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유일하게 누나만.
(79/92)
79. 유일하게 누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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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유일하게 누나만.
2022.09.01.
나르시시즘이라고?
해인은 지그시 지오를 응시했다. 지오 정도면 있을 만할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하필이면 저한테 매달리는 이 상황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이성적으로 이야기하면 말이 통할까. 해인은 지오가 부디 완전한 또라이는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지오 씨. 말했지만 난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이미 남편이 있는 여자라고요.”
“상관없어요. 그냥 나를 있는 그대로 한 번만 봐 달라는 말이잖아요. 내가 누나랑 결혼하자고 한 것도 아닌데, 꼭 그렇게 철벽으로 방어할 필요가 있냐고요.”
말이 통할 것이란 기대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내부는 환했지만, 해인은 까만 어둠이 저를 삼켜 버리는 것만 같았다.
어서 빨리 이곳을 나가야 하는데…….
그러나 핸드폰조차 없는 상황에서 밖으로 연락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참 이상해요. 내가 이 정도로 하면 다들 넘어오는데 누나는 왜 안 넘어와요? 내가 어때서? 나, 지오가 유혹하는데 당연히 넘어와야지. 혹시 터프한 남자 좋아해요? 내가 너무 순둥이같이 굴었나?”
“어떤 모습이든 나에게 지오 씨는 그냥 지오 씨예요. 그러니까 문이나 열어 줘요.”
“그렇게 꼭 가야겠어요? 나, 누나가 자꾸 이러니까 점점 승부욕이 치밀어 오르는데…….”
지오의 표정이 돌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주스를 한입에 털어넣은 그가 으드득 소리를 내며 얼음을 씹어 삼켰다.
초조해진 해인은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만 같았다.
부러 공포를 조장하는 건지 진심으로 화가 난 것인지 구분할 수는 없었다. 머리가 마비된 듯 상황 파악이 어려워졌다.
대체 어떻게 해야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왜? 내가 누나 남편보다 부족한 게 뭔데?”
“당장 문이나 열어요.”
“지금 상황이 누나가 나한테 명령할 상황인가? 나한테 그렇게 하면 안 될 텐데…….”
날아오는 말투가 매섭고 살벌해졌다.
그 모습이 워낙 섬뜩해 해인은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자신이 알던 지오가 아닐 수도 있었다. 수빈이 그렇듯 연예인들은 꾸며지고 만들어진 이미지가 많을 테니까.
지금, 이 모습이 지오의 진짜 모습이라면 이 순간의 저는 무척이나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고 볼 수 있었다.
“이제까지 지오 씨의 순수하고 해맑았던 모습은 다 연기였나요?”
“누나! 사람이 순수하면 얼마나 순수할 수 있을까요. 만일 이것도 나라면 어쩔 거예요?”
“어떤 모습이 진짜건 그만 멈춰요. 이런 희롱 따위 받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지금 당장 날 보내 주지 않으면 지오 씨는 파멸하고 말 거예요.”
지오의 진짜 모습이 무엇이건 더 이상의 농락은 받아 주기 힘들었다. 그런 해인의 단호하고 차분한 경고에 지오는 아연한 모습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매섭게 변해 있던 표정에 균열이 생기더니 이내 실망스럽다는 듯 어깨가 축 처졌다.
“아! 역시 누나는 사람 보는 눈이 형편없어.”
“…….”
“뭐가 연긴지 구별이 안 되나요? 난 원래 보이는 그대로예요. 해맑고 순수한 그게 바로 나, 지오라고요. 잠깐 터프한 척, 나쁜 남자 흉내 좀 내봤는데 그것도 구분 못 해요? 누나가 그렇게 보는 눈이 없으니까 나, 지오의 진가를 못 알아보는 거예요.”
어느새 투정하는 소년으로 돌아온 지오는 해인이 알던 바로 그 지오였다.
정말 연기였을까. 이젠 이것도 저것도 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해인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지오를 바라보았다.
사실 어느 쪽이든 그는 이미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해인이 아무 말 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지오가 환하게 웃으며 한 걸음을 성큼 다가왔다.
“누나. 많이 놀랐구나. 아까 그게 연기였어요, 연기. 내가 혹시 터프하면 누나가 혹시 반할까 해서. 자, 지금부터 다시 부드럽고 순수하고 해맑은 지오랍니다.”
해인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다채롭게 변하는 그가 이제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일단 여기를 빠져나가야 하는데 대체 이 문을 어떻게 열어야 할까.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결국 지오를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없는 협상 능력이라도 이끌어내야 했다.
“지금이라도 문 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해 줄게요.”
