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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우리에게 찾아온 보배. (87/92)


87. 우리에게 찾아온 보배.
2022.09.29.



“해인아! 설마 우리…….”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해인이 지훈의 목을 더 꼭 끌어안았다.

아침까지만 해도 그런 말이 없었다. 병원에 다녀온 것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확인하는 절차가 무색하게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차올랐다.


“맞아요. 다시 와 줬어요. 우리 보물이가.”

그것을 알기라도 하듯 해인이 먼저 그 물음에 응답해 주었다.

울컥 차오른 감정이 해일처럼 온몸을 덮치는 것만 같았다.

기쁨만은 아니었다. 첫 보물을 잃고 해인도 잃어야 했던 아픈 기억이 떠오른 탓이다.

이제 그럴 이유가 없음에도 그 과거는 때때로 이렇게 가슴을 아리게 만들었다.

그 순간 해인이 잠시 뒤로 물러섰다.

두 손으로 지훈의 볼을 감싸며 두 눈을 또렷이 응시했다. 그 눈동자가 마치 울지 말라는 듯 달래는 것 같기도 했다.

지훈은 울 듯이 웃으며 그 다정한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설마 혼자 병원에 다녀온 거야? 아침에는 그런 말 없었잖아.”

“혹시 몰라서, 확인하고 알려주고 싶었어요. 가서 아니면 실망할지도 모르니까.”

“아무리 그래도 병원은 같이 갔어야지.”

“내일 같이 가요.”

“그래. 그러자.”

다시 한번 진한 포옹을 나눈 두 사람이 비로소 현관을 벗어났다.

부모님께 먼저 알리라는 해인의 말에 지훈은 곧장 애란에게 전화를 걸어 임신 소식을 전했다.

* * *

임신과 함께 여기저기서 축하 인사가 날아들었다. 만나자는 약속들이 줄을 이었지만, 본가에 간 것을 제외하고는 해인은 거의 집에 머물렀다.

일이 끝나면 어김없이 집으로 왔고 가사 도우미가 해 준 집밥을 먹으며 안정을 취했다.

한 번의 유산을 겪은 탓인지 지훈은 여러모로 걱정이 많았다.

벌써부터 휴직을 권고하고 까다롭게 출산용품을 고르는 등 욕실에선 혹시나 미끄러질지 모르니 조심하라며 이래저래 잔소리도 늘었다.


“친구가 꼭 만나고 싶다는데…….”

“만나야지.”

“근데 얼굴이 왜 그래요.”

“내가 뭘. 아직 초기니까 사람 많은 데 가면 위험할까 봐 그러지.”

이럴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을 지훈도 잘 알았다.

임신했다고 항상 위험한 것도 아니고 집에만 있는다고 해서 안전하다는 보장도 없다는 것을.

지훈은 나란히 앉은 해인의 배에 손을 얹어 보았다. 태동이 있으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 어느덧 이렇게 만지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우리 보배, 잘 있지?”

보배는 아기의 새로운 태명이었다.


“그럼요. 아빠한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달라는데요?”

“그래. 내일 만난다고? 그럼 조심해서 잘 만나고 와. 근처에 있을 테니까 끝나면 전화하고.”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그렇게 해. 그래야 나도 마음이 편해.”

함께 만나자고 하면 친구가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그러니 기사 노릇이라도 착실히 해야겠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 * *



“밥 먹고 백화점도 가자. 내가 이번엔 아이 옷으로 골라 줄게.”

“벌써 그럴 필요는 없는데…….”

“내가 사 주고 싶어서 그래. 내가 지난번 지오 CD 사 준 것이 어찌나 후회가 되던지. 진짜 내가 왜 그랬나 싶다.”

“그땐 너도 몰랐잖아.”

연어 샐러드를 맛보던 해인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맛있는 것을 먹자며 고른 식당이 한정식이었다. 둘이 먹기엔 양이 많아서 음식이 남지 않게 열심히 먹던 중이었다.

친구는 여전히 지오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지오가 언론에 알려진 대로 그렇게 심하게 나쁜 건 아니었어.”

“어? 너, 마치 뭘 아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되묻는 소연의 말에는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그 한마디에 여전히 남아 있던 지오의 대한 미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진실을 전부 말할 수는 없지만, 적당히는 괜찮지 않을까. 해인은 수위를 조절해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도 건너 건너 들은 거야.”

“무슨 말? 나도 이야기해 줘.”

“별건 아니고, 지오도 정말 그런 의도까지는 아니었다고.”

“어떤 의도?”

