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생일 이벤트는 어렵다.
(86/92)
86. 생일 이벤트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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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생일 이벤트는 어렵다.
2022.09.25.
주변 CCTV까지 동원해 그가 탑승한 차량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차량 번호를 식별한 결과, 범인은 안형준으로 밝혀졌다.
지훈은 직접 경찰서로 가서 그를 만났다.
범죄자이니 나름 수갑도 차고 행색도 초라한 줄 알았는데, 번드러지게 양복을 입고 얼굴도 말끔했다.
게다가 옆엔 변호사까지 있었다. 그런 중죄를 저지르고도 불구속 수사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참담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수사관과 변호사를 내보낸 지훈이 조사실에서 그와 단둘이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았다.
“꼴 좋다. 안형준.”
“다리라도 부러졌으면 좋았을 것을.”
“지금 그 말은 수사에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겠냐?”
“대놓고 사람 때리는 건 괜찮고?”
형준이 지지 않고 빈정거렸다. 그는 지훈이 여기 찾아온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쩌다 제 죄가 들통나긴 했지만, 저놈에겐 충분히 그럴 만했다. 자신을 모욕하고 제게서 해인을 빼앗아간 놈이지 않은가.
“맞을 짓을 어지간히 했어야지. 네가 우리 해인이 손을 잡았을 때 그 손목을 꺾었어야 했는데, 그게 아쉬워.”
“나도 마찬가지야. 넌 어디든 부러졌어야 했어.”
일말의 반성도 없는 뻔뻔한 모습에 지훈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 순간 이곳에 오기 전 해인이 한 말이 떠올랐다.
‘가서 때리지 말아요. 안형준 씨는 어차피 법적 처벌을 받을 거니까 그걸로 만족했으면 해요.’
지훈은 애써 분을 삭이며 가소롭다는 듯 웃어 주었다.
“우리 해인이가 관용을 베풀라 하더군. 그래서 봐주는 거야. 안 그럼 넌 내 손에 죽었어.”
관용이라는 단어에 형준의 낯빛이 붉게 변했다.
그런 것 따위 필요 없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저도 모르게 명치끝이 저렸다.
이미 남의 여자임에도 여전히 제 마음에 걸리적거리는 그 불편함이 몹시도 싫었다.
“꺼져. 내 눈앞에서 지금 당장.”
더 이상 지훈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누가 봐도 자신은 패배자였다.
그것을 가장 현실적으로 자각시키는 것은 바로 눈앞의 윤지훈이었다.
“나도 더 이상 너 같은 거랑 말 섞고 싶지 않아. 마지막으로 이것 한 가지만 기억해.”
“…….”
“무엇이든 우리 해인이를 괴롭게 하는 짓은 하지 마.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니까. 진짜 마지막 경고야.”
매섭게 쏘아붙인 지훈이 더 볼 일 없다는 듯 자리를 떴다.
홀로 남은 형준은 피가 터지도록 제 입술을 깨물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한 여자를 좋아했을 뿐인데…….
내가 당했던 고통만큼이나 저들도 고통당하기를 바랐다. 제게 있어 옳고 그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도 똑같이 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또한 아무 소득도 없이 끝나 버렸다.
형준은 비참함을 느껴야 했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고 그 피가 입안을 적셨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 * *
“만나고 왔어요?”
“응.”
퇴근 후 먼저 집으로 돌아와 기다리던 해인이 초조한 듯 물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있었을까 걱정스럽게 보는 그녀를 향해 지훈은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었어.”
“그래요.”
수빈과는 달리 안형준은 매일 지면을 채우며 안성 모직의 이미지를 깎아 먹는 일등 공신이 되어 있었다.
그로 인해 안성 모직은 범죄기업이라는 낙인이 찍히며 불매운동으로까지 이어질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형준은 어차피 법적 처벌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고, 그것이 가볍든 무겁든 그의 도덕성엔 치명적인 결점이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굳이 지훈이 또다시 폭력을 쓰는 것은 원치 않는 일이었다.
“괜찮아?”
“왜요?”
“무슨 걱정하나 싶어서. 얼굴이 별로야.”
“좋은 일은 아니었잖아요. 그동안 일이 너무 많아서.”
해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훈이 그녀를 제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앞으로는 힘든 일 없을 거야. 우린 이제 행복해질 일만 남았어.”
“그래야죠.”
지훈의 가슴에 안겨 해인은 잠잠히 웃었다.
“그리고 이젠 우리 이렇게 같이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난 너무 행복해요.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을 만큼.”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자꾸 내가 할 말 가로채지 마.”
