그친 적은 없었다.
정색을 하면서도 귀여운 동생을 바라보듯 빠져나가는 게 다였었는데, 그게 오빠인 수혁의 얼굴을 봐서 참은 것이었다니. 밀려오는 모멸감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윤지훈, 네가 뭔데. 주해인 저 여자가 뭐가 그렇게 대단한데.
클러치 백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려왔다.
감히 저를 팽개쳐?
절대 이대로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몸을 바로 한 수빈이 제 코트 깃을 매만지며 가볍게 툭툭 털어냈다.
‘그래. 지금은 즐거울 거야. 언제까지 그럴 수 있는지 지켜볼게. 단, 날 이렇게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해 줄게.’
수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걸어서 VIP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1층에 내리자마자 클러치백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재빨리 주소록을 검색하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두 번이나 재다이얼을 누른 후에야 겨우 통화가 연결되었다.
“그 여자 포기한 거야?”
핸드폰 너머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수빈의 얼굴에 미소가 흘렀다.
“그럼 내가 도와줄게. 잠깐 만나.”
* * *
살다 보면 이래저래 후회스럽고 미안해지는 일이 많은 모양이었다.
지훈은 차마 해인과 눈을 마주할 수 없어 그저 안고만 있었다. 왜 하필이면 저 여자가 제 주변에 있어서 해인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게 되는 건지 미안할 따름이었다.
해인은 도르륵 눈을 굴리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생각해 보았다. 다리 아픈 남자를 서둘러 다시 침대에 눕혀야 하는데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기요?”
“…….”
“나, 저 여자한테 당한 적은 별로 없어요. 나도 기분 상하게 하면 할 말은 하는 스타일이라, 사실은 저 여자가 매번 당했을 거예요.”
“잘했어.”
“그래도 물론 만날 때마다 기분은 나빴어요.”
“그건 미안.”
“지훈 씨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요. 뭘.”
“그래도.”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안고 있을 거예요? 다리도 아프면서?”
“아!”
지훈은 새삼 자신이 다리 다친 환자라는 것을 절감했다. 솔직히 진통제를 맞아서 그런지 이젠 미약한 통증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지훈은 해인의 팔에 의지해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분위기가 또다시 미묘해지는 것 같아 해인은 멀뚱멀뚱 병실을 둘러보았다.
VIP 병실이라 텔레비전도 크고 컴퓨터도 있었다. 혼자 있어도 심심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나, 집에 갈까요? 컴퓨터도 있으니까 별로 안 심심할 것 같은데…….”
“진심이야?”
“네. 여기서 자면 지훈 씨 때문에 많이 불편할 것 같거든요.”
“집에서도 딱히 편하게 둔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오늘은 혼자잖아요. 자유를 만끽해야죠.”
“같이 가면 그만이야.”
진심이 가득 담긴 말에 해인은 별수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오늘도 꼼짝없이 저 좁은 침대에서 둘이 붙어 자야 할지도 모르겠다.
“과자 먹을래요?”
“난 원래 이런 거 안 먹는데…….”
“…….”
“이제 먹게 되네.”
지훈은 여태껏 군것질을 거의 하지 않고 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떡볶이의 맛도 잘 모르고 아이스크림도 몇 년 만에야 먹은 것 같았다.
“이렇게 맛있는 것을 왜 안 먹었어요?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새우 맛 봉지 과자를 뜯은 해인이 과자를 입에 넣었다. 바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입안으로 고소한 맛이 번져갔다.
해인이 새끼손가락만 한 과자 하나를 집어 이번엔 지훈의 입에 넣어 주었다.
아, 하며 입을 벌린 지훈이 착실히 과자를 씹었다. 이번에도 바삭, 하며 경쾌한 소리가 났다.
음. 나쁘지 않네. 지훈이 하나 더 달라는 듯 다시 입을 벌렸다.
그렇게 과자를 받아먹던 지훈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깃들었다. 살면서 꼬리가 되기를 자발적으로 바랐던 적이 있었던가. 언제나 어디에서든 리더였었고 이끌고 나아가던 것이 당연한 남자였었다.
그런데 이 여자 앞에만 있으면 그냥 꼬리가 되어 살아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흔히 말하는 아내 바보라도 상관없었다.
뭐든 해인을 위해 다 맞춰 주고 원하는 것은 다 들어 주고 필요하면 발바닥도 닦아 주고 싶었다.
내친김에 한번 닦아 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해인을 빤히 보는데 그녀가 뭘 알고 그러는지 상큼하게 웃었다.
“발 닦아 줄까?”
“네?”
“발 말이야. 내가 닦아 줄까 해서.”
“갑자기요?”
“응. 갑자기 하고 싶어졌어.”
“싫어요. 간지러워요. 그리고 그 핑계로 또 뭘 할 줄 알고요.”
이번엔 순수했는데……. 지훈은 쩝 하니 입맛을 다셨다.
그 순간 다시 과자가 입술을 향해 왔고 마치 당연하다는 듯 입을 벌려 과자를 물었다.
왠지 사료를 받아먹는 느낌이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사람 절대 안 변한다던데, 자신을 보니 변하기도 하는 것 같다.
이 모든 상황이 그저 즐거울 뿐이니.
“내가 말이야. 이쯤 되면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한번은 와야 할 것 같은데…….”
“…….”
“안 오네. 전혀.”
“새삼스레 꼬리가 생각나나요?”
“그냥 그렇다는 말이야.”
“이제 시작인데…….”
“…….”
“앞으로도 아주 혼란스러울지 몰라요.”
“괜찮아.”
주해인 너만 옆에 있으면.
정작 이미 주해인 한정 바보가 되어 있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 * *
퇴원을 하고 이틀이 지났다. 하루는 병가를 냈고, 또 하루는 주말이라 집에 있었다.
고작 이틀 집에 있는데 제대로 걷지를 못하니 지훈은 좀이 쑤시는 것만 같았다.
MRI를 찍은 뇌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고 시간만 지나면 다리도 괜찮아질 것이라고 했다.
해인이 피곤하다며 늦잠을 자는 사이 지훈은 아령을 들고 운동을 하다 컴퓨터 앞에 앉았다. 다음 회의 자료들을 훑어보던 중 상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차량이 발견되었습니다. 성수동에서.
“성수동? 누가 타고 있었는지는 모르고?”
-일단 CCTV 확인 결과 이삼십대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였습니다. 제가 직접 확인했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습니다.
“나도 확인해 봐야겠네.”
-화면이 흐려서 얼굴이 자세히 나온 건 아닙니다. 일단 입고 있는 밤색 가죽옷을 특정해 그 일대를 수색하기로 했으니까 기다려 보시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 수고했어.”
핸드폰을 끊은 지훈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이제 범인을 잡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