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 벅찬 감격의 순간. (89/92)


89. 벅찬 감격의 순간.
2022.10.06.


군복차림의 저격수 모습을 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렜었는데 묵직하게 깔린 저음까지 곁들이니 이전과는 다른 설렘이 있었다.


“포로는 정신 차리고 대답한다.”

“아!”

넋 나간 사람처럼 지훈을 보고만 있던 해인이 구름 위를 떠돌던 정신을 붙들어 맸다.


“포로도 인권이 있는데 무조건 명령에 따르라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아니, 사람을 말도 못 하게 하는 건…….”

해인이 새침하게 딴지를 걸 때였다.

다다다다!

지훈이 천장을 향해 총알을 발사했다. 경쾌한 총알 소리와 함께 천장을 맞고 떨어진 총알들이 바닥을 또르르 굴렀다.

이런 걸 자업자득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임신 중이란 사실을 잊은 건 아니죠?”

“알고 있으니 염려 마라.”

지훈이 차분히 대꾸했다. 오늘의 이 이벤트는 상진과 함께 준비했다. 도저히 혼자 할 수 없는 이벤트였기에 어쩔 수 없이 도움을 구했다.

부디 우리 해인이가 이 이벤트를 잘 즐겨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포로가 꽤 새침하다는 것도 이미 예상한 바였다. 어느 정도나 호응해 줄지 모르겠지만 변수가 있다 한들 그건 그것대로 즐거울 것이다.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


“포로는 지금부터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는다.”

“별로 거추장스럽지 않은데?”

“포로가 말을 듣지 않으면 오늘의 이벤트는 물 건너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지훈의 경고성 짙은 한마디에 해인이 픽 웃으며 그의 등 너머를 바라보았다.

불빛이 반짝거리며 천장 위로 하트 모양의 풍선들이 둥둥 떠 있었다. 아까부터 시선이 가긴 했는데 거실 안쪽엔 뭐가 있을까 궁금해졌다.

지훈은 며칠 전부터 이벤트를 제대로 즐기려면 우리 해인이가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땐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이제야 알 것 같다.

일정 부분 장단을 맞춰 줄 필요는 있었다.

해인은 코트를 벗어 바닥에 내렸다.


“더 벗으면 체온이 내려가서 아기에게 해로울 수도 있어요.”

“좋다. 그럼 이제 포로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간다.”

아무리 이벤트라지만 우리 아기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할 수는 없지. 명령을 내린 지훈이 천천히 옆으로 비켜 주었다.

드디어 안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들떴다. 해인이 거실로 향하는 그 와중에도 지훈은 똑바로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꼭 진짜 스나이퍼처럼.

그 모습이 우습기도 설레기도 하던 찰나, 드디어 눈앞으로 거실이 나타났다.

흡사 드라마에서나 볼 것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삼단 케이크와 여러 다발의 장미꽃, 그리고 풍선이 가득한 거실엔 수없이 많은 향초가 붉을 밝히고 있었다.

테이블 위엔 와인과 함께 은색 돔 디쉬로 덮인 음식도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신기한 건 커다랗고 둥근 박이 천장에 세 개나 걸려 있다는 것이다.

저 안에도 뭐가 들어 있는 건가.


“우와! 이걸 언제 다 했어요?”

“포로는 더, 더 목소리를 높여 감격한다.”

반응이 별로였는지 지훈이 못마땅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해인은 어쩔 수 없이 두 손을 꼭 모으며 과장되게 감격의 리액션을 했다.


“우와. 우와! 진짜 멋져요.”

“좋다. 포로는 저기 소파에 편안히 앉는다.”

해인은 순순히 소파에 앉았다. 여전히 자신에게 겨누어진 총구를 바라보는 입가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해인이 앉자마자 천정의 둥근 박으로 시선을 옮긴 지훈이 총알을 발사했다. 박이 터지는 순간, 꽃가루처럼 종이들이 흩날리며 떨어지고 플래카드가 쫙 펼쳐졌다.

플래카드에 쓰여 있는 글자를 본 해인이 환한 웃음을 터트렸다.

[생일 축하해.] 


“포로는 웃기만 하면 되겠나. 힘차게 손뼉을 치며 함성을 지른다.”

아! 간지러운 건 체질에 안 맞는데…….

하지만 저 가상한 노력을 외면할 수 없었던 해인이 열심히 손뼉을 치며 함성을 질렀다.


“우와아!”

그 함성과 함께 또다시 총알이 발사되었다.

이어 두 번째 박이 터졌다. 거기엔 또 다른 글귀가 쓰여 있었다.

[해인아! 사랑해!] 


“우와와아!”

이번엔 시키지도 않았는데 해인이 알아서 함성을 질러냈다.

발까지 동동 구르며.


