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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지오의 팬들이 널 가만둘까? (84/92)


84. 지오의 팬들이 널 가만둘까?
2022.09.18.



“비비탄 총을 준비하셔서 손들어, 라고 말하면, 으읍…….”

정작 중요한 말은 아직 못했는데 입술이 먹혔다. 부끄러우면 부끄럽다고 할 것이지 왜 갑자기 키스를 해 대는 걸까.

일단 좋으니 굳이 벗어나려는 발버둥을 하지 않고 키스에 몰입도를 높여 보았다.

가히 숨도 쉬기 힘들 만큼 휘몰아치더니 어느 순간 잠잠해졌다. 잠시 멀어진 입술 틈새로 그의 더운 숨이 터져 나왔다.


“예쁜 말 하라고 했더니…….”

“말하고 있잖아요. 예쁘고 좋은 거. 나는 그게 예쁘고 좋았는데.”

두 손 번쩍 들고 몸을 배배 꼬는 그 모습이 저한테는 무척 좋았었다.


“그건 그냥 해인이만의 추억으로 남겨 둬. 깊이깊이.”

“혼자 보기 진짜 아까웠어요. 지훈 씨 그때 진짜 귀여웠거든요.”

“잊어버려.”

딱히 흑역사까지는 아니지만 유쾌한 기억도 아니었다. 하필이면 다른 여자와 그런 사진이 찍혔다는 것 자체가 소름 끼치는 기억인지라 그와 관련된 모든 일을 잊고 싶었다.

그런데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에 이어지는 것이 하필이면 총 맞을 때의 일이라니, 그건 좀 아니지 않은가.


“그때 촬영도 같이 해야 했어. 두고두고 보고 싶은 장면인데.”

“키스나 더 할까?”

지훈은 애석해하는 해인을 음흉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눈빛이 너무 음흉한데요?”

“이런 건 촬영해도 돼.”

“내가 별로.”

“아까 키스할 때 보니까 이런 것 좋아하는 것 같던데, 몸과 말이 다르네?”

“내가 그랬나?”

몰입도를 높였던 그 순간을 떠올린 해인이 유쾌하게 웃었다. 그 상큼한 웃음을 덮치는 건 이번에도 지훈의 입술이었다.

즐길 건 다 즐기면서 시침을 떼는 모습이 상당히 애탔지만 그건 그것대로 사랑스러우니 필시 미친 것이 분명했다.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덮치며 테라스로 밀려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함박눈이었다.

지훈의 입술에서 살짝 벗어난 해인이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눈 와요.”

“그러든지 말든지.”

“나 눈 보고 싶어.”

“그걸 꼭 지금 봐야겠어?”

날도 추울 텐데 그걸 꼭 봐야 하나. 해마다 겨울이면 내리는 눈이 뭐 대수라고.

하지만 해인이 원한다면 만들어서라도 갖다 바쳐야겠지. 지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지훈은 곧장 드레스 룸으로 가서는 두툼한 롱패딩을 가지고 나와 해인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저는 여전히 검은색 티셔츠만 입은 상태였다.


“지훈 씨는 괜찮아요?”

“당연히 괜찮지.”

“그래도 추울 텐데.”

“이 정도 추위는 추위도 아니야.”

지훈이 해인의 손을 잡고 테라스로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느낀 감정은 더럽게, 춥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티끌의 티끌만큼이라도 내색할 수는 없었다.

테라스로 나온 해인이 손바닥을 펼치며 내리는 눈을 받아보았다. 손에 닿는 차갑고 보슬보슬한 감촉이 좋았다. 눈을 좋아해 이렇게 지훈과 둘이서 눈을 맞는 상상을 하곤 했었다.

그러나 그와 함께했던 겨울은 늘 춥고 외로웠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 상상은 그저 꿈처럼 먼일이었는데…….

해인은 새삼 지훈이 제 곁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날은 춥지만, 지훈으로 인해 어디선가 따스한 바람이 부는 것만 같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무슨 생각해?”

“왜요?”

“방금 웃었잖아.”

“어떤 멋진 남자 생각하니까 기분이 좋아서.”

“내 생각했구나.”

며칠 사이 자신감이 대단해진 남자를 바라보는 해인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나저나 이 남자도 추울 텐데…….

해인은 제 패딩 한쪽을 벗어서 지훈의 어깨로 휘감았다. 지훈은 해인과는 다른 이유로 그 패딩 안으로 들어왔고 해인의 몸을 찰싹 당겨 안았다.