“그러니까, 유혹하려고 데려온 건 맞는데 딱히 가두었다고는 볼 수 없고, 무엇보다 지오에게 그런 나쁜 짓을 하라고 사주한 다른 여자가 있다는 정도?”

“뭐야? 누가 지오에게 그런 나쁜 짓을 하라고 사주해?”

“열 내지 말고. 하여간 지오가 아주 나쁜 놈은 아니라고.”

“덜 나쁜 놈이나 더 나쁜 놈이나 나쁜 놈은 나쁜 놈이지.”

“그렇긴 하지.”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얼른 먹어. 먹고 선물 사 준다며.”

푸짐한 식사를 마친 해인과 소연은 곧장 인근에 있는 백화점으로 향했다.

이제 고작 6주였다.

벌써 아기용품을 고르는 것이 민망했지만 소연은 기어이 해인을 데리고 신생아 용품 매장으로 향했다.

작고 앙증맞은 아기 옷들이 너무 예뻐서 뭘 골라야 할지 망설여졌다.

고민만 하는 해인을 대신해 소연은 직접 아기 내복과 모자와 젖병을 골라 계산까지 해 버렸다.

그대로 헤어지기는 아쉬워 5층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주말 저녁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았다.

막 카페 입구로 들어서려던 찰나였다. 마침 안에서 나오는 두 명의 여자와 마주쳤다. 해인은 무심히 제 앞을 가로막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순간 입술에서 낮은 신음이 뱉어졌다.

오수빈.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이렇게 마주하는 여자가 이제 지겹기까지 했다.

해인은 말없이 시선을 피하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부디 그녀가 곱게 지나가 주길 바라며.


“뭐가 그렇게 잘나서 사람을 개무시할까?”

하지만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날카롭게 뱉어진 말에 해인도 놀랐지만, 옆에 있던 소연과 수빈의 친구로 보이는 여자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한테 하는 말이야?”

해인을 향해 묻는 소연의 표정이 물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응. 그런 것 같아.”

해인이 수빈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채 답했다. 곱게 보내 주려 해도 보내 줄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넌 뭔데, 라는 듯 수빈을 바라보는 소연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러나 수빈은 주변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일로 네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건 큰 오산이야. 기사 한 줄 안 나는 거 봤지? 내가 구정물을 뒤집어써도 결국 네가 할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야.”

잘난 척 으스대는 수빈의 꼴을 보니 해인도 더 이상 참아 주는 것은 무의미할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 한강 딸이라고 또 으스대는 거니?”

“사실이니까. 우리 한강은 그렇게 대단해. 겨우 옷 장사나 하면서 남편 집안에 빌붙는 거지 같은 장사꾼이랑은 완전 다르거든.”

“어머. 저 싸가지, 말하는 것 좀 봐.”

지켜보던 소연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제 친구는 제가 잘 안다. 절대 누구에게 이딴 말을 들을 만큼 잘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피해를 당했으면 당했지 누구에게 해를 입히지도 못하는 친구였다.


“뭐? 싸가지? 도긴개긴이라더니 천박하기는.”

“천박? 딱 너한테 어울리는 말이네. 남의 인생에 그따위로 말해 놓고 뭐가 어째?”

소연의 언성이 거칠어지자 해인이 그녀를 말리며 두 사람의 가운데 섰다.

입구에서의 소란인지라 점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고 있었다. 하지만 수빈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새끼는 네까짓 게 뭐가 좋다고 그 난리를 치고도 제대로 유혹도 못 하고 매장당했는지 참 모를 일이다.”

해인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이로울 게 없음에도 뭐가 저렇게 당당할까.

소문까지 잠재운 것은 상품권의 위력이었을 것이다.

근데 그걸 모르네.

해인은 픽 웃으며 어느새 제 옆으로 나란히 선 친구를 바라보았다. 소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음을 본 해인이 진정하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의의 심판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어쩌면 오늘은 그 정의의 심판이 꼭 필요한 날인 것 같았다.

해인은 당당히 어깨를 펴고 수빈을 노려보았다.


“지금 네가 한 말 감당할 수 있겠냐?”

“뭐래니.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나 한강 딸이야.”

수빈은 여전히 우쭐거렸다. 경황이 없어 당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자존심이 상했다.

이렇게라도 되갚아 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한강은 아니어도 너 하나쯤은 매장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해인 역시나 조금도 당할 생각이 없었다. 저렇게 으스대고 싶은 마음, 누군가에게 무시당하고는 절대 살 수 없는 그 자존심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똑똑히 보여 주고 싶었다.


“네가 했던 라면 광고 내려가나 안 내려가나 볼까?”