지훈은 감격을 누르며 에둘러 말했다. 좋은 말, 격려의 말은 무조건 자신이 했으면 싶었다.
해인을 보호하고 지켜 주는 것도 자신이었으면 싶었다.
“아무나 하면 어때요.”
“그래도.”
“그럼 어서 해 봐요.”
“응?”
“어서 하라고요.”
“…….”
“…….”
“아, 그래, 그러니까……, 이제 우리 이렇게 같이 있으니까 난 그것만으로 행복해.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을 만큼.”
“푸흐흐. 사람이 좀 창의적이어야지, 그걸 그대로 따라 하냐.”
지훈의 가슴에서 빠져나온 해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한바탕 웃고 나니 문득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배고프죠?”
“응. 맛있는 거 해 놓는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었어. 오늘 요리는 뭐야? 냄새로는 뭔지 모르겠어.”
“돼지목살 김치찜. 저번에 잘 먹는 것 같아서 한 번 더 했어요.”
“우와. 그거 정말 맛있던데. 이번에도 해인이가 손으로 김치 찢어 줄 거야?”
“오케이이.”
해인이 활짝 웃으며 먼저 주방으로 향했다.
인터넷으로 레시피를 찾아 검색하던 중 알게 된 요리가 바로 목살 김치찜이었다. 묵은김치만 맛있다면 딱히 솜씨가 필요 없는 요리였다.
묵은김치는 우영의 집에서 나올 때 은하 이모가 잔뜩 챙겨 주셔서 아직 많이 있었다.
다행히 지훈이 그 요리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체면을 구기지 않을 수 있었다.
.
.
.
“어서 올려 줘.”
숟가락 위에 고기 한 점을 올리고 기다리던 지훈이 해인을 재촉했다.
이 남자는 가끔 아이처럼 굴 때가 있는데, 또 그게 귀여워서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었다. 해인이 김치를 찢어서 숟가락 위에 올려 주었다.
“고기 없이 김치만 밥에 싸서 먹어도 맛있어요.”
“응. 이렇게 저렇게 다 먹어 볼 거야.”
오물오물 고기를 씹는 입이 참 귀엽고 사랑스러운 남자였다.
“해인이도 먹어. 설마 내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른 거야?”
“아니요. 전혀요.”
그럴 리가. 해인이 고개까지 저어가며 강력히 부인했다.
내 밥은 내가 챙겨 먹어야지.
“그래. 그럼 얼른 먹어.”
고기 한 번, 김치 한 번. 흰쌀밥에 함께 먹는 맛이 일품이었다.
“근데 지훈 씨는 군대 어디로 갔다 왔어요?”
“으음? 여태 그것도 몰랐어?”
“저기, 뭘 잘 모르시나 본데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거든요.”
“아, 그래. 그냥 일반 육군 다녀왔어.”
“그래요? 지훈 씨 체격만 보면 딱 특수부대 나온 사람 같은데.”
“그런 곳에서 날 차출하려고 하긴 했었지. 근데 내가 싫다고 했어. 난 군대 체질이 아닌 것 같아서.”
차출 제안을 받은 적이 없어도 있어야 했다. 지금 이 상황에선.
지훈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안에 들어온 목살을 잘근 씹었다. 일반병이라서 혹시나 실망한 건 아니겠지.
대한민국 육군이 얼마나 위대한데.
“왜요? 멋있을 것 같은데. 지훈 씨 군복 입은 사진 보고 싶다. 혹시 있어요?”
“없는 것 같은데…….”
누가 사진 찍는다고 해서 몇 번 포즈를 취한 것 같기는 한데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이제라도 입고 찍어야 하나. 힐끗 해인의 표정을 보니 실망한 표정인 것 같기도 했다.
“없으면 어쩔 수 없죠. 식기 전에 얼른 먹어요.”
큰 미련 없이 먹는 것으로 다시 화제가 전환되었다. 지훈은 입안으로 음식을 넘기면서도 처음처럼 맛을 온전히 음미하지 못했다.
* * *
“그냥 1년 전처럼 선물만 달랑 전해 주시지 그러십니까?”
1분 전까지 상진은 지훈과 머리를 맞대고 앉아 거창한 이벤트를 계획하고 있었다.
자동차 트렁크에 풍선과 장미를 숨겨 놓는다든가 케이크에 보석을 넣는다든가 하는 뭐 그런 것들로.
듣다 못한 지훈이 한마디를 했다.
그건 이미 오래전부터 남용되어 온 흔해 빠진 이벤트라고.