 
그렇게 세 번째 박이 터졌고, 그 안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 사랑 영원히.]
 
물개박수를 치던 해인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일어나 지훈에게로 다가갔다. 하지만 몇 걸음도 못 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총구를 돌린 지훈이 버티고 선 까닭이다.


“누가 일어서라고 했나.”

“너무 감격스러워서, 지훈 씨 품에 안기고 싶어서.”

“포로는 참는 법을 모르나.”

“오늘은 모르고 싶은데?”

아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이런 이벤트를 받았으니 기꺼이 몰라야지. 그것이 이벤트를 해 준 남자에 대한 도리라고 해인은 생각했다.

주저할 필요도 없었다.

해인은 요염한 미소를 흩뿌리며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고는 한 발을 내디뎠다.

한발만 더 움직이면 총구에 닿을 것이었다. 해인이 움직이려 하자 지훈이 뒤로 물러섰다.


“이런! 아까 한 명령에 따른 건데 만족스럽지 않나요?”

해인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 옷깃 사이로 뽀얀 살결이 비쳤다.

그와 동시에 지훈이 흐읍, 숨을 들이켜며 다시 한 발을 물러났다.


“뭐야. 설마 무서운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지훈이 여전히 총구를 겨누며 어림도 없다는 듯 부정했다. 고고히 서 있는 자태는 그가 입고 있는 군복과 사뭇 잘 어울렸다.


“포로는 이제 천천히 안방으로 들어간다.”

안방에도 뭐가 있나. 해인은 지훈과 마주 보며 유유히 안방으로 향했다.

처음엔 꽃게처럼 걸었지만, 그다음엔 안방과 등을 지고 걸으며 지훈과 눈동자를 마주했다.

손으로는 유유히 단추 하나를 더 풀면서.

새하얀 살결이 조금 더 드러나자 지훈이 흠칫 눈을 떨었다.

안방에 도착한 해인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풍선은 없었지만, 화장대 위에 장미꽃 화병이 있었고 침대 위에는 장미꽃 송이가 흩뿌려져 있었다.

향수라도 뿌렸는지 꽃으로만 낼 수 없는 진한 향기가 코끝을 찌르듯 덮쳐왔다.

해인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이제 옷 벗으면 되는 거죠?”

지훈의 얼굴에도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차올랐다. 총을 세워 바닥에 짚는 그 순간에도 몸이 뜨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포로가 너무 성급하네. 참을성이 없어.”

어느새 총을 팽개치며 성큼 걸어가는 그의 걸음에도 참을성은 없었다.

돌진하듯 다가와서는 해인을 들어 침대의 한 가운데로 옮겨 그 위에 자리를 잡았다.

해인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목에 두 팔을 휘감았다. 무뚝뚝하고 타인에게 무관심했던 남자가 이런 이벤트도 할 줄 알다니 참으로 놀라웠다.

장미와 풍선에서 벗어나 군복을 입고 박을 터트린 것은 꽤나 참신하고 창의로웠다. 대부분이 상진의 아이디어였을 것이지만 그런데도 대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너무 멋져요.”

“군복 입는 거 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런 말도 기억해 주고. 진짜 감격했어.”

“기억을 못 할 리가 없잖아. 해인이 원하는 건 뭐든지 해야지.”

“고마워요. 내 생애 최고의 생일이었어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으음?”

해인이 몸을 뒤로 빼며 지훈과 얼굴을 마주했다.


“이제 본 이벤트 시작이잖아.”

흡족히 말한 지훈이 해인이 풀다 만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거침없던 이전과는 다르게 오늘따라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우리 보배 잘 있지?”

“네.”

“피곤하지 않을까?”

“나는 좀 피곤한데…….”

배도 고프고.

생각해 보니 아직 삼단 케이크에 불도 붙이지 않았다.


“이제 와서 엄살이 통할 것 같아?”

그럼 왜 물어봤니. 해인이 눈을 찡그려 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지훈의 키스였다.

깊게 입술이 맞물리고 보드라운 꽃잎을 만지는 것처럼 서로를 어루만졌다.

지훈은 뜨거워진 몸을 절제하며 그렇게 오래도록 안고 느끼는 것에만 집중했다.

해인의 엄살이 통했다기보다는 아직은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어서였다.

.
.
.

 


“잘 먹네.”

“맛있어요.”

돔 디쉬 안에는 스테이크가 있었다. 많이 식긴 했지만, 육질을 느끼는 데엔 무리가 없었다.

스테이크의 맛이 느껴지지 않을까 치즈 케이크는 조금만 먹었다. 풍미를 더한 딸기의 맛도 좋았다.


“그래. 입덧이 없어서 다행이야.”

“지금은 괜찮아도 몇 주 더 지나서 생길 수도 있다고 해요.”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 해인이 잘 먹어야지.”

