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 용의자의 신원. (85/92)


85. 용의자의 신원.
2022.09.22.


일이 이쯤 되니 수빈도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이러다가는 마치 유부남을 꼬여내려 한, 그런 여자로 낙인찍히는 거 아닌가.


“야! 나 한강 딸이야! 이게 어디서…….”

수빈이 큰소리로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설 때였다. 해인이 다시 어깨를 눌러 강제로 주저앉혔다.

이번에도 수빈은 꼼짝 못 하고 다시 앉아야 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해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아래 있던 양동이를 들어 올렸다. 양동이에는 그녀가 라면을 먹고 다시 뱉은 것들을 모아 놓은 것이 들어 있었다.

다들 설마 하는 그 순간, 설마라고 생각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해인이 그 오물 쓰레기를 수빈의 머리에 부어 버린 것이다.


“아아악.”

놀란 수빈이 좀비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토사물에 가까운 그것이 제 머리에 부어졌으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 이…….”

더러운 걸 어떻게 내 고귀한 몸에……. 수빈은 입술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만 같아 당장이라도 씻어야 했지만, 이 꼴로 대체 어디를 간단 말인가.


“굿.”

“나이스.”

멀리서 지켜보던 지훈과 상진의 감탄사가 이어졌다.


  


“으으.”

“세상에나.”

“맙소사.”

숨죽여 보던 스텝들도 저마다 외마디 탄성을 내질렀다.

그들은 이미 관객이나 마찬가지였다.


“감히, 가……암히!”

수빈의 새된 목소리가 경련을 일으키듯 터져 나왔다.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모멸감이었다.

무려 그녀는 한강의 딸이었으니까.

해인이 보기엔 그 모든 것이 가소로울 뿐이었지만.


“감히? 너, 진짜 웃기다. 한강 딸이면 범죄를 저질러도 되는 거야? 너네 한강은 그러니? 종류는 달라도 네가 한 짓이 꽃뱀들이 하는 그거랑 뭐가 달라?”

“뭐? 꼬옻……뱀?”

“응. 꽃뱀.”

기함하는 수빈을 향해 해인이 쐐기를 박듯 말했다.

지금껏 당한 일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동안은 고의가 아니었기에 봐주었지만, 이번 일은 작정하고 벌인 짓이 아닌가.

법적 처벌은 못하더라도 본인이 한 짓이 얼마나 추악한 짓인지는 분명히 알려야 했다.


“너, 나한테 이러고도 괜찮을 줄 알아?”

“네가 뭔데. 우리 어머님이 그랬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어디서 까부냐고. 그래. 네 눈엔 내가 좀 만만할 수 있겠다. 근데 내 남편이나 어머님처럼 나도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거든. 너, 사람 잘못 봤어.”

해인의 말과 함께 지훈이 보란 듯이 한 걸음을 앞으로 나왔다. 덩달아 상진이 반걸음을 나오며 지훈의 뒤에 버티고 섰다.

지켜보는 사람들에겐 이 모든 것이 흥미진진했다.

그들에겐 그저 수빈이 저 선글라스 여자의 남편에게 집적댄 것으로 보이는 중이었다.

누가 뭐래도 꽃뱀은 심판받아 마땅하다고 모두들 생각하는 그때였다. 화가 난 수빈이 해인의 머리채를 잡아채는 것이 아닌가.

엉성하게 머리에 씌워 놓기만 한 가발이 벗겨지고 탐스럽고 긴 해인의 생머리가 찰랑거렸다.

머리채가 잡혀야 하는데 가발만 딸려 올라오자 수빈은 더 약이 올랐다. 울분에 찬 수빈이 가발을 던지고 다시 해인의 뺨을 치려 했다.

하지만 더 빠른 해인의 손이 수빈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수빈이 손을 빼내려 했으나 해인의 악력을 당해내지 못했다.


“경험상, 내가 뺨 맞는 순간을 캐치해 내는 능력이 좀 탁월하거든.”

해인이 피식거리며 수빈을 비웃었다.

놀라 앞으로 나가려던 지훈의 발걸음이 멎었다. 그와 함께 덩달아 나가려 했던 상진의 걸음도 멈추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해인은 거칠게 수빈을 내동댕이쳤다. 수빈의 몸이 뒤로 밀려나며 의자와 함께 나뒹굴어 졌다.

둔탁한 그 소리와 함께 대각선 위치에서 낭랑한 소리가 들려왔다.


“굿 샷.”

“나이스 샷.”

이번에도 지훈과 상진이었다.

수빈은 차마 몸을 일으킬 생각도 하지 못할 만큼 넋이 나갔다.


