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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에필로그 1 (91/92)


91. 에필로그 1
2022.10.13.



 


“다 챙겼어요?”

“아직. 좀만 더 기다려.”

“지훈 씨, 이사 가요?”

“어?”

가방 안에 기저귀를 담던 지훈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쳐다보았다. 해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기저귀를 뺏어 들었다.

오늘은 처음으로 지호가 본가에 가는 날이었다. 그동안은 아이 데리고 움직이기 힘들다며 시부모님들이 한 번씩 다녀가셨다.

하지만 지호도 이젠 어엿한 육 개월로 접어들었다. 이유식도 시작했고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공원이나 인근의 외출도 잦아졌다.

본가에 가서 점심과 저녁까지 먹을 예정이었기에 지호를 위해 챙겨야 할 것이 많았다.

아무리 그래도 가방이 다섯 개라는 건 이상했다.


“기저귀가 너무 많잖아요. 보온병도 그렇고. 아휴! 옷은 대체 몇 벌이나 넣은 거예요. 진짜.”

“우리 지호가 워낙 잘 먹고 잘 싸잖아. 흘리기도 잘하고.”

“그래도 많아요. 적당히 해요. 아니, 내가 할 테니까 가서 지훈 씨 옷이나 챙겨 입어요.”

“그……럴까?”

동의하기 싫었지만, 해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할 것 같았다. 힐끗 돌아보니 기저귀 몇 개와 물이 담긴 보온병 한 개를 빼는 것 같았다.

우리 지호가 물을 얼마나 많이 먹는데 저걸 빼나. 본가에도 물은 있겠지만 그래도 늘 마시던 물을 먹어야 속이 편하지 않을까.

그렇게 한마디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짐을 빼는 해인의 한숨 소리가 생각보다 컸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준비를 마치고 차에 올랐다. 카시트에 홀로 앉은 지호는 차에 타자마자 잠이 들었다. 옆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해인이 나직이 말했다.


“지호가 낯가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번에 오셨을 때 낯설어하는 거 같던데 걱정이에요.”

“애들이 다 그렇지, 뭐. 울어도 어쩔 수 없어.”

“그래도 아버님 어머님 보고 울어 버리면 난처할 것 같아요. 울지 않고 잘 안기고 잘 놀다 오면 좋을 것 같아요.”

“걱정 마. 우리 지호 운다고 뭐라고 하실 분들 아니니까. 마음 편하게 있어. 울더라도 내가 다 알아서 할 거니까.”

지훈이 든든하게 말해 주니 마음이 놓이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었다. 얼굴을 구분할 줄 알면서부터는 서서히 낯가림이 시작되었다.

그토록 아기를 바라셨던 분들인데 지호가 가지 않으면 많이 섭섭해하실 것이다.

부디 우리 지호가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 잘 안겨서 그분들이 마음껏 손자의 재롱을 보는 것이 해인의 작은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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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휴, 예뻐라! 우리 지훈이 아기 때를 똑 닮았어. 안 그래요?”

“그러니까. 지훈이를 빼다 박았네그려.”

“당신만 안고 있지 말고 나도 좀 줘 봐요.”

“우리 손주가 이 할애비가 좋다잖아.”

해인의 바람은 넘치도록 이루어졌다. 지호는 뜻밖의 웃음 애교를 발산하며 사랑스러운 손주로서의 제 역할을 다했다.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방긋방긋 웃는 손주로 인해 윤 회장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지켜보는 애란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나. 우리 손주 웃는 것 좀 봐요.”

“하하하! 이 할애비 보고 웃는 거야. 그동안 내가 보고 싶었나 봐, 우리 손주가.”

때에 맞춰 지호가 우아아, 하며 옹알이를 해 주었다. 그것이 그렇다는 뜻으로 들렸기에 윤 회장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옳지, 옳지. 우리 지호.”

윤 회장이 지호의 엉덩이를 들썩이며 노래를 부르듯 흥겨워했다.

며느리가 귀하디귀한 손자를 낳아 주었다. 진심으로 며느리가 고마웠고 고마운 만큼 손자가 사랑스러웠다.

손주를 얻은 기쁨은 기대 이상이었다. 아기가 늙은 할아버지를 보고 이렇게 웃어 주니 그보다 더한 기쁨이 없었다.


“팔도 아플 텐데 우리 지호, 이리 줘 봐요. 나도 좀 안아 보게.”

“됐어. 거기 앉아서 과일이나 먹어.”

“저렇게나 좋으실까.”

애란이 못 말리겠다는 듯 웃어 버렸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지훈과 해인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애란은 지호가 제 차지가 되지 못할 거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저렇게나 지치지도 않고 아이를 볼 줄도 몰랐다.

애란이 멜론이 있는 접시를 해인에게 밀어 주었다.


