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 라면 먹고 하는 일. (82/92)


82. 라면 먹고 하는 일.
2022.09.11.



 
예기치 못한 일격에 해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 남자가 이렇게 유치한 남자였나 싶어 슬금슬금 미소도 피어올랐다. 아이가 받을 충격을 생각하면 웃으면 안 되는데…….

아빠는 아이X맨, 엄마는 총잡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남편이 그렇다면 그런 거로 해야겠다.

그 순간 어깨 위로 듬직하고 따스한 손이 올라왔다.


“고소 못 할 거야. 걱정하지 마.”

“…….”

“폭행은 반의사불벌죄라서 지오가 직접 고소하지 않으면 소속사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래도 기어이 해보겠다면 내가 한마디 해야지.”

“뭐라고 할 건데요?”

“나랑 싸우려면 소속사 공중 분해될 각오해야 할 거라고, 덤으로 지오는 영원히 매장시켜 주겠다고.”

지훈이 웃으면서 말했지만, 해인은 그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일이 커지면 그들에게 유리할 것도 없었다.

사실관계를 정확히 알면서도 초점을 폭행에 맞춘 것이 오히려 자충수가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해인이 머리를 끄덕이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하 비서님은요?”

“옷 찾으러.”

옷이라고?

설마 제 코트…….

놀란 해인이 지훈의 어깨를 빠져나와 그의 얼굴을 바라볼 때였다.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상진이 유니폼을 입은 간호사와 함께 들어왔다. 지훈보다도 먼저 해인에게 눈인사를 하는 상진의 손에 커다란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함께 온 간호사의 손에도 큰 왕진 가방이 들려 있었다. 쇼핑백을 내려놓은 상진의 시선이 지훈의 다리로 향했다.


“일단 깁스부터 다시 하시죠.”

“거참 안 해도 되는데…….”

“얼른 해요.”

말 안 듣는 환자를 향해 해인이 거들고 나섰다. 엑스레이는 다시 안 찍어도 되는지 걱정이었지만 일단 깁스부터 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해인의 명령과도 같은 한마디에 지훈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간호사에게 다리를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본 상진이 고소하다는 듯 웃었다.


“제가 아침 내내 병원에 가자고 했거든요. 하여튼 말도 더럽게 안 들으셔서…….”

“우리 간호사님과 하 비서님이 고생이네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해인이 제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 상진은 가슴이 뿌듯했다. 이 와중에 지훈의 표정만 실망이 가득했다.

이 불편한 것을 왜 또 해야 하는지…….

간단히 처치를 끝낸 간호사가 밖으로 나간 후 상진은 아까 가져온 쇼핑백을 해인에게 건넸다. 그 안에는 해인의 코트와 가방이 들어 있었다.

방금 전 옷 찾으러 갔다는 지훈의 말을 떠올린 해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전에 통화했어. 네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 한마디 했더니 바짝 졸아서 금방 가져다주겠다던데?”

“갖고 있었대요?”

“그건 아니고 지오의 집에 두고 왔다가 가져온 것으로 보였습니다.”

상진이 피식 웃으며 지훈을 대신해 말했다.


“형님이 지오를 찾아내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도 많이 놀란 것 같고, 지오가 스스로 잘못을 인정한 것에도 많이 당황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렇겠죠.”

공범이나 다름없으니 꽤나 초조할 것이다. 해인은 착잡한 심정으로 가방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핸드폰은 커진 상태로 있었고 지갑이나 신분증도 모두 그대로 있었다.


“가방과 옷을 돌려주는 CCTV는 제대로 확보했지?”

“그럼요. 카페 내부 미리 살피고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네 CCTV도 다 조사해서 수빈 씨와 형수님이 차를 타고 올 때부터 들어가는 장면까지 다 확보해 두었습니다.”

“그래. 잘했어. 일단 카페에서 옷 전해 주는 동영상만 수빈이 핸드폰으로 전송해 줘. 다음에 우리 해인이 만날 땐 무릎부터 꿇어야 할 거라고 메시지 보내 놓고.”

“알겠습니다.”

나름 복수의 시나리오가 차근차근 준비 중이었다. 지오가 무슨 이유로 수빈을 숨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훈은 그럴 이유가 없었다.

수빈이 드러나면 지오의 그녀인 해인까지 드러날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에 지금으로선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강제로 데리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면 CCTV의 증거가 오히려 해인에게 불리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때를 봐서 영상 증거로는 단지 수빈과 해인이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만 입증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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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과 대화를 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렇게 부사장실을 나와 계단으로 내려올 때였다.