순식간에 전해진 온기가 낮아졌던 체온을 올려 주는 것 같았다.


“수빈이 스케줄 알아냈어.”

“정말요? 언젠데요?”

“며칠 후 라면 광고 촬영 있다던데?”

“그래요?”

해인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이것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스케줄이 아닌가.


“뭘 하려는지 말할 수 있어?”

“아니요. 그냥 지켜보기나 해요. 그것보다 나, 필요한 게 있는데.”

“필요한 거?”

“일단 내가 준비할 거니까 나한테 어울리는지만 봐 줘요.”

지훈은 그 말의 뜻을 다음날이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
.
.

해인이 준비한 것은 해인에게 물론 무척이나 잘 어울렸고 심지어 멋있었다.

평소와는 아주 다른 그 모습에 지훈은 세차게 뛰는 가슴을 어찌하지 못했다.

뽀글거리는 갈색 가발과 검은 선글라스까지 착용한 해인이 서초동 스튜디오로 향했다. 바로 수빈이 광고 촬영을 하고 있는 곳이었다.

신분 노출을 피하고자 준비한 것이지만, 신분이 드러난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해인의 각오는 그만큼 대단했다.

지훈은 상진을 통해 미리 광고 회사와 광고를 맡은 감독에게 연락을 해 두었다. 혹시 불의의 사고가 생기면 손해배상을 해 줄 것이며 신온의 광고를 수주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그들로선 영문을 모를 일이었지만 이게 무슨 횡재냐 싶기도 했다.


“형님 말씀대로 불의의 사고가 생기면 손해배상 해 주겠다고 했는데 사고가 심각한 수준이면 어떡합니까.”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우리 해인이 뭘 할까 그것만 기대하고 있어.”

해인과 같은 검은색 선글라스를 쓴 지훈과 상진의 얼굴이 한껏 상기되었다.

한참 촬영이 진행 중이라 무작정 끼어들 수는 없어 일단 입구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렇긴 하죠. 하여간 돈이 많아서 좋겠습니다.”

“걱정 마. 너한테 이런 일 생겨도 아낌없이 쓸 거니까.”

지훈이 무심히 던진 말에 상진이 감격에 찬 표정을 지었다.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 아! 그렇지는 않다.

무심한 듯 잘 챙겨 주는 아주 좋은 상사였다. 윤지훈이라는 남자는.

심지어 이 현장 스태프들에게 백화점 상품권까지 챙겨 주며 섬세히 배려해 주고 있지 않은가.

감동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며 눈시울까지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역시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

“닥치고 앞이나 봐라.”

“넵.”

상진이 각을 잡고 대답하던 그때였다.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잠시 화장실에 갔던 해인이 돌아왔다.

이제 준비되었다는 듯 해인의 얼굴로 비장함이 흘렀다. 그 단단한 눈동자를 마주한 지훈이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상진이 감독으로 보이는 사람과 눈빛을 교환했다.


“잠깐 쉬어가겠습니다.”

감독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촬영이 잠시 중단되었다.

해인은 거침없이 수빈에게로 향했고, 직전까지 그녀가 열심히 라면을 먹었던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앉은 채로 코디에게 메이크업을 수정받던 수빈이 뭔가 싶어 바라보았다.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익숙지 않은 여자.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건가? 아무리 그렇다고 제가 라면을 먹은 자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다니, 너무 무례하지 않은가.


“뭐예요?”

수빈이 눈을 추켜 뜨며 삐딱하게 물었다. 본의 아니게 올려다본 모양새가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해인은 내려다보는 이 자세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넌 참 편해서 좋겠다. 누군 매장당하기 직전이던데…….”

“……!”

이 목소리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으며 선글라스의 여자를 올려다보던 수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당황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대각선 방향의 지훈과 비서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기까지 했다.

선글라스를 쓰긴 했지만,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지훈을 모를 수는 없었다. 고개를 돌린 수빈이 초조한 눈빛으로 해인을 올려다보았다.


“여길 어떻게…….”

“어떻게 오긴. 네 스케줄 입수해서 연차 내고 왔지.”

설마 그 일을 까발리러 온 것인가. 지오의 여자로 밝혀지는 건 해인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니 내내 침묵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부러 여기까지 찾아온 것을 보면 그럴 생각이 없다는 뜻 같기도 했다.

수빈이 할 수 있는 일은 감독에게 도움을 구하는 일뿐이었다.


