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가자. 집에.
(80/92)
80. 가자. 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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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가자. 집에.
2022.09.04.
지금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지오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수빈은 선뜻 감이 오지 않았다.
“이번엔 무슨 일이야?”
들려오는 말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형준이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 지오의 별장에서 나온 수빈은 곧바로 형준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했다.
그렇게 지난번 만났던 와인바에 먼저 도착해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지훈 오빠 그렇게 한 사람, 안형준 씨 맞죠?”
다짜고짜 이어진 물음에 형준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물이 든 유리잔을 집어 들었다.
“무슨 말이야?”
“지훈 오빠 다리 말하는 거예요. 사고 낸 사람 아니냐고 묻는 건데, 아닌가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왜, 그놈이 다리라도 부러졌어?”
“어머. 모르는 일이에요? 그럼 누굴까요?”
“그야 내 알 바 아니지. 소송 건만도 머리가 복잡한데. 근데 그것 때문에 만나자고 했나?”
“아니에요. 그런 거.”
사실이 그랬지만 수빈은 솔직히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훈의 다리를 그렇게 한 사람이 안형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일을 저지르고 나니 생각나는 이가 바로 안형준이었다. 초조한 마음에 그가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그가 아니라 하니 수빈도 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형준은 물끄러미 수빈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얼굴도 그렇고 분위기도 뭔가 초조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형준의 촉으로는 분명 뭔가 다른 일이 있는 듯했다.
“안 좋은 기사 같은 건 없던데, 뭣 때문에 그래? 무슨 일이 있나?”
“아니에요. 별일이 있을 리가 없죠.”
담담히 대꾸하지만 수빈의 속내는 복잡했다. 지오의 연락을 기다리며 무슨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 부자연스러운 모습은 형준의 의구심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핸드폰에 뭐, 중요한 거라도 있어?”
수빈은 대답 대신 히죽 웃음만 지었다. 지오의 별장을 나오기 전 해인의 옷과 가방을 지오의 게스트 룸에 두고 나왔다.
물론 사진도 찍어 두었다. 누가 봐도 지오의 집이란 것을 알 수 있도록 그가 입었던 옷과 함께.
물론 지오는 그 사실을 모른다. 나중엔 알게 되겠지만.
대스타 지오의 게스트 룸에서 발견된 어떤 여자의 옷과 가방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리면 재밌을 것 같았다.
사람들은 궁금해할 것이다. 그 여자가 과연 누구일지, 둘이 같이 무엇을 했을지…….
지오에게 해인을 데려오겠다는 제안을 했을 때 그는 처음엔 주저했었다.
꼭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라며.
하지만 수빈은 지오의 엄마 이야기를 하며 같은 상처가 있으니까 아마 이해해 줄 것이라는 말로 그를 설득했다.
환자처럼 누워 있어야 해인의 마음이 동요할 것이라며 지오를 설득한 것도 그녀였다. 문을 잠근 채로 작동 버튼을 고장 내는 설정도 모두 그녀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수빈은 지오와 대화를 나눴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지오는 자신의 제안을 흥미로워했고 해인에 대한 어떤 기대감에 차 있는 듯했다.
간혹 해인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다며, 아마도 전남편 때문에 망설이는 것 같다는 말을 할 때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수빈은 지오가 해인을 유혹할 수 있을 것이라 낙관하지는 않았다.
해인이 과연 스타와의 일탈을 즐길까? 만날 때마다 느낀 것이지만 은근 고리타분한 여자였었다. 지오의 유혹이 성공하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이 사진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았다.
이미 자의로 지오를 만난 경력도 있으니 지훈과의 애정전선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애정이 식지 않더라도 의심 같은 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틈이 생기고 서로를 향하는 마음도 차츰 변해 갈 것이다.
세상에 영원한 사랑 같은 건 없다. 수빈은 그들의 불행을 간절히 바라마지 않았다.
제게 치욕을 안겨 준 두 사람이 아무 탈 없이 멀쩡히 사는 것을 절대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무슨 생각해?”
“안형준 씨와 비슷한 생각이요.”
“……뭐?”
어이없어하는 형준을 향해 수빈은 여전히 히죽거리는 웃음만 날렸다. 궁금하기는 했으나 형준은 굳이 남의 사생활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제 일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으니까.