비상구의 문을 열자마자 벽에 기대 서 있는 시커먼 물체와 마주했다. 우영이었다.


“아! 깜짝이야.”

“뭘 그렇게 놀래?”

“시커먼 게 앞에 서 있는데 그럼 안 놀라냐? 무슨 저승사자도 아니고.”

“네가 지은 죄가 큰가 보지. 따라오기나 해.”

우영이 제 검은 슈트를 한 번 바라보더니 그대로 해인을 지나쳐 계단을 올라갔다. 따라간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무작정 먼저 가고 있었다.

이번에도 옥상인가? 점심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가기 싫은 마음이 들면서도 이상하게 몸은 친구를 따라가고 있었다. 해인은 옥상에 도착하자마자 시큰둥하게 물었다.


“왜, 또.”

“설마 아니지?”

“응. 아니야.”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질문을 알아들을 리 없건만 해인은 곧바로 부정의 답을 했다. 그랬더니 우영이 알아들었다는 듯 곧장 수긍했다.


“그래. 네가 지오의 여자일 리가 없지. 지오가 나처럼 눈이 삔 것이 아니면.”

흠. 결과적으로는 지오와 우영, 더불어 지훈까지 눈이 삔 것으로 판명 났다. 그중에서도 지훈이 제일 중증이라는…….


“그것 물어보려고 올라오랬냐? 이 추위에?”

“네가 꼭 무슨 죄라도 지은 것처럼 앉아 있었잖아. 누가 보면 네가 지오의 여자인 줄 알겠어.”

“무슨 그런…….”

“나 퇴사한다.”

“……응?”

“퇴사한다고.”

마침 차가운 바람 한 줄기가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어쩌면 이미 예견된 일인지도 몰랐다. 해인은 당황스러운 마음을 최대한 감추었다. 우린 친구였고 앞으로도 친구여야 한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언……제?”

“이달까지만 있을 거야. 로스쿨 입학하려고.”

“그, 그건 잘 생각했네.”

“그래. 내려가자.”

스스로를 다독이려는 노력이 무색할 만큼 우영은 차분했다. 정말 딱 그 말만 하려고 올라온 것인지 우영은 순식간에 해인을 지나쳐 문 앞까지 다다랐다.

해인은 괜스레 얄미워진 친구의 등 뒤에 대고 외쳤다.


“난 또 뭐라고. 그 정도는 사무실에서 말해도 되잖아.”

“너 운동 좀 하라고. 체력 진짜 별로더라.”

우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만 살랑살랑 흔들어대고는 이내 모습을 감췄다.

친구의 그 손짓이 걱정 말라며 자신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게 한 걸음을 내디뎠지만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괜찮은 걸까. 친구를 위로하고 싶은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깊어 가는 이 겨울에도 친구의 마음만은 얼어붙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 * *

지훈이 자신을 차로 친 범인을 잡았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오후 늦게까지 이어진 기획 회의가 끝날 무렵이었다.

범인이 피시방에 다시 나타나 잠복 중이던 경찰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지훈은 회의가 끝남과 동시에 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이 전해 준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모 인터넷 사이트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메시지를 통해 사고를 사주한 사람과 알게 되었다고 했다.

연락은 오직 그 사이트의 쪽지로만 이루어졌고 사주한 사람의 얼굴을 보거나 만난 적은 없으며 아르바이트의 대가로 받는 돈도 퀵으로 받았다고도 했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의뢰인이 죽지 않게만 사람을 차로 치라고 했다는 점이었다. 마치 사고가 크게 나도 상관없다는 것으로 들렸다고 했다.

하지만 범인은 막상 사고를 내던 그 순간 겁이 나서 브레이크를 밟았다고 했다.

지훈은 즉시 조사실로 가서 그 남자를 직접 만났다. 남자는 20대로 보이는 평범한 인상이었다.

만나면 불같이 분노가 일어날 줄 알았는데 막상 그를 보니 외려 차분해졌다.

추워 보이는 가죽점퍼를 입고 정서불안처럼 다리를 떨고 있는 그가 너무 하찮아 보였다고나 할까.

염색한 붉은 머리를 닭 볏처럼 세운 모습도 가관이었다. 맞은 편에 앉아 곰곰이 그를 훑어보던 지훈이 차분히 물었다.


“그놈을 알 만한 어떤 단서 같은 것도 없어?”

“쪽지로만 연락해서 정말 모른다니까요.”