“네가 날 속이면서 한 짓을 생각하면 저 오물로도 부족해. 그러니까 그렇게 억울한 표정 짓지 마.”

해인이 냉정하게 내뱉으며 손을 털었다.

혹시라도 묻었을 구정물 때문이었다.

이제 되었다 싶은 해인이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검은 슈트를 입은 몇몇이 해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확히는 보호였다.

수빈이 미쳐 날뛰기 일보 직전이라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어느새 정신을 수습한 수빈이 금방이라도 해인을 향해 달려들 것처럼 남자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섰다.


“너 이리 안 와? 왜! 이젠 내가 무서워?”

수빈의 앞을 가로막은 남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수빈의 발악은 거세어졌다.


“너, 오늘 일 반드시 후회할 거야. 우리 아빠가 너 가만 안 둘 거라고.”

해인은 자신을 가로막고 서 있는 남자들 사이를 잠시 비집고 들어섰다.

마지막 말 만큼은 수빈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해 주고 싶었다.


“우리 어머님 말씀대로 조용히 있어. 인터넷에 네 이름 도배되고 싶지 않으면. 이번 일이 이슈가 되면 넌 거의 꽃뱀 취급을 받을 거야. 그러니까 숨죽이면서 살아. 혹시나 그 일이 세상에 알려질까 두려워하면서.”

속이 다 시원하다, 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해인은 만족스럽게 돌아섰다.

돌아선 그곳에 훤칠하고 든든하게 버티고 서 있는 제 남자가 있었다. 선글라스에 가려져 눈동자는 제대로 볼 수 없지만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는 입술을 보니 웃고 있는 듯했다.


“가요.”

“충분해? 부족하면 더 하지.”

“아니요. 충분하지 않지만 나 스스로를 위해서 이만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럼 내가 할까? 분부만 내려 주시면.”

“됐어요. 가요.”

해인이 간결하게 말하며 지훈을 지나쳐 갔다.

지훈은 살짝 아쉬웠지만, 분부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해인과 그 뒤를 따르는 지훈의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시각적인 효과가 대단했다.

그렇기에 지켜보던 이들은 두 사람의 모습이 현실의 부부가 아닌 듯 여겨졌다.

검은 슈트를 입은 남자들에게 가로막힌 수빈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거기 서! 당장 안 서? 내가 너희들 싹 다 고소할 거야. 감히 나를 뭐로 보고.”

혼자만의 광기나 다름없었다. 응답하는 이도 없었고 말리는 이도 없었다.

사실 수빈 또한 해인과 지훈이 멈추는 일은 절대 원치 않고 있었다.

상황이 종료되어서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뿐이고, 여기서 더는 밀리는 느낌을 받고 싶지 않아 고래고래 악을 지를 뿐이었으니.

해인과 지훈이 문 너머로 사라졌을 때 검은 옷을 입은 장정들도 수빈에게서 돌아섰다.

그렇게 상황은 종료되었다.

더러워진 몰골로 더는 촬영을 이어갈 수 없었던 수빈은 도망치듯 스튜디오를 벗어났다.

촬영 일정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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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차 안에서 해인은 간만에 아주 환하게 웃었다.

상진은 우리 형수님 진짜 멋있었다며 운전을 하면서도 시종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찬사를 이어 갔다.


“형수님. 진짜 멋지십니다. 최고였습니다.”

“좋게 봐 주셔서 고마워요. 하 비서님.”

“좋은 구경 해서 제가 감사하죠.”

백화점에서의 일이 오버랩되며 문득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지훈이 속도 모르고 한술을 더 뜨는 것이 아닌가.


“우리 해인이는 원래 멋졌거든. 원래 최고였고.”

“그럼요. 그럼요. 저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사람 밀어내는 것도 그렇게 우아할 수가 있냐.”

“카리스마는 또 어떻고요.”

“한마디 한마디가 폐부를 관통하는 것 같더라고.”

“저는 뇌리를 쪼개는 줄 알았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인 줄 알았어.”

“천만은 족히, 아니 삼천만 정도는 흥행할 것 같습니다.”

“이참에 영화사 하나 만들까?”

“좋은 생각입니다. 형님.”

더 무슨 말이 나올까 봐 해인이 지훈의 입을 틀어막았다.

지훈은 해인의 그 손을 낼름 핥아 버렸다.


“아! 간지러워.”

“어떻게 손가락도 달아?”

“지훈 씨 이제 그만 해요.”

“이제 시작인데?”

이런 팔불출 남자를 보았나.

그만하라는 듯 고개를 저은 해인이 얼굴을 붉히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저를 바라보는 지훈의 눈동자가 너무 뜨거웠다. 차라리 그가 운전하는 차에 오를 때가 더 편했다. 그땐 적어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얼굴을 쳐다보지는 않았으니까.