수빈은 주문한 와인을 입에 대지도 않고 일어섰다. 솔직히 이번 일은 위험부담이 꽤 큰일이었다.
그렇다고 후회하지는 않았다. 일이 잘못되어도 제겐 아버지라는 큰 백그라운드가 있다.
언론도 막아 주고 뒷일도 처리해 주고.
재벌 딸이 이럴 땐 참 좋았다.
* * *
해인은 알 수 없는 공포로 인해 손발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피할 곳이 있기는 하는 걸까.
담장은 높아서 손조차 닿지 않을 듯 보였고 오른쪽으로 더 들어가면 나무숲이었다. 곳곳에 조명이 밝혀져 있어 그곳이라고 딱히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냥 있을 수도 없는 노릇. 해인은 여차하면 나무숲으로 뛰기 위해 천천히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비명을 지르면 혹시나 지나가는 누군가가 들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며 지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지오는 해인을 쫓아오지 않고 곧장 대문 앞으로 향했다.
그가 선 곳은 고리 모양의 손잡이가 있는 곳이 아니라 문을 지탱해 주는 기둥이었다.
“누나. 미안해요. 누나가 이렇게 싫어할 줄은 몰랐어요.”
그의 말소리가 어쩐지 서글프게 들려왔다.
“누나도 나 만나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아쉬움이 짙게 밴 한마디를 던진 지오가 기둥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전자음과 함께 잠금장치 같은 것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린 것인가. 해인의 시선이 대문을 향했다.
“내가 말했잖아요. 이 문은 열기 쉽다고.”
해인의 로퍼를 든 지오가 천천히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저 말을 믿어도 되는 건지 해인은 이제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어떤 것이 연기인지 알 수 없는 노릇. 해인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다가오는 지오를 노려보며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다가오지 말고 신발만 던져 줘요.”
해인의 외침에도 지오는 멈추지 않고 다가왔다.
“누나. 많이 추울 것 같아.”
해인의 입술은 이미 파랗게 질려 있었다.
사실 춥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할 만큼 긴장한 탓에 그제야 비로소 추위가 밀려왔다.
살얼음 같은 추위를 느끼며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그때였다.
“해인아! 주해인!”
대문 너머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목소리는…….
해인은 본능적으로 담장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해인아! 안에 있어?”
이렇게 저를 불러 줄 단 한 명의 사람. 그는 분명 지훈이었다.
여길 어떻게 알고 있을까. 혹시나 환청인가 싶으면서도 제 남자의 목소리는 안도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팽팽했던 연줄이 끊어지듯 긴장이 풀린 해인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거칠게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둠을 비추는 조명 아래 상기된 지훈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왔구나.
떨리는 해인의 눈동자에 어느 때 보다 믿음직한 지훈이 신기루처럼 담겨왔다.
대문을 밀고 들어온 지훈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목도하며 아연실색했다.
해인의 것으로 보이는 로퍼를 들고 서 있는 지오와 그 너머로 양말만 신고 외투도 입지 않고 주저앉아 있는 해인의 모습.
보는 것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았다.
상황 파악은 차후의 일이었다.
지훈은 재빨리 지오를 지나쳐 해인에게로 향했다. 차에서 내리기 전 깁스를 풀어 둔 게 다행이었다. 달리는 그 순간엔 다리조차 절지 않았다.
대체 어떤 상황이기에 신발도 신지 못하고 이렇게 주저앉아 있단 말인가.
제 코트를 벗어 해인을 감싸 준 그가 다급히 물었다.
“괜찮아?”
떨리는 해인의 눈동자가 오롯이 지훈을 향했다. 마비가 풀린 것처럼 한계에 내몰렸던 지친 마음이 깨어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불빛을 등지고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가 얼마나 따듯하고 초조하게 저를 담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만을 내뱉을 뿐 해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런 순간에 사랑하는 남자가 저를 찾아내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벅차오르는 감격이었다.
가까스로 머리를 끄덕이고는 그가 안심할 수 있도록 웃어 주었다.
“정말 괜찮은 거야? 다친 데는, 어디 아픈 데는…….”
힘주어 고개를 흔드는데 그의 손이 두 볼을 감싸 안았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문득 자조 섞인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어리석은 짓이었다. 수빈을 따라온 것은.
적어도 이 남자에게 말이라도 했다면 가지 말라고 말렸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저는 이제야 안심인데 지금은 그가 떨고 있었다.
