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아빠는 죄가 없다.
(8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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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아빠는 죄가 없다.
2022.09.08.
모든 것이 악몽이었다는 듯 상진이 운전하는 차 안은 따듯하고 평온했다.
이미 어둠이 내린 밤거리를 달리며 지훈은 제 곁으로 무사히 돌아온 해인으로 인해 감사했다.
그래서인지 한시도 그녀를 잡은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일단 진정이 필요할 것 같아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집 안으로 들어와 거실 소파에 해인을 앉히고서야 비로소 안심이 된 지훈이 물었다.
“정말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요. 그래도 지훈 씨가 딱 맞게 와 줬어요.”
“다행이다. 근데 어떻게 된 거야?”
해인은 수빈의 전화부터 시작해 지훈이 대문을 열고 들어온 그 순간까지 빠짐없이 이야기해 주었다.
이야기가 전개될 때마다 지훈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주먹의 힘줄이 터져나갈 것처럼 팽창했다.
“결국, 수빈이랑 지오가 같이 꾸몄다는 말이야? 둘 다 가만두지 않겠어.”
지훈은 오수빈이라는 이름 석 자를 제 인생에서 지워 버리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어쩌자고 일이 이 지경까지 되게 한 것인지…….
“지훈 씨야말로 어떻게 된 거예요? 내가 수빈 씨 만나는 것도 모르고 있었을 텐데…….”
“아, 그게…….”
사고가 난 이후 지훈은 경호업체를 고용했다. 이미 한번 사고가 났기에 혹시나 또 다른 일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되어서였다.
자신을 차로 친 사람이 정확히 어디까지 자신이 다치길 원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이 해인으로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지난번 일을 실패로 여길 수도 있으니 다시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하여 매일 출퇴근할 때 저와 해인의 뒤를 따라오는 차를 한 대 두었다.
물론 그로 인해 해인이 지나치게 염려할까 봐 굳이 알리지는 않았다.
상시 대기 중이었던 그 차가 수빈과 해인의 뒤를 쫓았고 아무래도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경호원이 상진에게 연락해 왔다.
분명 둘이 함께 들어갔는데 나올 때는 혼자였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즉시 전화를 했으나 받지 않으니 직접 그곳으로 달려간 것이었다.
그런데 그곳이 지오의 집일 줄이야.
도착과 함께 문이 열렸다는 것은 천운이었다.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미안해요. 수빈 씨 만난다는 말을……, 차마 못 하겠어서 그냥 갔어요.”
“아냐. 그게 꼬드겼겠지. 해인이 잘못이 아니잖아.”
지훈은 담벼락 아래 주저앉아 있었던 해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의 품으로 안겨든 해인의 시야에 깁스 없는 다리가 들어왔다.
아까부터 궁금했었다.
“다리는 어떻게 된 거예요?”
“귀찮아서 일단 풀었어.”
“안 아파요?”
“오히려 편한데?”
“그래도 금이 간 뼈가 붙고 있을 텐데, 다시 깁스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 무리하게 쓰지 않으면.”
급한 상황이라 생각해 깁스를 풀었었다. 당시엔 그깟 깁스나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해인의 말을 들어보면 옷과 가방을 감추고 감금에 일조한 수빈의 죄도 작은 것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직 옷과 가방을 찾지 못했지만, 그거야 고작 절도죄에 지나지 않고, 문이 고장 났다고 하면 불법 감금도 성립되지 않았다.
게다가 뒷문은 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법적으로는 처벌할 근거가 아주 미미하고 죄가 성립한다고 해도 벌금 몇 푼이 전부일 것이다.
“무슨 생각 해요?”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찾아봐야지.”
분노를 가라앉힌 목소리는 차분했다. 해인에겐 그래서 더 위압적으로 들렸다.
지오의 집에서 보았던 상냥한 수빈의 얼굴을 떠올리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그 모든 것이 연기였다니 구토가 치밀만큼 역겨웠다.
사람을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무엇보다 그런 수빈을 믿고 제 발로 따라간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지고 그럴수록 지훈에게 더욱 미안했다.
“부탁이 있어요.”
“무슨 부탁? 말만 해. 뭐든지 다 들어줄게.”
“오수빈 그 여자, 스케줄 좀 알아봐 줘요.”
“응?”
“너무 사적인 거라서 어려운가요?”
