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고 싶다면.
(83/92)
83.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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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고 싶다면.
2022.09.15.
아! 이런 전개를 예상했어야 했나.
해인은 답지 않게 순수해져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그건 연애 때나 해당하는 일이잖아요.”
“우리 아직 연애 중이란 거 잊었어?”
되묻는 지훈의 눈빛이 흥미롭게 타올랐다. 고소한 라면의 풍미는 여전히 식탁 위에서 후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라면은 연인들을 뜨거운 밤으로 이끄는 수식어와도 같았다.
서류정리를 했더라면 부부끼리 왜 이러냐고 한마디 해 줬을 법도 한데 지금은 그것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피곤해요. 오늘은.”
이러면 좀 통하려나.
“우리 해인이는 가만있어도 상관없어.”
애석하게도 그럴 일은 없었다.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입꼬리만 올려 웃는 웃음이 경탄을 금치 못할 만큼 사악했다.
이제 지훈이 끓여 주는 라면은 가급적 먹지 말아야겠다.
* * *
지훈은 깁스를 풀자마자 그동안 숙원했던 바를 이루었다.
서둘러 결혼 서류를 정리했고 그로써 두 사람은 다시 완전한 부부가 되었다. 때 이른 겨울 한파가 기승을 부리는 날씨였지만 감회에 젖은 지훈은 코트 하나로도 전혀 춥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지오의 사건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였다. 찔리는 것이 있었는지 수빈은 그 모든 일에 아무것도 모른 척 침묵하고 있었다.
지오 또한 여전히 침묵을 고수했다. 그는 자신이 좋아했던 여자를 밝힐 생각도 없고 더불어 자신을 폭행한 남자도 고소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했다.
물론 그 이후 지오는 언론에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뉴스는 멈추지 않고 의문에 의문을 더해 갔다.
한파가 한풀 꺾인 어느 날, 해인은 친구 소연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초저녁임에도 밥 대신 맥주를 선택한 친구는 주정 아닌 주정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럴 수는 없어.”
그도 그럴 것이 소연의 분노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어떻게 지오가 그럴 수 있어?”
“그, 그러니까.”
“지오도 남자니까 좋아하는 여자가 있을 수 있지. 근데 아무리 좋아도, 어떻게 여자를 데려다 집에다 가둘 수가 있어? 사람이, 사람에게 그런 짓을 했다는 것 자체를 난 이해할 수가 없다.”
지오를 좋아했던 만큼 큰 실망이 찾아왔을 것이다. 해인은 친구의 넋두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
“아무리 지오라도 아닌 건 아닌 거야. 와! 진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천천히 마셔. 안주도 먹으면서. 지오에게도 사정이 있었겠지.”
“사정 같은 소리 한다. 아무리 사정이 있다고 해도 지오는 이제 끝났어.”
“너는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그렇게 한 번에 손절이 가능해?”
“가능하지. 내가 뭐 지오를 사랑한 것도 아니고 그냥 노래가 좋고 이미지가 좋아서 좋아한 건데 인성이 그따위면 이제 끝난 거지. 다른 내막이 있다면 또 모를까.”
치킨으로 향하던 해인의 손이 멈칫했다. 다른 내막,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것이 있기는 했다.
공유할 수 없는 진실을 숨기며 해인은 씁쓸히 혀를 찼다.
“좀 안타깝긴 해. 실력이 아깝잖아. 목소리도 아깝고.”
“그럼 좋아하지는 말고 노래만 들어. 그렇다고 노래까지 안 들을 이유는 없잖아.”
“아니. 지오 노래가 나오면 앞으로는 내 귀를 씻을 거야. 근데 그 여자는 누구였을까. 일반인이었다는데.”
“일……반인?”
“응. 일반인. 대체 어떤 여자인데 지오가 그렇게나 좋아했을까. 지금도 봐 봐. 그 여자한테 피해갈까 봐 일절 말을 안 하잖아. 그걸 보면 지오가 또 완전히 나쁜 놈은 아니긴 한데…….”
해인은 죄인이 된 것처럼 몸이 움츠러들었다. 어리석음마저도 죄일 수 있으니 한동안은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에이. 알 게 뭐야. 내 코가 석 잔데. 나, 사실 오늘 팀장한테 엄청 까였거든. 아니 지가 보고서 수정본 말고 원본 들고 회의 가서는 왜 나한테 지랄이냐고.”
“그런 일이 있었어?”
“응. 진짜 내가 사직서를 팀장 얼굴에 던져 버리는 상상을 몇 번이나 하는지 몰라.”
친구의 주정이 직장인의 비애로 옮겨갔다.
해인은 차마 힘내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같이 술을 마시는 것이 위로의 전부였다. 한참 푸념을 쏟아 내던 소연이 별안간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우영이는 어떻게 된 거야?”