“아니,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넌 남자 뒤에 숨는 게 전부였잖아.”

수빈은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이 정도의 자극만으로도 눈앞의 여자는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겉으로는 당당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오들오들 떨고 있겠지. 그날도 지훈이나 장정들이 뒤에 있지 않았다면 제게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수빈은 생각했다.


“그건 숨는 게 아니라 나름 조용히 해결하고 싶은 내 마지막 배려였지. 근데 그걸 모르네.”

“뭐가 어째?”

“엄마를 그리워해서 우울증에 빠진 남자에게 날 유혹해 보라고 꼬드길 땐 기분이 어땠어?”

“……뭐?”

“지오 이야기하고 있잖아. 네가 나락으로 밀어 넣은 그 지오.”

수빈의 눈빛이 비로소 흔들렸다. 해인이 정말 그 일을 직접적으로 말할 줄 몰랐던 것이다.


“같이 죽자는 말이야? 그게 공개되면 너도 좋을 게 없을 텐데?”

“내가 왜? 난 피해자일 뿐이야. 너한테 속았으니 바보 아니냐는 말이 돌기야 하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하려고.”

해인은 구경하는 사람들이 다 듣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형형한 눈빛은 이제 시작이라는 듯 기세를 품고 수빈을 똑바로 향했다.


“지오는 가만 있었는데 네가 날 속여서 지오의 집으로 데려갔잖아. 그리고 내 옷과 핸드폰을 숨기고 심지어 문까지 고장 내서 날 지오의 집에 가두고 지오가 날 유혹해 주기만 기다렸잖아.”

“무슨 그런…….”

선이 굵고 큰 눈이 주위를 신속히 훑었다. 핸드폰 동영상이 촬영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때에야 알았다.

아빠가 손을 쓰면 저딴 동영상 따위는 얼마든지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돌고 도는 소문까지는 어쩌지 못할 텐데…….

수빈이 악다구니를 쓰듯 외쳤다.


“거짓말하지 마. 난 그런 적 없거든? 내가 그럴 만큼 지오랑 친하지도 않고.”

“거짓말? 너 우리 지훈 씨가 그 동네 CCTV 찾아내서 증거 확보하고 있는 거 모르지? 네가 나를 거짓말로 유인해서 데리고 갔잖아.”

CCTV? 그런 것까지 확보해 둔 건가. 점점 궁지로 몰리는 것 같은 수빈은 새로운 거짓말로 응수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끌고 간 것도 아니고 네가 지오 보고 싶다고 해서 갔잖아.”

하! 어떻게 저렇게 얼굴색 하나도 변하지 않고 거짓을 말할 수 있나.

해인은 주위를 둘러보며 반응을 살폈다. 그건 방금 수빈이 한 말의 파장을 살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해인은 이미 수빈을 시궁창으로 몰아넣을 결심을 굳혔고, 그래서 가능하면 더 많은 사람이 봐 주길 원할 뿐이었다.

관객은 충분했으나 그중 달래야 할 사람이 있었다. 지오로 인해 적잖이 충격을 받았을 친구.

지그시 소연을 바라본 해인은 저만 믿으라는 듯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놀라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소연의 얼굴에 의심 같은 것은 없었다.


“내가 너 대신 저거, 머리채라도 잡아 줄까?”

“아냐. 네 손이 아까워. 내가 할게.”

해인은 이전보다 더 단단해지고 결연한 표정으로 수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황이 이쯤 되었으면 주눅이 들 법도 한데 뭐가 그렇게 당당한지 여전히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태생부터 특권에 절어 있어서 그런지 이 정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듯 보였다.

해인은 그저 진실의 힘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지오는 날 가둔 게 아니라 열린 문이 있다는 것까지 알려줬어. 나한테 고백하고 차이긴 했지만, 고의적인 유혹 따윈 없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잘못을 인정했어. 그 결과로 지금까지도 죽일 놈 소리를 듣고 있고. 근데 넌 뭐가 그렇게 당당해?”

“내, 내가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어딨어. 그 자식이 멍청한 거지.”

차려 준 밥상도 먹지 못하는 바보 같은 놈.

수빈은 한마디를 더 하고 싶었지만, 비소를 흘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곁에 있던 친구마저도 흠칫 놀라 그녀의 옷깃을 슬쩍 잡아당겼으나 수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계를 느낀 소연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해인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주위도 소란스러워졌다.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헛갈리면서도 마지막 수빈의 말이 뭔가 미묘하게 들렸던 까닭이었다.

그 와중에 소연보다도 더 분노하며 지켜보던 한 여자가 있었다.

노랑머리의 그녀는 이제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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