“정말 꼭 가야겠어요? 나 지오가 이렇게 누나를 갈구하는데?”
“지오 씨. 제발 정신 차리고 이 문 열어요.”
“음. 서운하다. 누나랑 조금만 더 같이 싶었는데…….”
“지오 씨. 이렇게 사람을 가두는 건 범죄예요. 알 만한 사람이 이러면 안 되죠.”
“범죄라뇨? 난 지금까지 한 번도 여자를 강제로 가두거나 취한 적이 없어요. 물론 누나도 그럴 생각 없고요. 왜냐!”
“…….”
“난 지오거든요. 연예인들의 연예인, 지오. 대한민국의 여자들이 죽고 못 사는 지오. 누구나 알아서 매달려 주는 지오. 근데 내가 왜 내 이름에 먹칠하는 짓을 해요?”
지오가 양손을 들어 어깨를 으쓱하는 포즈를 취했다. 제발 저 말이 진실이기를 바라며 해인은 다시 한번 간절히 그를 설득했다.
“그래요. 알았으니까 어서 문 열어 줘요.”
“근데…….”
“…….”
“유일하게 누나만 안 넘어왔어요. 내가 이렇게 하기도 전에 모든 여자가 다 넘어왔는데…….”
의사가 그에게 지독한 나르시시즘이라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저 정도면 거의 정신병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더라도 스타와의 일탈은 체질에 맞지 않았다. 스타에게 전화가 왔다고 해서 덥석 만나는 것이 아니었는데…….
해인은 처음부터 그를 거절하지 못한 자신을 후회했다.
“남편이 찾고 있을 거예요. 그 사람이 지오 씨가 이런 짓을 한 걸 알면 정말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지오 씨의 모든 것을 무너뜨릴지도 몰라요. 다시 연예계 생활하기 어려울 만큼.”
“연예계 미련 없어요. 이미 돈은 넘치도록 있고 인기도 맛볼 만큼 맛봤어요. 그런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나 때문에 고생하신 엄마도 안 계시는데.”
“그래요. 엄마. 지오 씨 어머니. 하늘에서 지오 씨를 지켜보고 계실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이러지 말아요.”
어머니라는 말에 마음이 동한 것인지 지오는 잠시간 슬픈 표정을 지었다. 해인은 부디 그 자극이 그의 마음을 움직여 주기를 바랐다.
“굳이 어머니 이야기까지 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누나에게 무슨 짓을 할 생각은 없으니까. 문 열어 달라고요? 저 문은 정말 고장 났어요. 대신 다른 곳에 문이 하나 더 있어요. 그 문으로 나갈 수 있어요.”
나가는 문이 또 있다고?
해인이 즉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에 보이는 곳에 나가는 문은 없었다. 혹시 커튼에 가려진 주방 안쪽에 뒷문 같은 것이 있단 말인가.
해인이 그쪽을 살피는 사이 지오가 또다시 한 걸음을 다가왔다.
“누나.”
“…….”
“나, 어때요? 여전히 내가 별로인가요? 나는 누나가 너무 좋은데…….”
“가까이 오지 말아요.”
“그러지 말고 누나, 나 자세히 봐 봐요. 내가 누나 남편보다 매력이 없을 리가 없잖아요.”
“또라이 새X.”
“……뭐?”
“못 들었어? 또라이라고.”
“푸흣.”
잠시 멍해 있던 지오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러고는 이내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해인을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누나, 진짜 멋지다. 아! 역시 누나는 내 스타일이야. 누나 그거 알아요?”
“…….”
“나한테 욕한 여자는 누나가 처음이에요.”
이젠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저 정도면 준 미친X이었다.
나가는 문이 있다는 지오의 말에 믿음이 간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다.
그것이 주방 안쪽에 있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믿고 가 보는 수밖에.
결심을 굳힌 해인이 소파의 뒤쪽을 가로질러 주방 쪽으로 내달렸다. 안으로 들어오니 정말로 한쪽 구석에 밖으로 나가는 문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재빨리 달려간 해인이 레버를 잡고 오른쪽으로 돌렸다. 찰칵 소리를 낸 문이 열리고 정원 너머 펼쳐진 어두운 하늘이 보였다.
신발이 없었지만 해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고요한 적막에 둘러싸인 어둠 속으로 희미한 달음박질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 * *
신년 프로젝트를 위한 기획 회의를 끝낸 지훈이 사무실로 돌아왔다. 기다리던 상진이 여전히 절룩거리는 그의 다리를 보고는 싱긋 웃었다.
“회의는 잘 끝나셨나요?”