“우영이?”
“퇴사한다며. 로스쿨 입학한다던데?”
“아아! 들었구나.”
“우영이 변호사 되는 거 거의 극혐 수준 아니었어?”
“그랬긴 했지.”
“나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혹시 우영이 아버지가 우영이를 두들겨 패기라도 하셨을까?”
우영이 아직 퇴사를 한 건 아니었다. 그런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퇴사 이유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었다.
“너도 몰라?”
“무슨 생각이 있겠지. 알아서 잘할 거야. 근데 너 오늘 피곤하다고 술 조금만 마시고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냐?”
“그렇긴 한데, 마시다 보니 괜찮네. 오랜만에 만났는데 좀 더 있다 가자. 네 신랑이 너무 보고 싶어서 간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런 거 아니야.”
해인이 맥주잔을 부딪치며 가볍게 웃었다. 어차피 오늘은 지훈도 늦는다고 했다. 친구 잘 만나고 술도 잘 마시라며 응원까지 해 준 남편이었다.
우영이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아렸지만, 지훈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고 어느새 미소가 차오르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우영에게도 좋은 여자가 생길 것이라 믿고 싶었다.
이런 마음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
.
.
날이 흐려서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았다. 코트만 걸치고 있는지라 추위에 몸이 으스스 떨렸다.
해인은 소연과 헤어진 후 곧장 집으로 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지훈의 신발이 보였다. 통로를 지나자마자 주방에서 나오는 지훈과 마주쳤다.
“이제 와?”
“일찍 왔어요?”
“아냐. 나도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어. 아무도 없으니까 심심해서 따듯한 허브티 한잔 마시려고.”
그의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유리잔이 들려 있었다.
“마셔. 밖에 많이 춥지?”
“지훈 씨 마시려고 탔다면서요.”
“나는 또 한잔 타면 되지.”
“나 옷 갈아입고 나올 거니까 그때 타 줘요.”
“그래. 그럼.”
해인이 다시 나왔을 때 지훈은 들어올 때처럼 딱 맞춰서 주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얼굴엔 한없이 행복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뭐가 저렇게 좋을까 싶은 해인이 마주 웃으며 소파로 향했다. 연두색이 잘 우러난 허브차는 아직 뜨거웠다.
후후, 불어가며 한 모금을 넘기고 또 한 모금을 넘겼다. 덩달아 몸도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친구는 잘 만났어?”
“잘 만났어요.”
“좋았겠네. 오랜만에 만나서.”
“그렇긴 한데.”
“왜?”
“친구가 지오를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사실대로 말했어?”
“아뇨. 그럴 수는 없죠. 알면 많이 놀랄 거예요.”
당연히 놀라겠지. 지훈은 이마를 한껏 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지오 생각을 하면 마음에서 불이 나는 까닭에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
“허브차 향이 좋아요. 지훈 씨가 타 줘서 특별히 더 좋은 것 같아요. 아니. 지훈 씨가 옆에 있어서 향이 좋은 건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뭘요?”
“방금 예쁜 말 했잖아. 그런 거, 또 해 보라고.”
분위기를 가라앉히려고 한 말이었는데 기분이 좋았나 보다.
역시 이 남자는 단순해서 좋았다. 해인은 모른 척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허브 티를 후후 불었다.
그 모습을 사랑스럽단 표정으로 바라보는 지훈의 얼굴에 또다시 미소가 흘렀다.
“생일 선물 뭐 받고 싶어?”
아직 한참이나 남은 생일이지만 지훈의 질문을 받은 해인은 감회가 새로웠다. 생일 선물은 항상 묻지 않고 알아서 줬었는데…….
“특별히 받고 싶은 건 없는데.”
“그래도 생각해 봐. 해인이 원하는 것으로 사 주고 싶은데.”
“보통 선물은 깜짝 서프라이즈로 하지 않나요?”
“그런가? 그럼.”
“…….”
“내가 예전에 준 것들은 좋았어?”
“뭐, 그럭저럭.”
무난하게 좋았었다.
처음엔 보석이었던 것 같고, 그다음은 붉은색 슬립이었는데 주니까 그냥 감사히 받은 것이 전부였다. 그때는 그게 비서가 준비한 선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지훈이 직접 골랐다고 해서 약간 놀라기는 했었다.
“별로였나 보네.”
“그게 아니라…….”
변명하려던 해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럭저럭이라고 했으니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그보다는 주는 사람의 마음이 없어서 서운했던 건데.
“난 그때는 지훈 씨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냥 선물만 그렇게 달랑 오니까.”
“아! 미안.”
지훈이 재빨리 사과를 했다. 지난 이야기가 나오면 결국 할 말 없는 죄인이 되는 것을 어찌 몰랐을까.