그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빠진 상진이 불쑥 비아냥거린 것이다.
“1년 전과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
“살짝 어이가 없어서 말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이벤트를 기획하기가 뭐 그렇게 쉬운 일인지 아십니까. 새로운 게 얼마나 어려운데…….”
새로운 것이 어렵다는 것은 지훈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하지만 상진은 이미 방향성에서부터 어긋나 있었다. 머리 하나 보태면 좀 더 쉬운 줄 알았더니 오히려 배가 산으로 가는 격이 되어 버렸다.
“해인이 성격은 내가 잘 알아.”
“어떤 성격이요?”
“사람들 많은 데서 한다거나 요란한 건 아마도 싫어할 거야.”
“네. 형수님이라면 그러……시겠죠.”
멋진 이벤트에만 신경을 쓰느라 이벤트를 받게 될 당사자의 성격을 분석하는 것은 뒷전이었다.
생각해 보니 지훈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이벤트의 속성이 대개 요란하고 거창하긴 한데. 조용히, 그렇지만 멋진 이벤트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우리 해인이는 그냥 조용한 걸 원할 것 같은데…….”
“그럼 이벤트라고 할 것도 없겠네요.”
“그러니까.”
이렇게 허탈할 때가 다 있나. 제법 머리를 굴리던 상진은 기가 다 빠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이후 처음 맞는 생일이지 않은가. 말은 작년처럼 똑같이 하라고 내뱉었지만, 그것은 진심이 아니었다.
“요란하지 않고 소리 없이 강한 뭔가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그래. 머리 좀 더 굴려 봐.”
“그 머리를 왜 제가…….”
굴려야 합니까, 라는 말을 입에 머금고 상진은 시름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실상 전적인 자발적 동참이었다.
지훈이 ‘우리 해인이 생일 이벤트 해 주고 싶은데 뭐, 그럴듯한 것 없냐.’ 고 물었을 때 내심 기꺼웠고 뿌듯했다.
이벤트를 받고 기뻐하실 형수님의 모습에.
물론 그땐 그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일지 몰랐었다.
“너 혹시 군복 있냐?”
“…….”
갑자기 웬 군복일까.
상진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히터를 너무 세게 틀었는지 차 안의 공기가 무척이나 덥게 느껴졌다.
지훈은 잠깐 창문을 열어 찬바람을 맞았다. 춥다기보다는 머리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생각해 보면 해인에게 가장 큰 선물은 아마도 우리의 아이일 것이다.
생일 이전에 찾아와 주었으면 했는데 이번에도 아직 소식이 없었다.
부모님이 아이를 원하시니 혹시나 그것 때문에 해인도 서두르게 되었는지 걱정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괜스레 해인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아 미안했다.
그런 마음을 말하면 해인은 자신도 아이를 갖고 싶다고 했다. 그럴 때 보면 진심으로 아이를 원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지훈은 창문을 닫으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보물아! 부디 우리에게 다시 찾아와 줘.”
이 바람이 닿을 수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번 생일엔 이 소원이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간절히 기도하듯 계속되는 동안 지훈은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무거운 얼굴은 보여주기 싫었다.
도어락 버튼을 누르기 전 해인을 눈앞에 보고 있기라도 하는 듯 한껏 미소를 지었다.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기대감이 찾아들었다.
오늘 우리 해인이는 어떤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을까. 먼저 퇴근한다고 했으니 이미 들어와 있을 것이다.
따듯한 저녁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다. 같이 퇴근할 때면 밖에서 먹고 들어가는 날이 많았지만, 가끔 그녀가 해 주는 밥도 맛이 있었다. 물론 그 맛이라는 것이 요리 솜씨와는 무관했지만.
픽 웃은 지훈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해인의 모습이 보였다.
“어? 여기 있었어?”
놀란 지훈이 물었지만, 해인은 말없이 그의 목을 휘감으며 품에 안겼다.
얼핏 본 눈동자에 눈물이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해인아!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있어?”
지훈의 물음에도 해인은 말없이 고개를 흔들며 더 깊이 그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순간 내가 그렇게나 좋아, 라고 물으려던 지훈의 가슴으로 알 수 없는 전율이 일었다.
아무 일이 없는데 해인이 이렇게 눈물을 글썽인 적은 없었다.
더구나 남편으로서의 저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건 맞지만 무턱대고 이렇게 안긴 적도 없었다.
전율이 찾아온 직후 지훈의 가슴으로 밀려드는 건 감격이었다.
아! 드디어 바라고 바라던 일이 이루어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