“과일 좀 먹어라. 아니, 들어가서 좀 쉬렴? 금방 점심 먹어서 몸이 나른할 텐데…….”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래. 쉬고 싶으면 언제든 지훈이 방에 올라가서 쉬어. 우리 지호가 저렇게 잘 노는데 뭐가 걱정이니.”

애란이 윤 회장을 흘겨보며 말했다.


“그래. 걱정 말고 올라가서 쉬어. 아버지 지치시면 내가 알아서 할게.”

지훈이 거들고 나섰다. 해인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자상한 할아버지와 손주와의 만남이 어떤 영화보다도 좋았기에 피곤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훈이가 집에서도 잘 도와주니?”

“그럼요. 당연하죠.”

해인에게 물었는데 지훈이 냉큼 말을 가로챘다.


“넌 조용히 하고.”

애란이 툭 쏘아붙였다.

지훈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해인을 바라보았다. 미소를 머금은 해인이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


“잘 도와줍니다. 아주 잘 도와줘서 제가 많이 고마워요.”

“그래. 그래야지. 자식은 같이 키우는 게 최고야. 저렇게 잘 노는 것을 보니 지호가 많이 힘들게 하지는 않는 것 같구나. 지훈이도 입덧이 심해서 그렇지, 키울 때는 그렇게 까탈스럽지는 않았단다. 넌 입덧도 심하지 않아서 그나마 수월했지.”

“네. 지호가 효자예요.”

“얼마나 다행이니. 그나저나 휴일엔 너도 좀 쉬어야 하는데 네 시아버지가 지호를 워낙 보고 싶어 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늙어서 손주를 보니 저렇게나 좋은 모양이시다.”

“아버님이 지호 봐 주니까 저는 편한데요?”

해인의 시선이 손주에게 정신이 팔린 윤 회장을 향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른 채 윤 회장은 손주를 향해 까꿍, 까꿍 하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지호는 그런 할아버지가 우스운지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아기의 해맑은 그 웃음이 모두에게 번져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네 시아버지가 저녁까지 진수성찬으로 대접하라고 했으니까 전부 먹고 가렴. 모유 잘 나오라고 사골국도 끓여 놨으니까 가져가고.”

“감사합니다. 어머니.”

한참 예쁜 짓을 하던 지호가 할아버지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지훈과 해인은 놀랍다는 듯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신없이 자는 것을 보니 외출과 재롱으로 인해 체력소모가 많았던 모양이었다.

할아버지의 품을 떠나 침대 위에 눕혀지는 그 순간에도 지호는 깨지 않았다.

손주가 깊이 잠들어 주어서 모두가 조용히 쉴 수 있는 시간이었음에도 윤 회장은 그것이 서운했다.

해인은 아기가 깨서 놀라지 않도록 침대 옆을 지키며 함께 잠이 들었다.

잠시 쉰다며 애란도 방으로 들어간 후 지훈과 윤 회장이 단둘이 마주했다.


“이젠 너도 그만 회사로 돌아와야지. 대체 언제까지 거기 있을 셈이냐.”

지금도 어차피 중요한 사안은 지훈과 의논하에 일 처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복귀가 더 늦어지는 것은 좋을 것이 없었다.


“반년만 더 기다려 주세요. 엘브도 이제 서서히 안정이 되어 가고 있으니 해인이가 회사로 돌아올 때쯤 제가 가면 될 것 같아요.”

윤 회장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딱히 늦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지호는 뭘 잘 먹니? 고기, 아니면 생선?”

“이제 겨우 이유식 시작입니다. 아버지.”

“그래. 그럼 우리 지호는 무슨 운동을 좋아할까?”

“축구 아닐까요?”

“그래? 그럼 나도 축구를 배워야 하겠구나.”

“축구는 그냥 발로 차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도 그게 아니지.”

“조기 축구라도 나가시게요?”

“그것도 좋은 생각이구나.”

조기 축구가 문제랴. 필요하면 야구도 배울 것이다. 속으로 굳은 결의를 다지는 윤 회장을 본 지훈의 입가로 낮은 한숨이 흘렀다.


“그러다 쓰러지시면 영영 우리 지호 못 보는 수가 있습니다.”

“그건……, 안 될 말이지.”

냉정한 지훈의 한마디에 윤 회장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조기 축구는 힘들지라도 손주에 대해 궁금한 것은 여전히 많았다.


“그럼 장난감은 자동차 말고 또 뭐가 필요할까?”

“지금 사 주고 계시는 장난감만으로도 벅차니 그만 보내세요. 아버지 저 어릴 때 하신 말씀 기억나세요?”

“내가 무슨 말을 했다는 거냐.”

“결핍이 있어야 소중함도 알게 되는 법이다, 라고 하셨죠.”

“에헴.”

정곡을 찔린 윤 회장이 괜한 헛기침을 했다. 사실 다음 주에 도착할 장난감도 산더미였다. 뭘 좋아할지 모르니 기차도 준비하고 정글짐도 준비해 두었다.