“올해는 다를 거야. 온몸과 마음으로 선물을 전달해 줄 거야.”
“굳이 온몸으로 할 필요는…….”
“아니, 꼭 그래야겠어. 그래야 우리 해인이 가슴에 남아 있는 서운한 마음이 풀리지.”
“아직도 남아 있는 건 아닌데.”
“아니, 분명 남아 있어. 한 번씩 가슴을 콕콕 찌르는 말을 하거든.”
“그거야 지훈 씨가 찔리는 게 많아서 그런 거죠.”
“으윽.”
이어지는 책임 공방에 지훈은 결국 가슴을 움켜잡고 신음을 뱉었다. 빠져나가려 해도 빠져나갈 수 없는 죄인의 늪이 있는 것처럼 지난 과거에서는 도무지 자유로울 수가 없다.
왜 그땐 그렇게 아무것도 몰랐을까.
“너무 완벽했어.”
“뭐가요?”
“안 좋아하는 척 무심히 행동하는 모습이.”
“지금하고 딱히 다르지 않은데?”
“달라.”
지훈이 딱 잘라 말했다.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는데 어떻게 같을 수가 있나.
사실 그건 해인도 공감하는 바였다.
그땐 지금처럼 눈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으니까.
“맞아요. 그땐 이 눈이 이렇게 멋지게 반짝이는 줄 몰랐어요.”
또렷이 눈동자를 마주해 오며 뱉는 해인의 말에 지훈은 가슴이 떨렸다.
“더 해 봐.”
“뭘요?”
“아까처럼 예쁜 말 했잖아. 또 해 보라고.”
자꾸 예쁜 말을 해 보라는 지훈으로 인해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별말도 아닌데 그런 말이 뭐가 그렇게 듣고 싶다고 저렇게 애원을 할까.
솔직히 표현에 있어서는 지훈보다 인색하기는 한 것 같았다. 직진을 선포한 후로는 오히려 지훈의 사랑 표현이 훨씬 적극적이고 과감했었다.
“그 비슷한 뭔가라도 해 봐. 더 듣고 싶어.”
“뭘 자꾸 해 보라고.”
새침하게 대꾸하던 해인이 말끝을 흐렸다. 나름 표현을 많이 한 것 같은데 그가 느끼기엔 그렇지 못했던 건가.
유리잔에 투영된 허브차를 보던 해인이 힐끗 곁눈질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눈망울이 어찌나 간절하고 뜨거운지 얼굴이 타는 느낌이 들었다.
저렇게 보고 있는데 그냥 넘어갈 수도 없고.
무슨 말을 해 줄까 곰곰이 생각하다 옆으로 몸을 옮겨 그의 품에 안겨 버렸다.
지훈이 기다렸다는 어깨를 둘러 꼭 안아 주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온기를 느끼며 해인이 천천히 읊어 나갔다.
“이 남자는 감정을 깨닫는 데는 느리지만 깨달은 후부터는 다른 것은 보지 않으려 합니다. 저돌적이고 짐승처럼 달려들며 후퇴를 모르는 직진본능의 남자이기도 해요. 그러니 혹시라도 사랑을 들켰다면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세요.”
“흐음. 누구한테 하는 말이야?”
“잠자코 듣기나 해요.”
“알았어. 얼른 더 해 봐.”
“요리는 못하지만, 허브차는 잘 끓입니다. 커피도 잘 내리지만 라면은 물을 너무 많이 부어서 싱겁게 끓여 놓고는 소금과 고춧가루와 후춧가루로 간을 다시 맞춘답니다. 그래도 너무 나무라지 마시고 맛있게 먹어 주세요.”
“그, 그걸 알고 있었어?”
뜨끔해진 지훈의 두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그날의 일은 영원히 묻힐 것이라 장담하고 있었는데 어찌 이런 일이.
“고기가 먹고 싶으시면 미역국을 끓여 달라고 하세요. 그럼 고기에 눌려 압사당한 미역을 보게 될 거예요. 그래도 그냥 고기 먹는다 생각하고 드시면 됩니다. 고기 먹어서 손해 볼 건 없으니까.”
“그, 그건…….”
“눈빛이 뜨거워질 때면 조심하세요. 그럴 땐 단 둘이 있는 것은 비추입니다.”
“너무해.”
“까다로운 것 같지만 아무거나 잘 먹고 사랑하는 여자 앞에선 온순해지니 길들이기는 어렵지 않아요. 아! 물론 밤에는 짐승처럼 변하기도 하니까 조심하셔야 해요.”
그 말에 답이라도 하듯 지훈이 짐승처럼 거칠게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해인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고 싶다면…….”
지훈의 심장이 기대감으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