“감독님. 촬영 중에 외부인이 이렇게 와도 되는 거예요? 당장 쫓아내지 않고 뭘 해요?”

하지만 감독은 수빈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그는 자리를 떠난 뒤였고 다른 스태프들에겐 어떤 일이 생겨도 지켜만 보라는 지시를 내린 후였다.

감독이 보이지 않자 수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 순간 해인이 두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눌러 주저앉혔다.

털썩. 수빈은 맥없이 다시 의자에 앉아야 했다.


“너, 한마디만 더 하면 여기서…….”

거침없이 말하던 해인이 몸을 숙여 수빈의 귀에 대고 조곤조곤 속삭였다.


“네가 교사해 떠들썩한 그 사건. 지오, 이름도 밝힌다.”

지오, 라는 이름을 들음과 동시에 수빈이 얼어붙었다.

해인이 다시 멀어지며 이번엔 제대로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알지? 그 일 밝혀지면 넌 거의 매장 수준이라는 거.”

매장 수준이라는 말을 들은 스태프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다들 뭔가 있는 듯한 기대감으로 은근히 수군거리며 의문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잠시 뜸을 들인 해인이 다시 수빈의 귀에 대고 속삭여 주었다.


“지오의 팬들이 널 가만둘까?”

수빈의 눈동자가 거침없이 흔들렸다. 사실 그녀도 두려웠다.

자신이 꾸민 일이 밝혀졌을 때 제게 닥쳐올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건 비단 지오의 팬들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대로 영영 연예계를 떠나야 할지도 몰랐다.

회사 일을 하는 것보다는 한강의 딸이라는 후광을 등에 업고 연예인을 하는 것이 좋았었다.

다른 연예인들을 만나며 그냥 즐기며 사는 삶이 훨씬 편했는데……. 기껏 쌓아 올린 공든 탑이 지오 때문에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렇게 바보 같은 남자일 줄 누가 알았겠나. 아무 일도 없었다고 잡아떼도 시원찮을 판에.


“대체 뭘 바라고 그런 짓을 한 거야?”

다시 뒤로 물러난 해인이 이번엔 제대로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수빈은 뻔뻔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뭘?”

“그래. 그렇게 모른 척해야겠지. 근데 말이야. 설마, 네가 꾸민 일이 진짜로 성공할 줄 알았어? 그건 아닐 텐데. 혹시 몰카나 사진, 뭐 그런 거라도 준비했니?”

“아니거든? 왜 그런 억측을 해?”

“있나 보네. 하여간 멍청하긴. 그런 게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이젠 너한테 엄청 불리한 상황이 되었잖아. 그렇지?”

두 사람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주변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다들 당황하는 눈치였으나 말리러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흥미로워하는 듯했다.

그런 분위기를 느낀 수빈이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듯 목청을 높였다.


“그게 드러나면 너도 골치 아프잖아. 그래서 선글라스까지 쓰고 온 거 아니야?”

“조용히 살고 싶기는 해. 근데 밝혀진다면 또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내가 잘못한 건 아니니까. 하지만 넌 다를걸?”

“그건…….”

“한번 밝혀 볼까? 네가 이 모든 일을 꾸몄고, 바로 그 남자를 추락시킨 장본인이라고.”

해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설마 저 말의 뜻을 알아듣는 사람은 없겠지 생각하며 보는데 모든 스태프들이 저만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표정 관리 좀 해. 다들 널 보고 있는데…….”

“내 표, 표정이 뭐 어때서?”

“딱 죄지은 사람 표정이거든. 그러게 왜 그런 짓을 벌였어? 내 남자가, 아니 내 남편이 그렇게 탐이 났어?”

“무슨 그런 말을…….”

수빈의 시선이 대각선 위치에 있는 지훈에게로 향했다. 눈빛을 마주하지는 않았지만, 모멸감이 밀려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수빈의 시선을 따라 스태프들의 시선도 움직였다. 사실 그들은 저 멋진 아우라를 뿜어내는 사람이 왜 여기 있는지 궁금했더랬다.

무엇보다 저 선글라스의 남자가 백화점 상품권을 증정한 사람이라고 하니 더욱 빛나 보일 뿐이었다.

여자 스태프들은 남자의 눈동자가 보이지 않음에도 그가 빼어나게 잘생겼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 남편이 나 만나면 무릎부터 꿇어야 한다고 했다던데, 자세가 영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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