그를 위해서라도 얼어붙은 입술을 열어야 했다.
“아무 일, 없었어요. 아무 일도. 진짜 괜찮아요.”
아무 일 없었다는 한마디에 격동하던 가슴이 서서히 누그러졌다. 한순간이지만 까마득하게 추락했던 지훈은 비로소 안도했다.
이어 타오르는 것은 선명한 분노였다.
지훈보다 조금 늦게 들어온 상진은 그제야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 사이 지훈은 제 슈트까지 벗어서 해인의 발을 감싸 주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흡사 저승사자와 같이 지오와 마주했다.
해인이 이런 모습으로 여기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큰 공포와 마주했을까. 궁지에 몰려 도망쳤을 해인을 생각하니 가슴이 불처럼 들끓었다.
“너, 뭐야.”
맹수의 포효와도 같은 살벌한 물음이었으나 지오는 개의치 않고 웃었다.
얼핏 서글픈 웃음이었다.
“형!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나는 진짜 형이 부러워요. 어떻게 누나 마음을 사로잡았죠?”
이미 피가 거꾸로 솟은 지훈에게 그 말은 미친 개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다들 미칠 것 같은 그 순간에 홀로 웃고 있다면 그것은 가해자만 가능한 일이다.
순식간에 그에게 다가간 지훈이 주먹으로 지오의 명치를 후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지오가 땅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몸을 숙인 지훈이 지오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우리 해인이 데려다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야.”
지오는 숨도 쉬지 못할 것 같은 고통에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득한 시선이 향하는 곳은 검은 하늘이었다.
“나도 누나한테 사랑받고 싶은데…….”
퍽. 이번엔 지훈의 주먹이 얼굴로 날아갔다.
“이런 미친 새X.”
지오의 입술이 터져 피가 흘러나왔다.
괴로운 신음을 뱉어내는 지오는 반항조차 하지 않았다.
“크헉. 기왕 때리는 거 더 세게 때려 줄래요? 얼굴 망가져서 다시는 연예계 생활 못 하게.”
“넌 이제 어차피 못 해. 내가 너 경찰에 넘길 거니까. 네 인생은 이제 시궁창에 처박힐 거야. 네 이런 모습을 네 팬들이 알면 뭐라고 할까.”
“상관없으니까 꼭 그렇게 해 줘요.”
“그래. 원한다면 그렇게 해 줄게.”
지훈이 다시 주먹을 추켜 올렸다.
이놈이 해인을 신발도 신지 못한 채로 뛰게 만들었다.
이 겨울에 코트도 걸치지 못하고 맨바닥에 주저앉게 만들었다.
아무 일이 없었다 해서 용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다시 지오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리치려던 그때였다. 어느새 손이 잡혀 돌아보니 해인이 제 옆까지 와 있었다.
“그만 해요.”
“이 자식이 널, 이 꼴로 만들었잖아.”
“괜찮아요. 아무 일 없었어요.”
“신발도 못 신고 입고 있던 코트도 없이 이 꼴인데 괜찮다는 게 말이 돼? 뭐가 얼마나 다급했으면 이런 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냐고.”
분노와 근심, 그리고 애틋함.
그 모든 것이 담겨 내뱉어진 말은 흡사 절규와도 같았다.
“미안해요.”
결국, 해인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가 자신을 보고 느꼈을 마음이 무척이나 아팠다.
얼마나 걱정을 하고 또 얼마나 화가 났을지 충분히 느껴졌다. 그러나 피를 흘리는 지오는 이미 만신창이였다.
“충분히 때렸어요. 그것으로 됐어요.”
해인은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힌 눈동자로 지훈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득, 이를 악문 지훈의 눈동자도 함께 일렁였다.
지오는 그런 두 사람을 아련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사랑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저 두 사람은 진정한 사랑을 하는 듯했다.
“누나 울릴 생각은 없었는데, 미안해요. 누나.”
퍽. 지훈의 주먹이 다시 지오의 얼굴을 내리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해인의 손을 잡고 일어선 지훈은 상진에게 119를 부르도록 했다.
그 후 지훈은 비로소 해인과 마주 섰다. 눈물이 맺혀 있는 눈가를 손으로 닦아 주고는 어깨를 당겨 가볍게 제품에 안았다.
“가자. 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