남자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딱히 반성의 모습 같은 것은 없어 보였다.


“뭐, 죄송합니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 제가 브레이크를 밟아서…….”

“닥쳐.”

지훈이 매섭게 남자의 말을 끊어 냈다.

그걸 고맙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었고, 저런 놈에게 자비를 베풀었다는 식의 말도 듣기 싫었다.


“처음 접근했던 날짜나 닉네임 같은 것도 정말 기억 못 해?”

“그게……, 한 이주 전인가, 닉네임이 F로 시작하는 것 같은데 영어도 길었고 숫자도 있고, 하여간 복잡해서 잘 기억은 안 납니다. 솔직히 돈을 받은 후엔 글들을 삭제하고 계정 탈퇴까지 해서 생각나는 게 별로 없습니다.”

대충 그 시기에 맞춰 가입을 했다거나 계정 탈퇴를 한 사람을 찾아서 조사를 해 보면 될 일이었다. 분명 그중에 안형준의 이름이 있을 것이다.

그가 다른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해 가입을 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범인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범인이 안형준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단순 사고도 아니고 사람을 사서 이런 일을 벌일 만한 이가 그놈이 아니라면 누구겠는가.

남자의 자백을 들은 경찰도 최근에 원한 관계를 산 사람이 없는지를 물었다.

지훈은 일단 안형준의 이름을 함구하며 은밀히 수사해 주기를 부탁했다.

* * *

먼저 퇴근한 해인은 초조히 지훈을 기다렸다.

범인이 잡혔다는 연락을 받으니 마음이 편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굳이 범인을 직접 만나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해인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떨렸다.

지훈에게도 생각이 있을 것이라 여기며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지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해인은 그를 보자마자 다급히 물었다.


“괜찮아요?”

“뭐가?”

“범인 만났다면서요.”

붉게 상기된 얼굴을 보며 지훈은 해인이 걱정했음을 알 수 있었다.

지훈은 대수롭지 않은 듯 웃으며 그녀를 안아 주었다.


“걱정했구나.”

“난 보기 싫거든요. 내 기억에 범인의 얼굴이 남는 게 싫어서.”

“그래. 보지 마. 그런 놈 만날 필요도 없어.”

“지훈 씨는 괜찮죠?”

“당연하지.”

평소와 다름없는 지훈을 보고서야 해인은 안심이 되었다. 솔직히 저 같으면 다리도 떨리고 입술도 떨릴 것 같았다.

혹시라도 각인이 되어 기억에 남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제 남자는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그런 강한 면모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밥은 먹고 기다린 거야?”

“지훈 씨는요?”

“나는 회의하면서 초밥 먹었지. 근데 좀 출출하네.”

“라면 같이 먹을까요?”

“그럴까?”

“기다려요. 내가 끓여 줄게요.”

“아니야. 내가 끓이고 싶어. 그 정도는 내가 할 수 있어.”

“피곤하잖아요. 다음에 하고 오늘은 내가 할게요.”

“아냐. 내가 정말 끓여 주고 싶어서 그래.”

지훈은 강제로 해인의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소파에 데려가 앉혔다.


“여기 가만있어. 정말 내가 해 보고 싶어서 그래.”

“그래요. 그럼. 라면은 거기 싱크대 서랍장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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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라면을 채우고 있는 물이 넘쳐 흐를 듯이 출렁였다.

집게를 든 지훈이 냄비에 있는 라면을 건져 해인의 그릇에 담아 주었다. 해인이 한 젓가락을 뜨고 오물오물 씹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어때?”

“맛있어요. 내 생애 제일 맛있는 라면이에요.”

“정말?”

“정말이요. 어떻게 했어요? 뭔가 색다른 맛인데?”

“다 나만의 비법이 있지. 비밀이니까 묻지 마.”

라면 하나에 대단한 비밀이 있을 리 없건만 지훈은 마치 극비라도 되는 듯 진실을 감추었다.

해인은 멈추지 않고 흡입하듯 라면을 먹어치웠다. 배도 고팠지만, 지훈에게 맛있게 먹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해 준 요리이니 고작 맛 따위로 이 순간의 감동을 폄하할 수는 없었다.


“잘 먹으니까 좋다.”

해인이 잘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지훈의 얼굴에 흐뭇한 만족감이 흘렀다.

저렇게 좋아하니 앞으로는 요리를 배워서 더 맛있는 음식을 해 줘야겠다며 당찬 결심도 해 보았다.


“근데 라면 먹으면 다음 코스가 뭔 줄은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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