뭐든 준비성이 좋은 것은 바람직한 일이니까.


“해외직구까지 하시고. 참, 저도 못 해 본 일도 하시고. 새삼 존경스럽습니다.”

“에헴.”

그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서서히 날이 저물어 갔다. 지훈이 아기와 해인의 곁으로 가려 했으나 윤 회장은 놓아주지 않았다.

이후로도 지훈은 계속해서 지호와 관련한 이야기를 해 주어야 했다.

얼마 후, 지호의 울음소리와 함께 집 안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잠에서 깬 지호는 엄마를 찾았고 해인은 칭얼거리는 아이를 안고 얼러 주었다.

지호를 안은 해인이 이 층에서 내려와 할아버지의 품에 안김과 동시에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지훈이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어 주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은 다름 아닌 하 비서였다.

해인은 그가 반가우면서도 일요일에 이곳까지 온 이유가 의아했다.


“하 비서님? 하 비서님이 여기까지 웬일이세요?”

“형수님. 오랜만입니다.”

“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아주 잘 지냈습니다. 부사장님이 내일 회의자료 검토해야 하는데 부족한 게 있다고 챙겨오라고 하셔서 이렇게 왔고요. 휴일에 쉬지도 못하고.”

원망에 찬 상진의 시선이 지훈에게로 향했다.

지훈의 입에서 작게 실소가 터졌다. 이메일로 보내도 된다는 것을 굳이 근처에 있다고 잠깐 들르겠다고 한 것은 상진이였다.

하여간 진실을 희석하는 데엔 일가견이 있었다. 해인이 악덕 업주 바라보듯 보지 않았다면 대충 넘어가 줄 일이기도 했다.


“하 비서가 우리 지호가 보고 싶다고 해서 겸사겸사 오라고 한 거야.”

“그렇기도 합니다. 형수님.”

멋쩍은 표정을 지은 상진이 아이를 찾는 듯 시선을 움직였다. 막 잠에서 깬 아이는 다시 윤 회장의 품에 안겨 재롱을 떨고 있었다.

윤 회장과 애란에게 차례로 인사를 한 상진이 조심스럽게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할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던 지호가 눈을 말똥말똥 굴리며 제게로 다가오는 남자의 정체를 살폈다.

아는 사람일까 아닐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몇 번 지호를 보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이가 상진의 얼굴을 기억할 리 없었다. 그러나 상진은 기대를 품고 아이에게 두 팔을 벌렸다.


“지호야! 삼촌이야. 삼촌. 삼촌에게 올래?”

과연 갈까 싶어 모두가 그 모습을 집중하여 지켜보았다. 지호가 새로운 사람에게 안길지, 할아버지를 버리고 갈지 다들 궁금한 눈치였다.

그 분위기를 알았는지 지호가 눈망울을 또르르 굴리며 엄마와 아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할아버지를 다시 한번 보고는 이내 품속으로 숨어 버렸다.


 
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순식간에 희비가 교차했다.

윤 회장은 아가의 선택을 받은 것에 가슴이 벅찼고 지호에게 버림받은 상진은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을 지었다.

해인은 괜스레 미안했고 지훈은 응당 그러려니 했다.


“아이들이 원래 자주 안 보면 낯설어하기도 해요.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하 비서님.”

“아가들이 다 그렇죠. 뭐. 저는 괜찮습니다. 형수님.”

상진이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표정을 관리했다. 솔직히 아가가 너무 예뻐서 꼭 안아 보고 싶기도 했다.

형수님이나 상사의 외모가 워낙 출중하니 당연히 예쁠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제로 보니 기대 이상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얼굴을 보며 낯을 익혔으니 다음에 만나면 안겨 줄지도 모를 일이다. 상진의 가슴으로 작은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

그가 윤 회장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더 이상 머무르면 불청객이 될 수도 있었다.


“이제 그만 가 보겠습니다.”

“하 비서. 여기까지 왔는데, 식사하고 가요. 오랜만에 봐서 반갑잖아.”

애란이 친근한 목소리로 상진을 만류했다. 예정에 없는 일이었지만 식사 때 온 손님을 그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상진은 곧장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러지 말고 같이 식사해요. 차린 게 많아서 먹을 사람이 더 필요하기도 해요.”

애란이 재차 강권하자 상진이 잠시 주춤했다. 그저 서류 핑계 대고 아기 얼굴이나 보고 가려 했는데 일이 좀 커져 버렸다.

상진이 망설이자 해인까지 나서서 그를 붙들었다.


“식사하시고 가세요. 여기까지 왔는데…….”

“하지만…….”

상진은 여전히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곳은 어디까지나 상사이자 사주의 본가이며 저는 그저 일개 비서에 지나지 않았다. 함께 식사까지 하기엔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결국, 보다 못한 지훈이 툭 쏘아붙였다.


“근데 너 서류는 가져왔냐? 서류 주러 왔잖아. 지호만 보고 그냥 갈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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