“지훈 씨도 먹어요. 근데 그 군복은 안 벗을 거예요?”

침대 위의 마지막 이벤트가 끝난 후 지훈은 군복을 다시 챙겨 입었다.

이유인즉 해인이 원하니까 마음껏 보라는 것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1년에 생일이 한 번이라는 것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성대한 이벤트였지만 기획하는 사람에게는 피곤한 일이고 받는 사람은 사실 간지러운 감이 없잖아 있었다.

여러모로 오늘은 영원히 잊지 못할 날이 될 것 같았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해인은 배가 부른 채로 여름을 지났다. 생명을 품고 있어서인지 유난히 더운 여름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해인이 테라스로 향했다. 날이 많이 서늘해졌지만, 공기는 상쾌했다.

푸른 가을 하늘을 보며 스트레칭을 하고 호흡도 길게 들이켜 보았다.

예정일이 다가오니 오히려 잠이 줄었다고나 할까. 가끔 긴장도 되고 설레기도 하고 또 어서 빨리 나왔으면 싶었다.


“춥지 않아?”

어느새 다가온 지훈이 외투를 걸쳐 주었다.


“괜찮아요.”

“그래도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잠깐만 있다 들어가자.”

지훈은 여러모로 신경 쓸 것이 많았다.

보배가 잘 크고 있어서 다행이지만 혹시라도 몸이 무거워 해인이 힘들지는 않을까, 산통이 심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의사는 머리 크기도 좋고 심장 소리도 좋다며 아기가 태어나면 축구를 잘하겠다고 했다.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은 없었지만, 시부모님들께서는 은근 좋아하시며 해인에게 잘했다고 칭찬을 해 주셨다.

그때를 떠올린 지훈이 미소를 지으며 해인의 배로 손을 가져다 댔다.

이렇게 손을 얹고 있으면 보배가 한 번씩 발차기를 하곤 했다.


“오늘은 어때?”

“자나 봐요.”

“그래? 잠도 잘 자고 발차기도 잘하고. 틀림없이 건강한 아이가 나올 거야.”

“지훈 씨를 닮았을 것 같아요.”

“당연하지. 아빤데.”

지훈의 입가로 뿌듯한 미소가 흐르던 그때였다. 진동처럼 해인의 배가 쿵 하고 움직였다.


“보배가 아빠 목소리 듣고 일어났나 봐요.”

“그래. 나도 느꼈어.”

태동을 느낀 지훈은 벅차오르는 감격을 숨기지 못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꼭 축구를 할 것이다.

이 아이를 데리고 산으로 들로, 강으로 다니며 즐거운 경험을 시켜 줄 것이다.

이 벅찬 감격의 순간을 평생 잊지 않고 소중하게 사랑하고 또 사랑해 줄 것이었다.


“오후에 운동할 거지?”

“해야죠. 오늘은 좀 일찍 나가요.”

두 달 먼저 휴직을 신청한 해인은 지훈이 퇴근을 하면 함께 저녁을 먹고 공원을 걸었다.

운동을 해 주면 아이가 더 수월하게 나올 수 있다고 해서 한 시간 정도는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출근을 준비하는 지훈을 졸졸 따라다니던 해인은 힘없이 소파에 앉았다. 새벽부터 몸이 이상하긴 했다.

그러더니 지금은 슬슬 배가 아파 왔다. 많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혹시 이게 산통인가 싶어 덜컥 겁이 났다.


“지훈 씨, 나 몸이 이상해요.”

넥타이를 매고 나오던 지훈이 놀라서 다가왔다.


“왜? 어디 아파?”

“그게 아랫배가 살살 아픈 게 아무래도 이상해요.”

“뭐? 벌써? 예정일은 아직 1주 남았잖아.”

지훈이 해인의 배를 만지며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설마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지. 순간 아기가 빨리 나올 수도 있다고 했던 의사의 말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걱정스러운 그의 눈을 보며 해인이 차분히 안심시켜 주었다.


“그렇긴 한데 의사 선생님이 일주일 정도는 빨리 나올 수도 있다고 했어요.”

“그래? 그럼 지금, 진통을 느끼는 거야?”

지훈은 다급해졌다. 경험이 없으니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부터 앞섰다.

진통이 오면 나름 침착하게 잘 대처하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이런 상황이 되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많이 아파?”

“아니요. 아직 그렇지는 않아요.”

“가자. 병원에. 얼른 일어나.”

“그래요. 그래야 할 것 같아요.”

해인은 일단 필요한 베이비 용품을 넣어 둔 가방을 챙겼다.

허둥대는 지훈은 그저 해인의 몸을 붙들며 행여라도 넘어질까 잡아 주는 것이 전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