“하려고만 한다면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지. 근데 왜?”
“혹시 사람들이 많은 곳에 있다면 그 시간 좀 알려줘요. 무슨 촬영 스케줄 같은, 그런 것이면 더 좋겠어요.”
“흐음.”
지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위험인물에게 해인을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혼자 보낼 수는 없어. 혹시 간다면 나도 같이 가는 것으로 해. 물론 보이지 않게 경호원도 대동하고.”
굳이 경호원까지는 필요 없지만 겪은 일이 있으니 지훈의 불안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구경만 한다는 조건으로 같이 가요. 절대 나서진 말아요. 내 일이고, 나 혼자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그래. 그렇게 해.”
“그래요. 나 좀 씻어야겠어요.”
.
.
.
샤워를 하고 간단히 죽으로 저녁을 해결한 해인은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긴장이 풀리니 추위에 떨었던 몸이 그제야 아파왔다.
머리가 지끈거리면서 몸에 열이 나는 것도 같았다.
턱을 괴고 한쪽으로 누운 지훈은 연신 주치의를 불러야 하지 않겠냐며 걱정이었다.
“응급실이라도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원래 추위에 떨면 머리가 아프곤 해요. 너무 긴장한 탓에 추운지도 몰랐지만.”
“그럼 다행인데, 배고프지 않아? 뭐라도 더 먹어야 할 텐데.”
“괜찮아요. 영양죽 먹었으니까.”
“그래. 그럼 잠깐만 쉬어.”
많이 힘들었는지 해인은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 해인을 바라보는 지훈은 마음이 쓰라렸다.
어쩌면 자신이 아니었으면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고통이었다. 그것이 못내 미안해 지훈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 * *
다음날 인터넷은 지오의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밤새 조금 더 혁신적이고 정당한 보복과 처벌을 계획하던 지훈의 노력이 무의미할 정도의 뉴스였다.
<톱스타 지오, 두들겨 맞아서 병원에 입원>
<톱스타 지오, 연인 있는 여자 유혹하다 남친에게 맞음>
<지오, 얼굴 짓이겨질 정도로 맞음>
대부분은 이렇게 사실 그대로였으나 간혹 추측성 기사도 남발했다.
<지오, 연인 있는 여자와 도피 중 발각되어 죽도록 맞음>
<지오, 대형 사고 나다>
이런 오보는 소속사의 정리로 금방 내려갔고 가장 사실에 근거한 기사가 대문으로 뜨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것이 지오 스스로 인터뷰를 자청해 작성된 기사라는 점이었다. 그것을 뒷받침하려는 듯 침대에 누워 있는 지오의 사진도 함께 첨부되었다.
기사의 내용은 이러했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었고 몇 번 그 여자에게 고백했지만 거절당했고, 급기야 그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 집으로 데려와 가뒀다가 그 여자의 남친에게 발각되어 맞았다는 것이었다.
수빈의 이야기는 없었지만 사실관계가 비교적 정확했다. 엄밀히 따지면 부러 자신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기사를 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해인은 지오가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가 왜 수빈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이슈는 곧장 지오가 선택한 여자의 정체로 옮겨갔다. 하지만 지오는 그 여자의 정체에 대해서는 끝내 함구했다.
소속사는 지오의 그런 처신에 대해 당황했지만, 곧장 입장을 정리했다.
지오의 잘못이긴 하나 지금은 반성 중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아무리 그렇다 한들 연예인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얼굴을 폭행한 것에 대해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고 했다.
따라서 법적 조치에 들어갈 것이며 경찰에 지오를 폭행한 남자를 고발할 것이라고.
지오가 폭행남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지만, 경찰 조사가 들어가면 지훈이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사건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회사에서도 종일 지오의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충격에 빠진 팬들이 병원으로 찾아가 소란을 피우고 있다는 것도 회사에서 점심을 먹다가 들었다.
공교롭게도 그 병원이 지훈이 입원했던 한국병원이었다.
“해인 씨. 지오를 우리 모델로 썼다가는 큰일 날 뻔했어요.”
“부사장님이 다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거지.”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온 은진과 승윤이 번갈아 가며 말했다.
조용히 혼자 있고 싶은데 무슨 재미난 일이라도 난 것처럼 두 사람 모두 해인의 책상에 꼭 붙어서 커피를 마시는 중이었다.
“지오의 그녀는 누구였을까요? 너무 궁금하다.”