눈빛이 어찌나 그윽한지 금방이라도 키스를 퍼부을 것 같았다.

창밖을 보며 마음을 진정하려 했는데 어느새 고개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지훈이 제 얼굴을 잡아 돌린 까닭이었다.


“왜요?”

“너무 사랑스러워서.”

“지훈 씨?”

“응?”

“앞에 하 비서님 계세요.”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형수님. 저는 지금부터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이럴 땐 하 비서도 정말 눈치가 꽝이었다.


“없는 사람이라는데?”

해인이 미간을 찡그리며 정신 좀 차리라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픽 웃은 지훈이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하 비서. 너무 흥분하지 말고, 침착해. 침착. 내일 아침에 혹시 무슨 기사가 났는지 잘 살피고.”

“걱정 마세요. 올라오는 족족 다 내려가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백화점 상품권까지 돌렸는데 설마 무슨 일이 있을까요. 거기 있는 분들도 다 정의의 심판이 내렸다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

“혹시 모르잖아. 수빈이 그것이 어떻게 움직일지……. 워낙 개념 없이 행동하니까 그래도 잘 살펴봐.”

“쉽게 나서지는 못할 겁니다. 지은 죄가 있으니까. 한강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사정을 알고 나면 오히려 더 감추고 싶지 않을까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잘 주시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부탁한다.”

지훈은 상진에게 지시를 내릴 때만 침착했다. 집에 들어왔어도 그는 여전한 흥분에 취해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해인의 손을 제 가슴에 가져다 대고는 가슴이 벌렁거려서 미치겠단다.


“만져 봐. 장난 아니지?”

딱히 벌렁거리진 않는 것 같은데…….


“그냥 평범한데요? 항상 뛰는 것처럼.”

“아냐. 평소보다는 열 배나 빨리 뛰잖아. 잘 느껴 봐.”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해요.”

“오늘 진짜 멋진 영화 한 편 본 것 같아.”

“아까부터 진짜 왜 이래요? 꼭 나 놀리는 것 같아.”

“놀리는 거 아니야. 내 눈빛 보면 몰라? 나는 지금 이백 퍼센트 진심이라고. 게다가 그 여주가 너무 멋져서 오늘은 쉽게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나, 이러다 폭력적인 여자라고 소문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폭력이 아니라 정당방어라고 해야지. 그것이 먼저 머리채 잡았잖아.”

“그런가요?”

“그렇지.”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살면서 사람을 때릴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어쩌다 보니 동생도 때리고 다른 여자도 밀어서 넘어뜨렸다.

물론 두 여자 모두 제 머리채를 먼저 잡았으니 지훈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좀 쉬든지 해. 저녁 먹으려면 한참 있어야 하니까. 같이 나가서 먹을까?”

“아뇨. 그냥 쉴래요. 나중에 시켜서 먹든지 해요.”

“그래. 그럼.”

쉰다고 했지만, 이 색다른 하루가 사실은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휘트니스 클럽에 운동하러 간다는 지훈을 따라가 함께 운동을 했다. 땀까지 빼고 나니 컨디션은 오히려 좋아졌다.

특별한 하루였고 꽤 마음에 드는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 * *

다음날. 상진의 말대로 인터넷에는 어떤 기사도 실리지 않았다.

찔리는 부분이 많았든지 아니면 여전히 연예인으로 살 마음이 있는 것인지, 수빈은 그 치욕을 당하고도 잠잠히 있었다.

상진은 그 모든 것이 지훈의 상품권 덕분일 것이라 했다.

뜬 소문처럼 모 재벌 집 귀한 딸이 먹다 버린 라면을 뒤집어썼다는 말들이 돌기는 했다. 하지만 한강의 딸을 먹잇감 삼아 함부로 기사를 옮기기엔 기자들도 난감한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도록 그 일은 그저 은근한 풍문으로만 회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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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을 맞이해 다양한 행사와 회의가 이어졌다. 기획 회의를 막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가던 지훈은 드디어 경찰에게서 범인의 신분을 알아냈다는 전화를 받았다.

사이트의 가입자는 무료 급식소의 한 노숙자였으며 그는 얼마 전 자신의 신분증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경찰은 전문인력을 동원해 그 명의자의 사이트 가입과 탈퇴 날짜를 파악했고 아이피 추적을 통해 컴퓨터를 사용한 위치를 확인했다.

그렇게 그가 강남의 모 PC방에서 그런 일들을 행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어 CCTV까지 확인했지만 모자를 깊이 눌러써 용의자의 신원을 밝혀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집요한 추적 끝에 그의 신분은 결국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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