“잘 끝나긴 했는데, 재정 상황이 별로라서 그런지 다들 예민하네.”
“연말 프로모션 끝나면 좀 나아지겠죠.”
“그래. 그래야지. 이만 퇴근하자. 아 참, 경찰에선 아직 소식 없어?”
“그러잖아도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CCTV 몇 대 수거했는데 어제 인상착의가 비슷한 사람이 로얄 피시방에 다녀간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래서 형사들이 잠복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혹시 몰라서 더 이전 시간에도 다녀간 적이 있는지 지금 확인 중이라고 합니다.”
피시방? 평일 낮 그런 곳에 드나드는 사람 중에는 직업이 없어 시간을 때우는 이도 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이라면 누군가의 사주를 받기에 훨씬 적합한 인물일 것이다.
“다시 거기에 나타날까?”
“한번 나타났으니까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도난 차량이 발견된 곳과 가깝기도 하고요.”
“그래? 그렇다면 형사들에게만 맡기지 말고 사람 사서 몇 명 더 잠복시켜 봐.”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정말 안형준 그놈일까요?”
상진이 안형준을 떠올리며 물었다.
의심은 가지만 그렇다고 이런 무리수를 둘 만큼 어리석은 사람인가 싶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충분히 어리석은 짓을 했지만.
“지금으로선 그놈이 제일 유력하잖아. 나도 추측일 뿐이야. 다른 것보다 나한테 얻어맞은 것이 가장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겠네요. 참 겁도 없이 덤비지 말입니다. 근데 만일 그놈이면 어떡할 겁니까.”
“뭘 어떡해. 경찰한테 넘기기 전에 제대로 응징해야지. 경찰은 그다음이야.”
“역시 현명하십니다. 형님 다리가 그 지경이 되었으면 상대는 다리가 부러져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리가 불편하셔서 제대로 못 할 것 같으면 복수는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상진이 극단적인 단어까지 쓰며 결의를 다졌다. 생각해 줘서 하는 말처럼 들리면서도 약간 놀리는 것 같기도 했다.
히죽거리며 웃는 얼굴을 보니 더욱 그랬다.
“네 일이나 잘해. 복수는 아무나 하냐.”
“제가 아무나는 아니죠.”
“됐다. 됐어. 그만 가자. 해인이 기다릴 거야.”
지훈이 급히 말을 돌리며 책상 위에 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해인에게 전화를 하려고 폰을 보는데 이미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서둘러 다시 전화를 했지만 폰이 꺼져 있다는 음성 메시지가 들려왔다.
어느새 문 앞으로 나가 있던 상진이 무슨 일인가 싶어 되돌아보았다.
“형수님께 전화하셨어요? 안 받으시나요?”
“꺼져 있네.”
“배터리가 방전되셨나?”
“가끔 이러더라고. 집에 있을 거야. 얼른 가자.”
머리를 끄덕인 상진이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어젖혔다.
그때였다. 슈트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상진의 핸드폰이 울렸다.
벨 소리에 이끌려 상진의 핸드폰을 바라보는데 이상하게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 * *
해인은 건물 오른쪽으로 돌아 정신없이 대문 쪽으로 내달렸다.
정원의 반쯤 와서 뒤를 돌아보는데 어느새 지오가 따라오고 있었다. 양손에는 자신이 벗어 둔 신발이 한 켤레씩 들려 있었다.
날이 어두워서 그런지 또다시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맨발이라서 발이 시렸지만, 해인은 정신없이 돌계단을 내려갔다. 큰 원목 대문은 열리지 않던 자동문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일단 내려가서 고리처럼 생긴 손잡이를 잡고 밀어보았다. 하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둥 쪽으로 가서 버튼이라도 있나 살피려던 찰나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아무리 급해도 신발은 신어야죠. 여기 신발 가져 왔어요.”
돌아보니 어느새 돌계단 위에 도착한 지오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망갈 공간을 마련해 주고 또다시 막다른 공간으로 밀어 넣은 것이 아닐까. 해인은 마치 토끼몰이를 당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름 침착하려 했지만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한테 왜 이래요?”
“내가 뭘요? 누누이 말하지만 나는 누나한테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앞으로도 마찬가지고요.”
“그렇다면 이 문부터 열어요.”
“한번 열어 봐요. 그 문은 쉽게 열 수 있어요.”
해인이 뒤를 돌아 다시 손잡이를 들어 밀어 보았다. 하지만 문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등 뒤로 돌계단을 내려오는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구둣발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밀려오는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며 곧장 뒤를 돌았다.
계단을 모두 내려온 지오와의 거리는 고작 다섯 걸음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