“그게 뭐가 중요해. 우리 부사장님이 그 지오를 택하지 않았다는 게 중요하지.”
“에이. 솔직히 부사장님은 마케팅비를 절약하려고 그런 거죠. 선견지명은 무슨.”
“심 대리가 뭘 모르네. 부사장님 눈빛을 봐 봐. 그게 보통 사람 눈빛인지. 회의할 때 눈빛이 얼마나 날카롭고 예리한지 알아? 심지어 볼펜으로 뭔가를 쓸 때도 그냥 쓰는 게 아니야. 뭔가 결정할 때의 눈빛은 또 어떻고. 사자가 먹이를 마지막에 낚아챌 때 그 눈빛, 알지? 그렇게 맹렬하다니까. 그런 분이 지오가 어떤 놈인지 몰랐겠어? 다 알고 그런 거야. 암. 그렇고말고.”
책상에 앉아서 이야기를 듣던 해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상황에서 차마 어떤 놈인지 전혀 몰랐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심 대리도 황당한 얼굴로 승윤을 응시하더니 이내 해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인 씨. 우리 팀장님이 사회생활을 참 잘하시는 것 같지 않아?”
해인은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어 멋쩍은 웃음만 지었다.
이 와중에 유일하게 침묵하는 이가 우영이었다. 그는 내내 해인의 얼굴을 살폈고 해인이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렇다고 해인이 지오의 그녀일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해인 씨는 궁금하지 않아? 지오의 그녀가 누구인지…….”
“글……쎄요.”
“지오가 감춰 주고 있잖아. 누군지 진짜 궁금하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민망해진 해인이 급하게 일어나 사무실을 나섰다.
우영의 눈동자가 도망치듯 나가는 그녀의 등을 끝까지 쫓고 있었다.
일단 해인은 화장실을 갔다가 아직 점심시간이 조금 남은 것을 확인하고 부사장실로 올라갔다.
점심시간에 지하 식당에서 잠깐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딱히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기사를 봤는지, 이젠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훈은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세상은 떠들썩한데 그만 혼자 평화로운 느낌이 들었다.
그가 해인이 들어온 것을 보고 재빨리 일어서서 다가왔다. 그마저도 해인에 대한 걱정이었다.
“괜찮아? 오늘은 머리 아프지 않아?”
“아파요. 아, 그 머리가 아니고…….”
해인이 제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픽 웃은 지훈이 다가와 해인의 손을 잡고 소파 앞으로 데려가 앉혔다.
말하지 않아도 해인의 관자놀이가 왜 아픈지 알 것 같았다.
“기사 봤어요?”
“봤어.”
“그런데 이렇게 가만있어도 되나요? 지오는 왜 그랬을까요. 굳이 그걸 기사까지 낼 필요는 없었는데…….”
“내가 먼저 터트릴까 봐 지레 겁먹었나 보지. 맞았다고 하면 동정심이 생길 수도 있잖아. 다 그런 계산일 거야.”
“마음이 불편해요.”
“왜? 지오가 추락해서?”
“내가 잘못한 거 아닌데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어요.”
“잘못한 건 그놈이야. 악인의 몰락을 동정하다 보면 간혹 옳고 그름에 대해 관대해지는데, 냉정하게 생각해. 마음 불편할 이유 없어.”
“그래요. 냉정하게 생각해야겠어요.”
믿음직하게 잡아주는 지훈의 손이 따스하고 좋았다.
내내 명치 끝에 걸려 있던 불편한 마음들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근데 내 남편이 전과자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것도 폭행으로.”
“아, 그건…….”
“난 괜찮아요. 그런데 언젠가 우리 아이가 생길 텐데 아이에겐 뭐라고 할까요?”
“음……. 복잡한 문제네.”
“그렇죠.”
“악당과 싸우다 얻은 전과라고 하자. 사실은 아빠가 어벤X스의 일원인데 인류를 위협하는 악당을 무찌르다 그렇게 됐다고.”
“그건 영웅이잖아요.”
“영웅들도 원치 않게 감옥에 갇힐 때가 있거든.”
“그걸 우리 아이가 알아들을까요?”
“배 속에서부터 세뇌를 시켜야지. 아빠는 죄가 없다, 아빠는 히어로다, 아빠는 아이X맨이다. 그리고 사실, 엄마도 총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